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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ㅣ세계 교회사

[한국] 초대 조선교구장 브뤼기에르31: 서만자에서 조선 교회에 서한을 보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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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17-12-10 ㅣ No.943

[초대 조선교구장 브뤼기에르] (31) 서만자에서 조선 교회에 서한을 보내다


오로지 조선행에 매달렸는데 암울한 소식 들려오고

 

 

신자들의 헌금으로 최근 새로 지은 서만자 성당.

 

 

브뤼기에르 주교는 1834년 10월 8일 서만자(西灣子)에 도착했다. 산서대목구청에서 시작해 만리장성을 넘어 서만자까지 17일간의 여정을 마감했다. 서만자는 프랑스 라자로회 선교부가 관할하고 있었기에 브뤼기에르 주교는 포르투갈 선교사들의 방해를 받지 않고 비교적 자유롭게 이곳에서 조선 입국을 준비할 수 있었다. 서만자는 17세기 말 복음이 전해진 교우촌이다. 

 

브뤼기에르 주교가 서만자에 거주할 당시 책임자는 중국인 설 마태오 신부였다. 그는 프랑스 라자로회 선교사들이 북경에서 추방될 때 끝까지 남아 선교부를 서만자로 옮긴 장본인이다. 브뤼기에르 주교는 마카오에서 출발하기 전 라자로회 대표부의 장 바티스트 토레트(Jean Baptiste Torrette, 1801~1840) 신부로부터 설 신부의 됨됨이를 들어 알고 있었다. 그래서 브뤼기에르 주교는 산서대목구에서 설 신부에게 연락해 “서만자에 거처를 마련해 달라”고 주저 없이 도움을 청했고, 설 신부는 “기꺼이 맞이하겠다”며 주교를 초대했다. 그러고 보면 한국 교회는 프랑스 라자로회와 인연이 깊다. 1790년 북경에서 윤유일(바오로)에게 세례성사를 준 니콜라 조제프 로(Nicolas Joseph Raux, 1754~1801) 신부도 라자로회 소속이다. 

 

브뤼기에르 주교는 설 신부와 서만자 신자들을 칭송했다. “서만자는 꽤 큰 마을이고 거의 모두가 교우들이다. 이 신입 교우들은 열심한 사람들이며 사제들을 좋아한다. … 그들에게는 성당이 하나 있었는데 죽은 황제가 교우들을 유배지로 보내고, 선교사들을 형장으로 보내던 때와 같은 시기에 세워졌다. 이 성당은 금세 너무 비좁아져 교우들은 현재 훨씬 더 큰 성당을 한 채 짓고 있다. 조만간 완성될 것이다. 이 신입 교우들은 매우 가난하지만, 자신들이 모은 기금과 동료들의 헌금으로 해내고 있다.”(브뤼기에르 주교 「여행기」에서)

 

- 서만자 산 중턱에 있는 성직자 묘지. 중국 문화혁명 때 홍위병에 의해 훼손된 선교사들의 묘비가 그대로 서 있다.

 

 

브뤼기에르 주교가 감탄한 서만자 신자들의 헌신은 지금도 이어지고 있다. 브뤼기에르 주교가 서만자에 머물 당시 짓던 성당은 문화대혁명 때 중국 공산당에 몰수돼 공회당과 극장으로 사용됐다. 30년 전 중국 개방 이후 교회가 다시 인수해 성당으로 사용해 오다 최근 허물고 새로 지었다. 북경이 2022년 동계 올림픽 개최지로 확정되면서 서만자 일대는 스키장과 그 부대시설로 개발되고 있다. 토굴과 허물어질 듯한 벽돌집에 살던 신자들이 개발 보상비로 받은 돈을 성당 건축기금으로 내면서 웅장한 새 성당이 들어섰다. 서만자 신자들은 헌금하는 것으로만 그치지 않고 직접 벽돌을 굽고, 건축자재를 나르고, 성상을 조각하는 등 모든 곳에 신자들의 손때가 묻어 있을 만큼 수고와 희생을 아끼지 않았다.

 

지금도 북경 인근에서 유일하게 스키장이 있을 만큼 서만자는 춥다. 8월 말부터 서리가 내리기 시작해 9월 초순이면 도시가 꽁꽁 언다. 겨울이면 영하 37℃까지 내려간다. 숨 쉬면서 나오는 입김에 턱수염과 콧수염이 고드름처럼 언다. “제대 옆에 두 개의 화로가 있다. 미사주를 뜨거운 물이 든 병에 담가둔다. 이러한 예방책들에도 불구하고 성체와 성혈이 어는 것을 막기가 매우 어려웠다. 이런 상황에서는 금속에 손을 댈 수 없다. 손이 아주 조금만 축축해도 즉시 물건이 꽉 달라붙기 때문이다. 이따금 살갗이 벗겨지고 나서야 물건을 뗄 수 있다. … 콧수염과 턱수염이 서로 달라붙고, 입술이 마치 열쇠로 잠근 듯이 되어 버리는 것을 막지 못한다.”(브뤼기에르 주교 「여행기」에서)

 

서만자 주민들은 전통적으로 춥고 긴 겨울 때문에 토굴 생활을 많이 했다. 사진은 저장창고로 사용하고 있는 토굴 모습.

 

 

브뤼기에르 주교가 서만자에 머문 지 한 달여 지난 1834년 11월 13일 왕 요셉이 북경에서 도착했다. 왕 요셉은 조선인 신자를 만나지 못한 대신 북경교구장 서리인 남경교구장 페레이라 주교의 편지를 들고 있었다. 편지에는 “서만자에서 얼어 죽을 수 있으니 조선행 여행을 단념하라”는 내용이 들어 있었다.

 

브뤼기에르 주교는 1835년 1월 9일 왕 요셉을 다시 북경으로 보냈다. 동지사를 따라 북경으로 올 조선인 신자들을 만나기 위해서였다. 그들은 음력 12월 중에 북경에 도착할 예정이었다. 왕 요셉은 조선인 신자들에게 쓴 브뤼기에르 주교의 편지를 갖고 갔다. 그 편지에는 “여러분이 여러분의 주교를 받아들이기를 원하는지 아닌지를 솔직히 밝히시오. 애매하거나 조건이 붙은 모든 대답이나 좀 더 숙고할 시간을 달라는 청은 모두 회피하고 부정적인 대답으로 간주할 것이오. 그럴 경우 당장 교황께 편지를 써서 교황께서 여러분에게 보냈으며 또한 여러분이 직접 청하기도 한 주교를 여러분이 받아들이려 하지 않는다고 보고하겠소. … 에두르는 말과 찬사를 곁들이지 말고 명료하고 간단한 회답을 곧 보내주시오”라는 내용이 적혀 있었다. 

 

왕 요셉은 1월 19일 북경에서 조선인 신자들을 만났다. 그들은 유진길(아우구스티노), 남이관(세바스티아노), 조신철(가롤로), 김프란치스코 등이었다. 왕 요셉은 1월 26일 서만자로 돌아와 남이관이 쓴 편지와 함께 “조선인 신자 대표들이 브뤼기에르 주교의 존재를 알고 있고, 서양인 주교를 받아들일 경우 박해가 닥칠 것이라 두려워하고 있다”고 브뤼기에르 주교에게 보고했다.

 

 

토굴 앞에 일반 흙집 형태로 덧대어 지은 서만자 신자 가옥.

 

[가톨릭평화신문, 2017년 12월 10일, 리길재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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