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4월 20일 (토)
(백) 부활 제3주간 토요일(장애인의 날) 저희가 누구에게 가겠습니까? 주님께는 영원한 생명의 말씀이 있습니다.

성경자료

[성경] 로핑크 신부의 바이블 인사이트: 참목자의 목소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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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17-10-08 ㅣ No.3844

[로핑크 신부의 바이블 인사이트] 참목자의 목소리

 

 

부활절과 성령 강림 대축일 사이의 주일들은 예수님 부활의 열매를 보여 줍니다. 곧 제자들도 부활합니다. 이 시기에 봉독하는 사도행전 독서들을 보면, 제자들은 두려움에서 열린 마음으로, 혼란에서 단결로, 내적인 분열에서 자신들 앞에 놓인 과제에 대한 전적인 투신으로 나아갑니다.

 

예수님께서 죽임을 당하신 도시에서 그들은 백성 앞에 나섭니다. 그리고 공공연히 예수님을 선포하고 그분이 메시아라고 증언합니다. 이는 그들이 목숨을 대가로 치러야 하는 일일 수도 있었습니다. 하지만 그들은 더 이상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예수님을 자기 생명의 주인으로 믿는 사람은 그 무엇에도 더 이상 두려움을 가질 필요가 없지요.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합니까?

 

예수님의 제자들은 예루살렘에서 자신들의 말이 마음속 깊은 곳까지 파고든 사람들을 얻습니다. 루카가 전하는 바에 따르면, 많은 수의 유다인들이 몹시 근심하며 사도들에게 묻습니다.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합니까?”(사도 2,37)

 

사도들의 말이 그들의 마음 깊은 곳을 강타했던 것입니다. 그렇다고 그들은 토론을 시작하지 않습니다. 다음과 같이 말하지도 않습니다. “당신들이 우리에게 말하는 것들은 정말로 아주 좋은 생각들이군요. 그에 대해 한번 곰곰이 심사숙고해보겠습니다.”

 

바로 그렇게 말하는 이는 아무도 없었습니다. 사도들이 들려준 것도 생각이나 관념이 결코 아니었고요. 그들은 일어난 일에 대해 이야기합니다. 사실에 대해, 새로운 현실에 대해 이야기합니다. 하느님께서 당신의 메시아를 통해 몸소 행동하셨다는 것, 그 행동은 죽음보다 더 강할 만큼 힘이 셌다는 것, 바로 그것이었습니다. 예루살렘 시민들은 실제로 일어난 사실에 대해 들었기 때문에, 이제 그들 자신도 사실에 토대를 두고자 합니다. 그래서 이렇게 말하는 것이지요.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합니까?”

 

그러면서 그들은 이제, 새것을 이미 경험한 이들에게 다가갑니다. 그리고 그들에게 자신들이 해야 할 다음 발걸음에 대해 알려 주기를 청합니다. 믿음이란 그저 생각들을 쌓아올린 멋진 건축물이 아닙니다. 단지 새로운 의식에서 그치고 마는 것도 아니지요. 그것은 먼저 아주 단순하게, 한 걸음 한 걸음씩 행동으로 옮기는 것입니다.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합니까?”라는 구절에서 주목할 점은 또 있습니다. 여기서 “저는 어떻게 해야 합니까?”라고 하지 않고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합니까?”라고 말합니다. ‘우리’라는 말이 결정적으로 중요합니다. 믿음은 단순히 각 개인만의 문제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각자가 개별적으로 자신의 믿음을 관철시킬 수는 없습니다. 사회적 압력과 사회적 이상들이 각 개인보다 훨씬 더 강력합니다. 서로 함께 믿을 때만, 자신의 주위에 진을 친 불신앙의 유혹에 맞설 수 있습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함께 믿을 때만, 우리는 믿음의 온전한 기쁨을 경험합니다.

 

 

예수님의 목소리를 알아듣다

 

이런 모습은 양 떼의 표상을 통해서도 확인할 수 있습니다. 신앙인들은 부활 대축일과 성령 강림 대축일 사이의 시기에 교회가 거행하는 전례를 통해 그러한 표상을 접합니다. 물론 이 표상이 현대인에게는 당장 낯설게 다가온다는 점을 저는 잘 알고 있습니다. 매력적이기보다는 거부감을 일으키는 표상입니다. 인간을 가축 떼에 비유하다니요! 현대인은 다른 양들 사이에서 이리저리 붙어 다니며 울어대는 한 마리 양이 되기를 원하지 않습니다.

 

하지만 말하려는 바는 그런 게 결코 아니지요. 예수님을 믿는 이들은 서로 함께해야 한다는 것, 바로 이 점을 말하고자 한 것입니다. 예수님을 믿는 이들은 일치로의 부르심을 받았습니다.

 

나아가 여기에는 더 깊은 의미가 담겨 있습니다. 요한 복음서 10장에 나오는 착한 목자와 양 떼의 표상을 올바로 번역한다면, 바로 이런 이야기라고 할 수 있습니다. 곧 믿음에서 오는 함께함, 사회는 알지 못하는 그런 연대성이 있다는 것입니다. 

 

누구도 더 이상 혼자가 아닌 곳에서 이루어지는 연대성이 있습니다. 언제나 각자 자신의 고유한 이름으로 불리는 곳, 말하자면 각자의 소명과 길이 진지하게 받아들여지고, 그럼으로써 누구나 온전히 각자 자신으로 존재하는 곳, 그러면서도 더불어 구성원 모두가 공동의 과제와 하느님께서 당신 백성을 이끄시는 원대한 역사에 함께 동참하는 곳, 그런 곳에서 이루어지는 함께함이 있습니다.

 

이때 여기에, 참목자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당신을 믿는 이들을 앞장서 가십니다. 그리고 그들은 그분의 목소리를 압니다(요한 10,4 참조). 그들은 그분의 목소리를 알아듣습니다(요한 10,3 참조).

 

현대인은 끝없이 많은 목소리들에 둘러싸여 삽니다. 특히 무수한 대중매체들이 혼란스럽게 뒤죽박죽 쏟아내며 들으라고 강요하는 목소리들에 둘러싸여 지냅니다. 많은 목소리가 자신을 현명하고 중대하며, 도덕적이고 참신한 것으로 내세우지만, 대부분은 완전히 빈 깡통이자 자기 연출, 두려움과 공격적 충동의 목소리일 따름입니다.

 

하지만 그러한 목소리는 외부에서만 오는 게 아닙니다. 우리는 쉴 새 없이 텔레비전 리모컨을 누르거나 인터넷을 클릭하며 그런 목소리들을 찾습니다. 이처럼 외부적인 작용 외에도, 그런 목소리들은 우리 자신 안에서 나오기도 합니다. 지극히 다양한 목소리들이 자주 우리 안에 켜켜이 쌓입니다. 때때로 우리는 예수님의 목소리에 신뢰를 두고 싶어 합니다. 그 목소리를 믿고, 착한 목자를 따라가고 싶어 합니다. 하지만 그럴 때마다 우리 내면에서 다시 목소리가 들려옵니다. 불신과 두려움, 저항의 목소리가 솟아납니다. 세상 안에, 그리고 우리 안에 그처럼 수많은 목소리가 있습니다.

 

하지만 우리 모두는 이미 한 목소리를 들었습니다. 저마다 우리 각자의 이름을 부르는 목소리, 그 소리를 듣고 우리가 이렇게 말할 수 있는 목소리를 들었습니다. “그래, 바로 그분의 목소리야!”

 

이 목소리는 하늘에서 수직으로 낙하한 게 아닙니다. 그 자체로 주술적인 것도 전혀 아닙니다. 그 목소리는 아주 인간적입니다. 낮은 목소리이고, 그럼으로써 우리가 자유롭기를 바랍니다. 우리가 마침내 고요하게 될 때, 그런 다음 기도 안에서 우리 마음을 열 때, 우리는 그 목소리를 감지합니다. 복음 말씀을 들을 때, 우리는 그 목소리를 알아차립니다. 무엇보다 우리가 믿음 안에서 함께 모여 있을 때, 우리는 그 목소리를 듣습니다. 그것은 진리와 생명의 목소리입니다. 그리고 이 목소리는 세상의 다른 모든 목소리들과는 구별됩니다.

 

그것은 바로 이렇게 말씀하시는 분의 목소리입니다. “도둑은 다만 훔치고 죽이고 멸망시키려고 올 뿐이다. 그러나 나는 양들이 생명을 얻고 또 얻어 넘치게 하려고 왔다.”(요한 10,10)

 

* 게르하르트 로핑크(Gerhard Lohfink) - 세계적인 성서학자이자 사제로, 독일 튀빙엔 대학교에서 신약성서 주석학 교수로 재직하였고 현재 가톨릭통합공동체(katholische Intergrierte)에서 복음 정신에 따라 살며 연구와 집필에 몰두하고 있다. 국내 출간된 저서로는 『예수는 어떤 공동체를 원했나?』 『예수마음코칭』 외 다수가 있다.

 

* 번역 : 김혁태 - 전주교구 소속 사제로 독일 프라이부르크 대학교에서 신학박사 학위를 받았으며 광주가톨릭대학교에서 그리스도론을 가르치고 있다.

 

* 로핑크 신부의 바이블 인사이트(Bible Insight) : 저명한 성서학자인 게르하르트 로핑크 신부가 매월 『생활성서』 독자들을 위해 나아가 한국의 신앙인들에게 보내는 연재 글로, 성경 안에서 길어낸 신앙과 삶에 대한 아름다운 통찰을 만나실 수 있습니다. (편집자 주)

 

[생활성서, 2016년 4월호, 게르하르트 로핑크 신부, 김혁태 신부 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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