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4월 20일 (토)
(백) 부활 제3주간 토요일(장애인의 날) 저희가 누구에게 가겠습니까? 주님께는 영원한 생명의 말씀이 있습니다.

성경자료

[성경] 로핑크 신부의 바이블 인사이트: 믿음의 두 차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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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17-10-08 ㅣ No.3850

[로핑크 신부의 바이블 인사이트] 믿음의 두 차원

 

 

많은 종교가 ‘믿음’이라는 말을 전혀 알지 못합니다. 그들에게는 미지의 언어지요. 설령 안다 하더라도, 그 말은 부차적인 역할에 그칩니다. 아니면 유다 그리스도교 전통을 본뜬 것이지요. 반면 구약과 신약성경에서 믿음은 핵심적인 개념에 속합니다.

 

 

역사와 믿음

 

오늘날 ‘믿음’이라고 말할 때, 우리 그리스도인은 ‘믿어야 하는 내용’을 먼저 떠올립니다. 이를테면 신경에 나오는 고백들이지요. 또는 교회가 정식으로 가르치는 교리를 들며 이것이 우리의 믿음이라고 말합니다. 이처럼 믿음의 내용은 구체적입니다. 애매하지도 유동적이지도 어렴풋하지도 않습니다. 왜 그런 것일까요?

 

이는 우리가 ‘전달된’ 진리를 믿기 때문입니다. ‘전달된’ 진리를 믿는다는 것은 무엇보다 세상과 ‘역사’ 한가운데서 일어난 사건들을 믿는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우리는 믿습니다, 하느님께서 우리 신앙의 선조 아브라함을 부르셨음을! 하느님께서는 우리 조상들을 이집트에서 이끌어내시고, 이스라엘을 당신 백성으로 삼으셨으며, 예언자들을 통하여 말씀하셨음을 믿습니다. 우리는 하느님께서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온전히 그리고 최종적으로 모든 말씀을 하셨음을 믿습니다. 예수님은 하느님 나라를 선포하시고, 열두 사도와 함께 최후 만찬을 거행하셨으며, 우리를 위하여 십자가에서 돌아가셨음을 믿습니다. 예수님은 죽은 이들 가운데서 부활하시고, 당신 제자들에게 성령을 보내셨음을 믿습니다.

 

계속 이어질 수 있는 이 모든 고백은 역사적 사실에 근거를 두고 있습니다. 물론 역사적 사실을 믿는다는 것은 그리 단순하지 않습니다. 사실은 해석을 필요로 하기 때문이지요.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처형되었다.”라고만 하면, 이는 아직 신앙의 내용은 아닐 것입니다. 여기에 덧붙여 말해야 합니다.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처형되었다. 그분이 진리를 증언했기 때문이다. 그 적대자들은 진리를 들으려 하지 않았다. 그리하여 그분은 이스라엘을 위하여 그리고 이로써 세상을 위하여 자기 목숨을 바쳤다. 우리의 죄 때문에 죽은 것이다. 그분이 죽은 것은, 우리 모두가 진리를 외면하며 살기 때문이다.”

 

이는 그저 한 가지 예를 들었을 뿐입니다. 다른 많은 신앙의 내용도 똑같이 그렇게 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단순히 사실을 믿는 게 아니지요. 신앙으로 해석되고 그래서 그 의미가 밝히 드러나게 된 사실들을 믿습니다.

 

그래도 어쨌든 우리 신앙의 핵심에는 사실이, 곧 일어난 사건이 들어 있습니다. 우리는 인간이 고안해낸 그 어떤 이념을 믿는 게 아니지요. 결국 우리가 믿는 것은, 하느님께서 세상 한가운데서 행동하셨으며 오늘도 여전히 우리 가운데 행동하고 계시다는 사실입니다. “나는 성령을 믿나이다.”라는 고백조차도 그러한 사실과 관련이 있습니다. 이 고백은, 하느님께서 오늘도 여전히 당신 성령을 통하여 우리 가운데 행동하고 계시며 우리를 향한 하느님의 이 행동을 우리가 이미 경험하고 있다는 의미이기 때문입니다.

 

 

믿음과 성실

 

그리스도교 믿음에는 또 다른 차원이 있습니다. 믿음은 정해진 내용을 ‘굳게 지키는 것’ 또는 ‘해석된’ 사실이긴 하지만 아무튼 사실을 믿고 ‘지키는 것’만이 전부가 아닙니다. 올바른 믿음에는 반드시 또 하나의 차원이 있어야 합니다. 이 점을 저는 하바쿡 예언자의 말을 통해 살펴보고 싶습니다. 곧 “의인은 성실함으로 산다.”(하바 2,4)라는 말씀입니다.

 

성서학자들은 이 말씀을 어떻게 번역해야 할지 곤란을 겪습니다. 어떤 성서학자들은 “의인은 믿음으로 산다.”고 옮깁니다. 바오로 사도는 이 말씀을 아주 중요하게 여겼는데, 그 역시 ‘믿음’이라는 말로 옮깁니다(로마 1,17; 갈라 3,11 참조).

 

하지만 또 다른 성서학자들은 “의인은 성실함으로 산다.”고 옮깁니다. 어느 쪽이 옳은 것일까요? 기본적으로는 두 가지 번역이 다 틀리지 않습니다. 믿음이나 성실함이나 모두 같은 히브리어 ‘애무나(aemunah)’를 쓸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이 말은 ‘하느님께 자신을 고정하다’ ‘하느님을 붙들고 놓지 않다’라는 의미로서, 곧 하느님께 성실함을 뜻합니다. 믿음이 바로 그런 의미임을 우리는 거의 잊고 살지요. 하지만 믿음은 정해진 내용을 믿는 것에서 끝나지 않습니다, 하느님께 성실함, 붙들고 놓지 않음, 항구함, 작은 일에서 날마다 충실함, 바로 이런 것들을 의미하기도 합니다.

 

하지만 신경의 내용이나 교리 말고 우리가 굳게 붙들고 있어야 하는 것은 구체적으로 무엇일까요? 무엇에 날마다 성실하고 항구해야 하는 것일까요?

 

유다인이라면 아주 분명합니다. 하느님께 성실하기 위해서는 토라(Torah)를 지켜야 합니다. 이는 특히 무엇보다 십계명을 지키는 일이지요. 하느님의 가르침을 지키는 것이 믿음을 구체화하는 길입니다. 하느님의 계명을 따르는 것이 하느님께 성실한 삶입니다. 날마다 아주 작은 부분까지 하느님의 계명을 충실하게 실행하는 것이 하느님께 자신을 고정하는 일입니다.

 

이 모든 것이 가능한 이유는, 하느님 당신 자신이 성실하시기 때문입니다. 그분도 우리에게 당신을 고정하시기 때문에, 날마다 우리에게 당신의 성실함을 보여주시기 때문에 그것이 가능합니다. 계명을 성실하게 지키는 일은 당연히 유다인들의 믿음의 특성이기만 하지 않습니다. 우리 그리스도인에게도 똑같이 해당됩니다.

 

믿음은 하느님께 성실함으로써 하느님의 성실함에 자신을 고정하는 일입니다. 제 생각에, 이 차원이야말로 유다 그리스도교적 믿음의 가장 아름다운 모습입니다. 믿음은 신경의 내용을 믿는 데서만 끝나지 않습니다. 아니 믿음은 바로, 작은 일에서 날마다 성실함으로써 하느님의 성실함에 나를 굳게 고정하는 일입니다.

 

예수님도 믿음을 그렇게 이해하셨습니다. 그리고 이 사실이 저에게는 지극히 아름답게 다가오고 커다란 감동을 줍니다. 예수님도 믿음을 작은 일에서 성실함으로, 우리에게 주어진 임무에 날마다 항구하고 충실함으로, 우리에게 선물로 주어진 것을 굳게 지키는 것으로 이해하십니다.

 

물론 예수님에게서도 믿음은 먼저, 역사에서 이루신 하느님의 위대한 행동들과 관련이 있습니다. 예수님에게 역사에서 이루시는 하느님의 가장 위대한 행동은, 지금 하느님 나라가, 정의와 비폭력과 평화의 그 나라가 오고 있다는 데 있었습니다. 따라서 예수님에게 ‘믿음’이란 먼저 하느님 나라가 오고 있음을 믿는 것이었지요. 그 나라가 지금 이 시각 바로 이 순간에 오고 있음을 믿는 것이었습니다.

 

하느님 나라를 믿는다는 것은 나아가 예수님을 믿는다는 의미였습니다. 하느님께서 지금 예수님을 통해 몸소 행동하시고 말씀하신다는 사실을 믿는 것이었습니다. 이것이 예수님에게는 믿음의 핵심이었고 ‘믿는다는 것’의 본질적 의미였습니다. 그렇다고 예수님에게서 믿음의 또 다른 차원을 찾아볼 수 없는 것은 아닙니다. 하바쿡 예언서의 말씀처럼, 작은 일에서 성실하고 충실함으로써 하느님께 날마다 자신을 고정하는 믿음의 이 두 번째 차원을 말해주는 예수님의 비유가 있습니다. 바로 루카 복음서 17장 7-10절의 비유지요.

 

 

믿음의 성실함에 대한 비유

 

이 비유에서 주인은 비교적 적은 농토를 가진 사람입니다. 겨우 종 하나만을 둘 수 있는 살림이지요. 종은 주인의 집에서 기거하며 이른 아침부터 늦은 밤까지 일을 합니다. 종이라곤 자신 하나뿐이기에, 그는 모든 일을 혼자서 도맡아 해야 합니다. 밭을 갈고, 양을 치고, 저녁마다 녹초가 되어 돌아와서도 집안일을 해야 합니다. 밥상에 앉을 겨를도 없지요. 직접 음식을 마련하고, 그런 다음 주인이 음식을 먹는 동안 허리에 띠를 매고 시중을 들어야 합니다. 주인이 먹고 마신 다음, 그리고 식탁을 치우고 식기들을 다 닦은 다음에야 종은 비로소 자신을 위한 시간을 가질 수 있습니다.

 

주인은 고맙다는 말 한마디 하지 않습니다. 주인은 종이 날마다 하는 일을 지극히 일반적인 세상사라고 여기지요. 종도 그렇게 생각합니다. 말할 필요조차도 없는 당연지사라고 여깁니다. 이 비유에서 주인은 결코 종을 무자비하게 다루는 파렴치한이 아닙니다. 종도 자유를 부르짖는 피압박 계급이 아닙니다. 비유는 별 감정 없이 고대 세계의 가혹한 실상을 있는 그대로 펼쳐보입니다. 그러면서 이를 믿음에 대한 비유로 삼지요.

 

따라서 이 비유에 등장하는 주인을 하느님이나 그리스도로 해석할 수는 없습니다. 이 비유는 하느님이 그런 분이라고 이야기하려는 데 주안점이 있지 않습니다. 인간이 하느님을 위해 쉬지도 않고 녹초가 되다시피 일을 해야 하는 종이거나 아무 말도 못하고 착취당하는 가련한 일벌레는 아니니까요.

 

이 이야기는 오히려 종교들에 대한 비유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많은 종교에서 인간은 권리를 박탈당한 종과 비슷합니다. 인간의 봉사를 받는 신들은 황금 식탁에 앉아 흥청망청 축제를 벌이지요.

 

예를 들면 고대 바빌로니아 서사시에 등장하는 신들의 모습이 그러합니다. 하지만 예수님이 보여주신 하느님은 단연코 그런 분이 아니시지요. 인간 역시 신들이 기피하는 궂은일은 도맡아 하도록 창조된 종이 아닙니다. 아니 오히려, 하느님의 아드님이 인간의 종이 되십니다. 그분은 “나는 섬기는 사람으로 너희 가운데에 있다.”(루카 22,27)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러니 비유에서 녹초가 된 종을 밤늦도록 부려먹는 주인을 하느님이나 예수님으로 해석할 여지는 전혀 없습니다.

 

이 비유가 말하려는 바는 무엇보다 ‘믿음’에 관해서입니다. 루카 복음사가는 이 비유를 ‘믿음의 힘’에 관한 예수님의 말씀(루카 17,5-6) 바로 다음에 배치함으로써 믿음의 구체적인 의미가 무엇인지 알려줍니다. 믿음은 바로 순전한 헌신입니다. 무엇을 요구하거나 자기주장을 고집하거나 인정받기를 욕심내거나 자기 권리를 내세우거나 하지 않고, 자신에 대한 권리를 다른 이에게 모두 내어주는 것입니다.

 

믿음은 자기 자신에게서 하느님의 것으로 온전히 돌아서는 방향 전환입니다. 이 전환이 깊을수록, 믿는 이는 스스로에 대한 자신의 욕구를 벗어나 다른 이가 자신을 규정하도록 모든 것을 내려놓습니다. 마치 종처럼 다른 이의 뜻에 자신을 내맡깁니다. 자립성과 자기실현을 목표로 하는 우리 시대의 인본주의와는 정반대로 가는 것이지요.

 

그러한 믿음이 얼마나 위험하고 도전적인지는 분명합니다. 무자비하게 남용될 소지가 많으니까요. 다른 이들에게 철저하게 이용당하지 않을까? 나의 자유가 없어지는 것은 아닐까? 그 자유와 함께 나 자신도 사라지는 게 아닐까? 이것이 우리 내면의 깊은 두려움입니다. 그런 점에서, 예수님이 요구하시는 철저한 믿음에 따라 살기란 불가능해 보입니다. 누구나 자신의 권리를 위해 투쟁하는 사회 한가운데서 그렇게 사는 사람은 여지없이 잔인하게 이용당하고 말 것입니다.

 

때문에 복음이 말하는 이 헌신의 믿음을 위해서는 토대가 있어야 합니다. 함께하는 믿음의 공간, 자기 뜻이 아니라 하느님의 것을 찾는 이들이 있는 곳이 바로 그 토대지요. 성실한 믿음에는 서로를 하느님께 부름 받은 이들로 존중하는 격려의 손길이 있어야 합니다. 달리 말해, 복음이 말하는 믿음은 공동체를 필요로 합니다. 사랑으로 서로를 존중하고 종처럼 서로 공통의 소명, 곧 하느님의 계획에 헌신하는 공동체를 필요로 합니다.

 

한마음으로 서로를 격려하는 그러한 손길이 없는 곳에서는 믿음의 향기가 퍼질 수 없습니다. 하지만 그런 믿음이 있는 곳에서는 세상이 바뀝니다. 산을 옮기고, 물 위를 걸을 수 있습니다. 나무더러 바다에 심겨지라고 해도 그대로 복종합니다. 그런 곳에서는 진정한 자유가 이루어지고, 그리하여 누구나 자신을 찾고 자신을 실현합니다. 모두가 자신에게만 집중된 감옥이 아니라, 하느님의 새 세상에서 이루어지는 드넓은 잔치의 공간이 펼쳐집니다.

 

거기서는 비유에 나오는 ‘쓸모없는 종’도 처지가 바뀝니다. 예수님의 것을 자기 것으로 삼는 사람은 결국 종이 아니라 친구가 되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나는 너희를 더 이상 종이라고 부르지 않는다. 종은 주인이 하는 일을 모르기 때문이다. 나는 너희를 친구라고 불렀다.”(요한 15,15)

 

* 게르하르트 로핑크(Gerhard Lohfink) - 세계적인 성서학자이자 사제로, 독일 튀빙엔 대학교에서 신약성서 주석학 교수로 재직하였고 현재 가톨릭통합공동체(katholische Intergrierte)에서 복음 정신에 따라 살며 연구와 집필에 몰두하고 있다. 국내 출간된 저서로는 『예수는 어떤 공동체를 원했나?』 『예수마음코칭』 외 다수가 있다.

 

* 번역 : 김혁태 - 전주교구 소속 사제로 독일 프라이부르크 대학교에서 신학박사 학위를 받았으며 광주가톨릭대학교에서 그리스도론을 가르치고 있다.

 

* 로핑크 신부의 바이블 인사이트(Bible Insight) : 저명한 성서학자인 게르하르트 로핑크 신부가 매월 『생활성서』 독자들을 위해 나아가 한국의 신앙인들에게 보내는 연재 글로, 성경 안에서 길어낸 신앙과 삶에 대한 아름다운 통찰을 만나실 수 있습니다. (편집자 주)

 

[생활성서, 2016년 11월호, 게르하르트 로핑크 신부, 김혁태 신부 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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