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4월 20일 (토)
(백) 부활 제3주간 토요일(장애인의 날) 저희가 누구에게 가겠습니까? 주님께는 영원한 생명의 말씀이 있습니다.

성경자료

[성경] 로핑크 신부의 바이블 인사이트: 경배의 기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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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17-10-08 ㅣ No.3852

[로핑크 신부의 바이블 인사이트] 경배의 기적

 

 

동방에서 별을 따라온 박사들 이야기는 성경에서 가장 아름다운 이야기 가운데 하나이지요. 유럽에서 이 이야기는 사람들 마음에 늘 깊은 인상을 심어주었습니다. 일찍부터 사람들은 그들이 임금이었다고 생각했지요. 시편 72편 10-11절과 연결시킨 것입니다. 또한 그들이 “황금과 유향과 몰약을 예물로 드렸다.”(마태 2,11)는 구절을 토대로 그들을 세 명의 임금, 곧 ‘삼왕’이라 불렀습니다. 그러고는 이름까지 붙여주었습니다. 그럼으로써 그들의 모습을 머릿속에 쉽게 떠올릴 수 있었던 것이지요. 중세에는 신하들까지 거느린 모습의 이 삼왕이 엄청난 인기를 누렸습니다.

 

오늘날에도 독일에서는 여전히 수많은 여관과 호텔명에 이 삼왕의 이름이 남아 있습니다. 갓 태어난 이스라엘의 임금을 찾아서 기꺼이 그 먼 길을 왔던 이 유명한 인물들을 기억하는 것이지요. 곧 여행객이 묵어가는 오래된 옛 집들이 ‘삼왕의 여관’ ‘별의 여관’ ‘동방박사들의 여관’ 또는 그와 비슷한 이름을 갖고 있습니다. 또한 ‘주님 공현 대축일’을 앞두고는 해마다, 어린이들이 삼왕과 그 신하들의 복장을 하고 거리를 돌며 집집마다 노래를 부릅니다. 그러면서 고통 속에 있는 가난한 어린이들을 위한 모금 활동을 벌입니다. 유럽에서는 수백 년에 걸쳐 동방박사와 관련된 민속 문화가 매우 다양하고 풍요롭게 발전했습니다. 박물관에 가면 ‘삼왕’의 이야기를 그린 수많은 그림들이 있지요. 그 가운데는 아주 유명한 그림도 많습니다.

 

 

우리 자신의 길

 

하지만 그리스도인들이 이 ‘동방박사’ 이야기와 ‘주님 공현’ 축제에 그토록 마음이 사로잡히는 것은, 그런 모든 민간 풍속을 넘어 더 깊은 데에 이유가 있다는 생각이 듭니다. 이 이야기는 우리 마음속을 파고들지요. 동방박사들이 걸었던 그 길이 바로 우리 자신의 삶을 반영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별을 따라 나섰던 그들은 먼 길을 가야 했습니다. 그 길은 극도로 위험한 길이었지요. 그들은 길을 잘못 들어 예루살렘에 당도합니다. 그곳에는 추종자들을 거느린 교활한 정치권력이 다스리고 있습니다. 헤로데는 아기를 죽이려는 자신의 계획에 동방박사들을 끌어들이려 합니다. 메시아로 태어난 아기를 찾거든 자신에게도 알려주라고 말하지요. 그런데 이 모든 것이 우리 자신의 삶과 비슷하지 않나요? 우리 삶의 여정에서도 우리를 혼란에 빠뜨리는 악이 존재합니다. 그리스도께 나아가는 길에는 우리를 속이고 헤매게 하는 악이 도사리고 있습니다.

 

동방박사들의 길이 우리 삶의 모습이기도 합니다. 이 점은 두 번째 사실에서도 잘 드러납니다. 곧 동방박사들은 이방인이었습니다. 그들은 동방에서, 아마도 메소포타미아 지역에서 온 이들이었지요. 그곳은 늘 여러 종교들이 마치 도가니처럼 한데 모여 들끓는 곳이었습니다. 거기에서 동방의 종교적 열정들이 모여 서쪽으로 흘러들었습니다. 바로 그런 나라에서  그들이 온 것입니다.

 

우리 역시 이방인 출신입니다. 우리는 이 점을 결코 잊어서는 안 됩니다. 예전에는 우리 조상들도 혼령에 대한 두려움, 귀신 숭배, 주술이나 부적 등에 사로잡혀 있었습니다. 우리의 이성적인 신앙은 유다인들, 특히 유다인이신 예수님과 그분의 유다인 어머니 마리아 덕분입니다.

 

동방박사들의 길이 우리 삶의 모습이기도 하다는 점은 세 번째 사실에서도 드러납니다. 곧 동방에서 별을 쫓아온 박사들은 길을 나섰던 이들입니다. 새로 태어난 유다인들의 임금에게 경배하기 위해 먼 길을 걸었지요. 후에 당신 자신을 “길이요 진리요 생명”(요한 14,6)이라고 하신 바로 그분을 찾아 나섰던 것입니다.

 

우리 역시 그리스도께 이르는 길 위에 있습니다. 물론 우리는 이미 그분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았고, 그분의 영에 동참하는 이들입니다. 그럼에도 우리는 여전히 그분을 향해 가는 길 위에 있습니다. 그러면서도 우리는 많은 부분에서 여전히 이방인인 듯 살아갑니다. 우리는 정말로 이렇게 말할 수 있을까요? 나는 그분을 온전히 찾아냈다고! 그분 앞에 무릎을 꿇고 나의 삶과 나의 계획을 남김없이 그분 손에 맡겨드렸다고!

 

 

탄원과 청원과 감사의 기도

 

별이 멈추는 곳에 이른 박사들은 마침내 아기를 보고 땅에 엎드려 경배합니다(마태 2,11 참조). 그런데 여기서 ‘경배한다’는 말은 그 자체로는 아직 모호한 말입니다. 경배하기 위해서는 자신을 굽히고 땅이나 아니면 영예를 받는 이의 신발에 입을 맞추는 게 보통입니다. 경배는 신분이 높은 이에게 합니다. 임금에게 하거나, 고대 근동에서는 높은 자리에 있는 인물에게나 할 수 있는 일이었지요.

 

하지만 마태오 복음서에서는 ‘경배한다’라는 이 그리스 말이 더욱더 깊은 의미를 지닙니다. 곧 마태오 복음서에서는 이 말을 그리스도에게만 사용합니다. 그러니까 여기서는 ‘경배한다’라는 이 말에 ‘흠숭’의 의미가 담겨 있는 것이지요. 동방 박사들은 ‘하느님의 아드님’께 경배합니다.

 

‘경배와 흠숭’이라는 말이 정말로 무슨 의미인지 한 번이라도 깊이 생각해보신 적인 있나요? 물론 경배와 흠숭만이 하느님께 기도하는 유일한 방법은 아닙니다. 경배와 흠숭 외에도 기도의 여러 방법들이 있습니다. 탄원, 청원, 감사 등이 그것이지요.

 

하느님 앞에서의 탄원은 참으로 진정한 기도입니다. 우리는 하느님께 나의 고통을 하소연해도 되고, 그분께 나의 어려움과 비참함을 큰 소리로 부르짖어도 됩니다. 또한 하느님께 온갖 청을 드려도 됩니다. 인간으로서 필요한 일이라면 무엇이나 그분께 청해도 됩니다. 물론 여기에 언제나 덧붙일 말이 있지요. “그러나 제 뜻대로 마시고 아버지의 뜻대로 하소서.”(마르 14,36 - 공동 번역) 또 날마다 만나는 좋고 아름다운 일에 대해, 그것이 지극히 작은 일일지라도, 하느님께 감사를 드릴 수 있습니다. 날마다 청원과 감사를 위해 하느님께 나의 얼굴을 들어 올릴 수천 가지 이유가 있습니다.

 

탄원과 청원과 감사는 기도의 기본적인 형태입니다. 하지만 우리는 그리스도를 찾아 먼 길을 온 동방박사들이 어떻게 했는지 압니다. 그들은 기쁨에 가득 차서 아기 앞에 무릎을 꿇고 아기에게 경배합니다. 그들이 한 행동은, 인간이 할 수 있는 가장 기본적인 행동입니다. 곧 거룩하시고 엄위하시고 헤아릴 수 없는 하느님께 경배하는 행동이지요.

 

하느님께 경배와 흠숭을 드리는 일이 왜 그처럼 기본적이고 아름다우며, 결국 그것이 인간에게 정말로 좋은 일인지 생각해 보셨나요? 흠숭의 기도에서는 내가 하느님께 원하는 것이 더 이상 아무것도 없습니다. 하느님께 탄원할 때, 우리가 바라보는 것은 다만 자기 자신입니다. 나의 비참함이 기도의 출발점이니까요. 하느님께 무엇인가를 청할 때도, 나 자신의 고통과 위기가 기도의 출발점입니다. 나는 하느님께 무엇인가를 얻으려 합니다.

 

하느님께 감사를 드릴 때조차도, 나 자신이 출발점입니다. ‘내가’ 무엇인가 좋은 것을 체험했고, ‘내가’ 그 어떤 행운을 겪었기 때문에 감사를 드리지요. 눈부신 꽃 한 송이가, 또는 귀여운 아기의 웃음이 내 마음을 환하게 해주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경배와 흠숭의 기도에서는 나 자신을 내려놓고 그저 하느님만을 바라봅니다.

 

물론 이런 말들이 다음과 같은 사실을 부정하는 것은 아닙니다. 곧 나의 고통 때문에 하느님께 탄원할 때도, 우리는 하느님을 바라보며 이렇게 말합니다. “하느님, 당신께서 저에게 이러시다니요! 어찌하여 당신은 저에게 이런 고통을 안겨주십니까? 당신은 언제나 저희를 도우시고 저희 기도를 들어주시는 분! 그런데 저를 이런 비참 속에 빠뜨리시다니요!”

 

또는 이렇게 부르짖을 수도 있습니다. “하느님, 어찌하여 당신은 세상에서 그처럼 수많은 그리스도인들이 박해와 모욕을 받고 짓밟히며 살해당하는데도 가만히 계십니까? 돌보지 않으시고 그냥 내버려두십니까?” 북받치는 이러한 탄원도 결국은 나 자신을 바라보는 데서 벗어나 애절한 마음으로 하느님의 얼굴을 찾습니다.

 

청원과 감사의 기도도 마찬가지입니다. 마음속 깊이 하느님께 청을 드릴 때, 나는 이렇게 말한다고 할 수 있습니다. “저는 당신이 필요합니다. 저 혼자서는 할 수 없습니다. 당신만이 도우실 수 있습니다.”

 

이런 기도 뒤에는 하느님이 어떤 분이신지에 대한 인식이 전제되어 있습니다. 그분만이 전능하시고, 그분만이 자비하시며, 그분만이 구원하실 수 있다는 인식이지요.

 

감사기도에서도 우리는 먼저, 받은 선물에 대해 생각합니다. 그런 다음 곧바로, 선물을 주시는 분께로 눈을 돌립니다. 교회의 공식적인 기도이며 가장 중요한 기도인 성찬례의 감사기도에서는 또 어떤가요? 이 기도에서 사제는 함께 모인 공동체와 온 교회의 이름으로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가장 귀한 선물에 대해 감사를 드립니다. 이 선물을 통해 우리는 구원을 받았지요. 바로 예수 그리스도가 그 선물이십니다.

 

 

가장 아름다운 기도

 

모두 맞는 말입니다. 하지만 경배와 흠숭의 기도는 한층 더 깊은 데까지 이릅니다. 이 기도에서는 모든 것을 온전히 내려놓는 가운데 자기 자신과 자신의 고통과 기쁨마저도 잊고 오롯이 경배와 흠숭만을 드릴 뿐이기 때문입니다. 이 때 우리는 그저 온전히 하느님만을 바라볼 뿐입니다. 다른 모든 것은 다 물리치고 하느님만을 찬미합니다. 그분 홀로 거룩하시고, 그분 홀로 전능하시며, 그분 홀로 찬란히 빛나시는 것에 그저 경탄하며 그분을 찬미합니다. 모든 것은 사라지고, 그분의 영광만이 빛납니다.

 

우리가 자기 자신과 ‘아주 중요한 일들’을 마냥 잊고 그렇게 할 수 있다는 사실은 기적입니다. 물론 이러한 기적이 가능한 이유는, 하느님께서 당신의 영을 우리 마음속에 부어주시어 우리가 그분을 찬미하도록 우리를 매혹하시기 때문입니다.

 

성찬례를 거행할 때도 마찬가지로 거기에 오롯한 경배와 흠숭이 없다면, 성찬례는 그리스도인들의 가장 큰 축제이자 최고의 예배가 되지 못할 것입니다. 물론 거룩한 미사에서도 탄원과 청원이 이루어지고, 미사의 중심은 감사입니다. 하지만 미사를 거행할 때 당연히 경배와 흠숭도 따라옵니다. 바로 감사기도가 한창일 때, 곧 “거룩하시도다!”를 세 번 외칠 때 그러하지요. 함께 모인 공동체가 이 “거룩하시도다!”를 노래하거나 외칠 때, 이는 이미 세상을 떠나 하느님 곁에 있는 이들의 영원한 경배와 흠숭, 나아가 모든 천사들의 경배와 흠숭에 하나로 결합됩니다. 그럴 때 우리는 이미 하늘에 있는 것이지요. 그럴 때 우리에게는 결코 끝나지 않으며 이루 다 표현할 수 없는 행복이 앞당겨 선취됩니다. 바로 하느님을 영원히 경배하며 흠숭하는 행복이!

 

하느님을 경배하며 흠숭하는 것이 영원한 행복임을 우리는 여전히 아직은 다 이해할 수 없습니다. 우리는 계속 무엇인가를 이루기를 원하고 행하기를 원합니다. 무엇인가를 더 이해하고 꾸미고 기획하고 성취하고자 합니다. 당연한 일이지요. 그 모든 것은 우리의 과제이기도 하니까요.

 

하지만 우리가 죽어서 하느님께 이르면 그 모든 것은 중지됩니다. 그리고 남는 것은 순전히 경탄과 놀라움과 찬미뿐일 것입니다. 하느님을 오롯이 경배하고 흠숭하는 일만 남을 것입니다. 이것이 우리의 모든 생각과 상상을 뛰어넘는 행복이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따라서 지금 여기서 우리가 하느님을 찬미하고 그분께 흠숭을 드릴 때마다 우리는 그 영원한 행복을 이미 앞당겨 누리는 것입니다.

 

그러니 더 이상 많은 말이 필요 없는 경배와 흠숭의 기도가 꼭 있어야 하겠지요. 탄원과 청원과 감사, 그리고 우렁차게 울리는 삼중의 “거룩하시도다!”가 끝난 다음, 모두가 고요하게 경배를 드릴 순간이 있어야 합니다. 침묵하는 가운데 하느님께 자신의 삶을 맡겨 드리며, 그분이 우리의 창조주이심을, 우리의 주님이시고 모든 영광과 찬미를 받으실 유일한 분이심을 인정하는 순간 말입니다.

 

경배와 흠숭은 자신의 삶을 하느님께 맡겨드리는 일입니다. 그것은 봉헌과 헌신을 의미합니다. 자신을 온전히 하느님 손에 내어드리는 것을 의미합니다. 경배와 흠숭이 깊어 갈수록 더 이상 말이 필요 없습니다. 그저 하느님에게서 오는 빛이 자신의 마음을 비추도록 그대로 머무를 따름입니다.

 

 

별을 따라온 박사들

 

지금까지 언급한 말들은, 제가 ‘주님 공현 대축일’의 복음을 읽을 때마다, 또 동방박사들이 “아기를 보고 땅에 엎드려 경배하였다.”라는 구절에 이르게 될 때마다 늘 떠오르는 생각들입니다. 더불어 속으로 이런 생각도 하게 되지요. 동방박사들은 그저 보통 사람들이 아니었구나! 오늘날 용어로 말하면 분명 그들은 학자들이었다고 해야 할 것입니다. 그들은 천체를 관측하고 탐구하던 이들이었기 때문입니다. 나아가 그들은 신학자들이었다고도 해야 할 것입니다. 그들은 하느님의 뜻을 찾던 이들이었기 때문이지요. 그밖에도 그들은 가난한 사람들이 아니었습니다. 그처럼 먼 여행을 하기 위해서는 당시에도 재정적으로 큰돈이 들었기 때문이지요.

 

그런데 그런 이들이 작은 아기에게 무릎을 꿇습니다. 머리를 땅바닥에 대고 엎드립니다. 이 점이 저를 얼마나 감동시키는지 모릅니다. 살면서 저도 그렇게 하려고, 그렇게 머리를 숙이고 무릎을 꿇으려고 노력합니다.

 

한국의 모든 형제자매들에게 ‘주님 공현 대축일’이 복된 축일이 되기를 기원합니다. 본래 이 대축일이야말로 그리스도교의 가장 오래된 성탄 축일이었습니다.

 

* 게르하르트 로핑크(Gerhard Lohfink) - 세계적인 성서학자이자 사제로, 독일 튀빙엔 대학교에서 신약성서 주석학 교수로 재직하였고 현재 가톨릭통합공동체(katholische Intergrierte)에서 복음 정신에 따라 살며 연구와 집필에 몰두하고 있다. 국내 출간된 저서로는 『예수는 어떤 공동체를 원했나?』 『예수마음코칭』 외 다수가 있다.

 

* 번역 : 김혁태 - 전주교구 소속 사제로 독일 프라이부르크 대학교에서 신학박사 학위를 받았으며 광주가톨릭대학교에서 그리스도론을 가르치고 있다.

 

* 로핑크 신부의 바이블 인사이트(Bible Insight) : 저명한 성서학자인 게르하르트 로핑크 신부가 매월 『생활성서』 독자들을 위해 나아가 한국의 신앙인들에게 보내는 연재 글로, 성경 안에서 길어낸 신앙과 삶에 대한 아름다운 통찰을 만나실 수 있습니다. (편집자 주)

 

[생활성서, 2017년 1월호, 게르하르트 로핑크 신부, 김혁태 신부 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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