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4월 20일 (토)
(백) 부활 제3주간 토요일(장애인의 날) 저희가 누구에게 가겠습니까? 주님께는 영원한 생명의 말씀이 있습니다.

영성ㅣ기도ㅣ신앙

[영성] 가톨릭 영성을 찾아서34: 8세기 (3) 샤를마뉴 황제와 카롤링거 르네상스

스크랩 인쇄

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17-07-24 ㅣ No.980

[전영준 신부의 가톨릭 영성을 찾아서] (34) 8세기 ③ 샤를마뉴 황제와 카롤링거 르네상스


문맹자 황제, 문화 부흥과 영성 생활 발전을 견인하다

 

 

샤를마뉴는 하드리아누스 1세 교황에게 교황령 보호를 요청받자 전쟁을 시작해 랑고바르드 왕국의 나머지 영토를 회복했다. 샤를마뉴(왼쪽)를 맞이하는 하드리아누스 1세 교황.

 

 

동방 교회가 성화상 논쟁으로 홍역을 치르고 있을 때, 서방 교회는 새로운 정치 세력과의 연대를 도모했습니다. 카롤링거 왕조의 프랑크 왕국 출현은 유럽 사회에 전환점을 가져왔을 뿐만 아니라, 서방 교회에도 변곡점을 만드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교회의 수호자로서의 신성 로마 제국 황제 샤를마뉴

 

메로빙거 왕조 프랑크 왕국은 다고베르투스 1세(Dagobertus I, 608쯤~638/39) 국왕 사후에 북서부 지역의 네우스트리아(Neustria), 북동부 지역의 아우스트라시아(Austrasia), 남동부 지역의 부르고뉴(Bourgogne)로 나뉘었습니다. 679년 아우스트라시아의 궁재(宮宰)가 되었던 페피누스 2세(Pepinus II, 635~714)는 687년 프랑크 왕국 나머지 실권마저 장악했으나, 그의 사후에 적자 권력 승계에 반발한 서자 샤를 마르텔(Charles Martel, 686쯤~741)이 718년 다시 프랑크 왕국의 전권을 차지했습니다. 샤를 마르텔은 732년 유럽을 정복하고자 피레네산맥을 넘은 이슬람 세력을 물리치면서 서방 교회와 돈독한 관계를 형성했습니다.

 

741년 샤를 마르텔이 사망하자, 아들 페피누스 3세(Pepinus III, 714~768)는 먼저 네우스트리아의 궁재가 되었고, 748년 형 카를로만(Carloman, 707경~754) 궁재를 몰아내고 아우스트라시아의 궁재까지 됐습니다. 이어 751년 메로빙거 왕조 마지막 왕이었던 킬데리쿠스 3세(Childericus III, 717경~754)를 폐위시키고 카롤링거 왕조 프랑크 왕국의 첫 번째 국왕으로 즉위했습니다. 교황 자카리아스(Zacharias PP, 재위 741~752)는 페피누스 3세 즉위를 승인했고, 754년 교황 스테파누스 2세(Stephanus PP. II, 재임 752~757)도 서방 교회에 대한 군사적 보호를 요청하고자 랭스(Reims) 대성당에서 페피누스 3세에게 도유 예식을 거행하면서 그가 프랑크 왕국의 합법적인 국왕이라고 선언했습니다. 페피누스 3세는 그 보답으로 756년 랑고바르드 왕국의 일부 영토를 정복해 교황 스테파누스 2세에게 기증했습니다. 이로써 프랑크 왕국과 서방 교회는 더욱 긴밀한 관계를 형성했습니다.

 

768년 페피누스 3세가 사망하자, 아들 샤를마뉴(Charlemagne, 재위 768~814)와 카를로만 1세(Carloman I, 재위 768~771)에게 왕국과 왕위가 분할 상속되었습니다. 771년 동생 카를로만 1세가 갑자기 사망하자, 샤를마뉴는 프랑크 왕국의 유일한 왕으로 즉위했습니다. 샤를마뉴는 772년 교황 하드리아누스 1세(Hadrianus PP. I, 재임 772~795)에게 랑고바르드 왕국의 침공에 대한 교황령 보호를 요청받자 전쟁을 시작했습니다. 774년에는 랑고바르드 왕국의 나머지 영토를 정복하고 스스로 랑고바르드 왕국의 왕이라고 지칭했습니다. 다만 774년 샤를마뉴도 로마를 방문해 부왕 페피누스 3세를 이어 교황령을 보장해 주었지만, 많은 영토를 기증하지 않았습니다.

 

샤를마뉴는 교황 레오 3세(Leo PP. III, 재임 795~816)가 교황에 선출되자 우호적인 관계를 유지했고, 799년 교황의 반대자들이 교황을 공격하자 교황을 보호해 주었습니다. 결국 800년 교황 레오 3세는 샤를마뉴에게 신성 로마 제국 황제의 관을 씌어주고 서로마 제국 황제를 계승하게 함으로써 교회의 수호자로 임명했습니다.

 

 

서방 교회에 활기를 불어넣은 카롤링거 르네상스

 

문맹자로 알려졌던 샤를마뉴가 백성을 비롯해 교구 성직자들의 문맹률을 낮추기 위해 라틴어 교육을 권장하며 시작했던 운동은 ‘카롤링거 르네상스’(Carolingian Renaissance)로 발전하면서 서방 교회에 활력을 가져왔습니다. 뿐만 아니라 교구 성직자와 평신도의 영성 생활 발전에도 크게 기여했습니다. 샤를마뉴는 유럽 각지에서 활동하는 학자들을 궁정으로 불러들였습니다. 그리고 학자들이 인문학, 수사학, 예술, 건축뿐 아니라, 교회법, 전례 개혁, 성경 연구 등에 매진할 수 있도록 전폭적으로 지원했습니다.

 

샤를마뉴의 스승이었던 수도자 알쿠이누스(오른쪽).

 

 

샤를마뉴의 스승이었던 잉글랜드 출신 수도자 알쿠이누스(Alcuinus, 730쯤~804)는 782년 왕국의 수도 아헨(Aachen)에 샤를마뉴 궁정학교 교장이 되었습니다. 원래 이 학교는 귀족 자녀들을 교육하기 위해 선대에 설립되었던 학교였으나, 샤를마뉴는 인문학과 종교 연구를 교육과정에 포함시켰습니다. 알쿠이누스는 790년까지 샤를마뉴와 그의 아들들에게도 인문학 등을 가르쳤습니다. 잠시 잉글랜드로 돌아갔었던 알쿠이누스는 793년 샤를마뉴의 요청으로 그리스도 양자설(Adoptionism) 이단과 맞서기 위해 다시 궁정학교로 돌아왔습니다. 796년 알쿠이누스는 투르(Tours)에 ‘성 마르티누스 수도원’ 원장으로 부임해 말년을 보냈습니다.

 

카롤링거 르네상스 학자로서 문법 학자였던 피사의 페트루스(Petrus Pisanus, 744~799)는 776~790년 사이에 샤를마뉴에게 라틴어를 가르쳤습니다. 라틴어와 관련된 그의 작품들은 유럽 사회에서 라틴어가 교회 언어이자 공용어로 쓰이게 되는데 큰 기여를 했습니다. 특히 지역 언어로 잘못 번역된 성경을 읽던 교구 성직자들과 신자들이 라틴어 성경을 비롯해 라틴어 주석서와 교부들의 문헌들을 읽게 되면서 올바른 신앙으로 돌아올 수 있었습니다.

 

신학자였던 아퀼레이아의 파울리누스(Paulinus Aquiliensis, 750 이전~802)는 776~787년 샤를마뉴 궁정 학자로 참여했으며, 샤를마뉴는 787년 그를 아퀼레이아의 총대주교로 임명했습니다. 파울리누스 역시 그리스도 양자설 이단을 거슬러 여러 시노드에서 활약했습니다. 랑고바르드 귀족 가문 출신으로 역사학자이자 베네딕도회 수도자였던 부제 파울루스(Paulus Diaconus, 720/26경~800 이전)는 782~787년 사이에 카롤링거 르네상스에 큰 기여를 했으며, 787년 샤를마뉴는 그를 ‘몬테카시노 수도원’ 원장으로 임명했습니다.

 

히스페니아 서고트족 후손이며 시인이자 문필가였던 오를레앙의 테오둘푸스(Theodulfus Aurelianensis, 760쯤~821)는 782~797년 사이에 카롤링거 르네상스의 핵심 인물로서 궁정에서 봉사했으며, 797년 샤를마뉴는 그를 오를레앙의 주교로 임명했습니다. 특히 테오둘푸스는 샤를마뉴와 함께 교회 개혁을 위해 많은 역할을 담당했습니다. 또한 테오둘푸스는 교회 관련 지역 밖에서도 공공 학교가 설립될 수 있도록 많은 노력을 했습니다.

 

교황 그레고리우스 1세가 유럽 선교를 위해 각지로 파견했던 수도자들은 중세 초기에 그 지역의 중심 역할을 담당했습니다. 수도자들은 선교를 위해 성경과 신학을 열심히 공부했고, 열정적인 평신도들은 이런 그들의 모습을 본받으려 했습니다. 이런 와중에 카롤링거 르네상스는 교구 성직자와 평신도에게도 공교육을 통해 라틴어를 가르치면서 성경과 신학 공부를 할 수 있는 계기를 제공했습니다. 그로 인해 서유럽 전체 문맹률이 낮아지면서, 그리스도인들은 올바른 신앙과 성숙한 영성 생활로 한 걸음 다가가는 기회를 얻었습니다.

 

[가톨릭평화신문, 2017년 7월 23일, 전영준 신부(가톨릭대 신학대학 영성신학 교수)]



1,569 0

추천

 

페이스북 트위터 핀터레스트 구글플러스

Comments
Total0
※ 500자 이내로 작성 가능합니다. (0/500)

  • ※ 로그인 후 등록 가능합니다.

리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