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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기경 정진석 회고록58: 위대한 발자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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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17-07-24 ㅣ No.467

[추기경 정진석] (58) 위대한 발자취


요한 바오로 2세 교황, 선종 6년 만에 시복… 2014년 시성

 

 

- 2014년 바티칸 성 베드로 광장에서 거행된 요한 바오로 2세ㆍ요한 23세 교황의 시성식 장면. 두 교황이 동시에 시성되는 것은 가톨릭 교회 역사상 처음 있는 일이다. [CNS]

 

 

요한 바오로 2세 교황이 선종하기 전부터 수많은 인파가 바티칸 광장에 모여들었다. 밤이 되면 교황의 쾌유를 빌며 공동으로 묵주기도를 바치는 소리가 온 광장을 메아리쳤다. 안타깝게도 교황의 선종이 발표됐고, 이후 광장에는 더 많은 사람들이 모여 교황을 위해 기도했다. 

 

선종하기 전 유언처럼 “나는 행복합니다. 여러분도 행복하세요”라며 행복의 메시지를 전한 요한 바오로 2세 교황이었지만 정작 그의 어린 시절은 행복하지 못했다. 질병과 전쟁으로 전 가족의 죽음을 경험했기 때문이다. 

 

카롤 요제프 보이티야(요한 바오로 2세 교황의 이름)는 1920년 5월 18일 폴란드에서 양복사 아버지와 교사인 어머니 사이에서 차남으로 태어났다. 파도바체가 그의 고향이다. 소년티를 벗기 전인 9세 때 어머니를 잃고, 12세 때는 의사였던 형마저 떠나보냈다. 그는 자연히 인간의 삶에 대해 철학적 질문을 가졌다. ‘인간은 왜 고통을 겪어야 하는가?’ 그에게는 삶 전체를 관통하는 의문이었다.

 

그는 학창 시절 어학과 연극에 뛰어난 실력을 보여 학생 극단에서 활동하기도 했다. 축구, 스키, 산악 등반, 수영 등 스포츠도 즐겼다. 폴란드어와 문학을 공부하기 위해 야기엘론스키대학교에 입학했는데, 이때 그는 이미 아마추어 연출가로서도 재능을 발휘했고 시를 쓰면서 실력을 인정받았다. 

 

1939년 9월 독일이 폴란드를 점령하면서 대학을 강제로 폐쇄했다. 그래도 그는 친구들과 지하 연극 동아리를 조직해 어떻게 해서든 연극 활동을 이어가려 했다. 하지만 1940년 겨울 그는 결국 크라쿠프 외곽에 있는 석회암 채석장에서 일하게 됐다. 제2차 세계대전 중엔 아버지마저 목숨을 잃었다. 

 

전쟁으로 대학이 폐쇄되자 보이티야는 1942년 크라쿠프에 있는 지하 신학교에서 신학 공부를 시작했다. 낮에는 노동자로 일하고 밤에는 몰래 신학을 공부했다. 드디어 그는 1946년 26세 나이로 사제품을 받았다. 

 

이후 대학에서 강의하고, 윤리신학 논문도 발표했다. 그리고 1958년 주교로, 1964년 대주교로, 1967년 추기경으로 임명됐다. 제2차 바티칸 공의회에서 폴란드 교회를 대변했고, 세계 주교 대의원회의(시노드) 상임위원을 지내면서 교황청 여러 부처의 일에 관여했다. 특히 그는 1978년 10월 16일 제264대 교황으로 선출될 때까지 폴란드의 비진스키 추기경과 함께 노동자의 추기경으로 명성이 높았다.

 

취임 34일 만에 심장마비로 타계한 요한 바오로 1세 교황의 뒤를 이은 보이티야의 발탁은 당시 파격적이었다. 바티칸 내부에서 비교적 잘 알려지지 않은 인물이었던 데다, 비(非)이탈리아계 교황 선출은 사상 두 번째였기 때문이다. 게다가 그는 선출 당시 58세로 최근 123년 동안 추대된 교황 중 가장 젊은 나이였다. 455년 만에 비이탈리아 출신으로 교황직에 오른 그는 인종, 종교, 민족을 초월해 코소보나 동티모르, 중동과 같이 분열과 대립이 있는 지역을 사목 방문하면서 화해와 평화를 촉구했다.

 

당시 요한 바오로 2세 교황은 강론 때마다 당신이 ‘평화의 사도’로 사목 방문을 한다는 것을 강조했다. 말년에는 고령에다 지병으로 거동조차 불편한 몸을 이끌며 계속 강행군을 했다. 특히 선종하기 몇 년 전 교황이 중동 성지를 방문했을 때는 세월의 무게에 눌려 구부정해진 어깨와 보기에도 안쓰러운 걸음을 온 세상에 보여 주면서도 증오의 땅 곳곳을 찾아가 어루만졌다. 

 

- 요한 바오로 2세 교황의 유해가 안치된 나무관.

 

 

이스라엘 벤구리온 공항에 도착한 교황은 기독교와 이슬람, 유다교 신자의 자녀 3명이 들고 있는 3개의 그릇에 담긴 흙에 입을 맞췄다. 3개의 종교가 화합해 발전하길 기원하는 희망의 뜻이 담겨 있었다. 이어 교황은 예루살렘 통곡의 벽에서 랍비가 하는 양식대로 기도했다. 가톨릭은 어떤 종교여야 하는지를 잘 보여 준 장면이었다.

 

교황은 교회의 과거 잘못을 인정하는 데 주저하지 않았다. 1992년 지동설을 주장한 갈릴레오 갈릴레이에 대한 중세 교회 재판의 잘못을 시인하고, 대희년인 2000년 ‘용서의 날’ 참회 예식을 진행하면서 제2차 세계대전 중 나치의 유다인 학살에 저항하지 못한 점, 십자군 전쟁, 13세기 종교재판 등을 참회하고 용서를 구했다. 요한 바오로 2세는 그렇게 사람들에게 사랑과 평화, 화해와 용서의 메시지를 남기고 마지막 여행을 떠났다.

 

장례식에는 무려 400만 명에 이르는 조문객이 성 베드로 대성전을 찾았다. 장례 미사에 모여든 수많은 인파는 교황을 즉시 시성해 달라는 뜻의 ‘산토 수비토’(Santo Subito)를 외쳤다. 이러한 염원에 요한 바오로 2세 교황은 교회 역사상 가장 빠른 선종 6년 만에 시복됐고, 2014년 성인품에 올랐다. 요한 바오로 2세가 가톨릭 교회에 얼마나 위대한 발자취를 남겼는지를 단적으로 보여 준 사건이었다. 

 

장례 기간 전 세계는 슬픔에 싸여 요한 바오로 2세의 선종을 애도했다. 한국 교회도 교구별로 추모 미사와 연도가 이어졌다. 서울대교구 주교좌 명동대성당에 마련된 분향소에는 일반 신자들을 비롯해 각 수도회의 조문 행렬이 이어졌고, 외국인 신자들의 모습도 자주 눈에 띄었다. 교황 선종 후 교계 기자들이 정 대주교에게 인터뷰를 요청했다.

 

“요한 바오로 2세 교황의 선종에 애통함을 금할 수 없습니다. 가정에서 사랑하는 아버지를 잃은 것 같은 슬픔을 느낍니다. 요한 바오로 2세의 뒤를 이을 새 교황님을 위해서도 열심히 기도합시다.”

 

인터뷰를 마치고 길을 나서며 정 대주교는 교황 선출을 앞둔 상황에서 투표에 참여할 추기경단을 떠올렸다. 그리고 좋은 목자가 탄생하길 두 손 모아 하느님께 기도했다.

 

[가톨릭평화신문, 2017년 7월 23일, 허영엽 신부(서울대교구 홍보국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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