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4월 18일 (목)
(백) 부활 제3주간 목요일 나는 하늘에서 내려온 살아 있는 빵이다.

성경자료

[구약] 구약 성경의 물신: 반탈출의 상징 바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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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17-07-20 ㅣ No.3758

[구약 성경의 물신] ‘반탈출’의 상징 바알

 

 

이집트에서 탈출한 백성이 광야에서 거역하여 하느님께서 분노하신 이야기는 잘 알려져 있다. 이번에는 반역한 무리의 내면을 들여다보고, 바알로 기우는 인간의 나약한 마음을 헤아려 보자.

 

 

반(反)탈출 이데올로기

 

이집트 탈출 사건은 이스라엘의 역사적 시작이자 믿음의 뿌리로서 매우 중요하다. 주님께서는 이집트의 신으로 섬겨지던 파라오에게 맞서 가난한 백성의 해방을 이루셨다. 이 사건은 역사에서 일하시는 하느님의 참모습을 드러낸 일이자 고대 근동의 어떤 신도 이루지 못한 완전히 새로운 종류의 역사였다.

 

이집트 탈출 사건 직후에 백성은 시나이산에서 계약을 맺었다. 그러나 탈출과 계약의 의미는 자동으로 이해되는 것이 아니었다. 하느님은 어떤 분이신지, 탈출 사건의 참된 의미는 무엇인지, 하느님 백성으로서 우리는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등을 충분히 성찰하고 깨닫기에는 훨씬 더 많은 시간이 필요했다.

 

인류 역사를 보면 공동선이 대폭으로 증진되고 모두에게 이익이 되는 일임에도, 개혁이 좌초되거나 굴절되는 과정을 발견할 수 있다. 기득권의 저항도 상당하지만, 사실 오해와 나약함과 교활함과 이기심 등이 얽히고설켜서 문제를 더 어렵게 만든다. 그래서 ‘해방’보다 ‘해방 이후’가, ‘민주화’보다 ‘민주화 이후’가 더 중요할지도 모른다.

 

이집트 탈출 이후 하느님 백성의 역사도 마찬가지였다. 백성은 종살이에서 해방되는 감격적 사건을 겪었지만, 그 의미를 제대로 깨닫지 못하였다. 오히려 일부는 이집트 탈출의 의미를 정면으로 거스르는 주장, 곧 ‘반탈출 이데올로기’(Braulik)에 솔깃했고, 바알에 마음이 끌렸다.

 

 

탈출 직후부터 반역하다

 

성경은 이미 이집트 탈출 직후부터 백성들이 불평하기 시작했다고 보고한다. 탈출기 14장에서 갈대 바다를 가른 사건이 나오고, 15장에서 모세와 미르얌은 해방의 감격을 노래한다. 그러나 16장의 서두에서 백성은 벌써 이렇게 불평한다.

 

“아, 우리가 고기 냄비 곁에 앉아 빵을 배불리 먹던 그때, 이집트 땅에서 주님의 손에 죽었더라면! 그런데 당신들은 이 무리를 모조리 굶겨 죽이려고, 우리를 이 광야로 끌고 왔소?”(3절)

 

구약 성경에서 이집트는 ‘종살이하던 집’(신명 5,6 등)으로서 억압과 압제를 상징한다. 그런데 위 불평은 이집트 땅이야말로 ‘고기와 빵이 풍족하던 시대’라고 우기니, 탈출의 서사를 완전히 뒤집는 것이다. 게다가 탈출하여 광야로 나온 이유가 ‘백성을 모조리 굶겨 죽이려는 것’이라니, 이는 탈출의 해방적 의미를 송두리째 뒤집는 어처구니없는 주장이다.

 

 

탈출 사건을 부정하다

 

민수기 16장에 나오는 반역 이야기에서 반탈출 이데올로기의 성격을 자세히 볼 수 있다. 코라와 다탄과 아비람은 250명을 규합하여 모세에게 맞서면서(2절 참조)이렇게 대들었다.

 

“우리를 젖과 꿀이 흐르는 땅에서 데리고 올라와, 이 광야에서 죽이는 것만으로는 모자라서, 이제 우리 위에서 아주 군주 노릇까지 하려 드시오?”(13절)

 

하느님께서는 이집트 탈출 사건이 있기 전에 이미 모세에게 “젖과 꿀이 흐르는 땅”(탈출 3,8)을 주시려는 당신의 목적을 밝히셨다. 그런데 반역의 무리는 이집트야말로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이라고 우겼다. 이는 해방의 역사를 거꾸로 돌리는 말이자, 해방하시는 하느님의 근본적인 목표와 백성의 간절한 희망을 정면으로 부정하는 것이다. 또한 모세의 지도력을 부정하는 말이기도 하다.

 

백성은 결국 주님의 분노를 샀다(민수 16,21). 하지만 지도자 모세와 아론은 백성을 위해 기도하여 다수의 목숨을 구하였다(22-24절). 일찍이 갈대 바다를 가르신 하느님께서는 이번에는 땅을 가르시어 반역의 무리를 삼켜 버리게 하셨다(31-35절). 이런 광야의 불평과 반란 사건은 민수기와 신명기 등에서 반복된다. 다음은 반탈출 이데올로기의 종합이라고 할 수 있다.

 

“주님은 그들에게 약속한 땅으로 그들을 데리고 갈 능력이 없구나. 그가 그들을 미워하여 광야에서 죽게 하려고 그들을 이끌어 내었구나”(신명 9,28; 민수 14,16; 신명 1,27 참조).

 

“능력이 없구나.”는 하느님의 크신 권능을 부정하는 말이고, 백성을 “미워하여”는 하느님의 한없는 사랑을 부정하는 말이며, “광야에서 죽게 하려고”는 해방의 궁극적 약속을 부정하는 말이다. 이렇게 광야의 반탈출 이데올로기는 이집트 탈출의 거의 모든 요소를 조목조목 비판하면서 근본적으로 부정한다.

 

해방 이후의 혼란이나 궁핍함 때문에 일제 식민 시대를 그리워했다는 말을 듣는다. 민주화 이후의 과도기 때문에 민주화 과정 자체를 부정하는 말도 듣는다. 이집트 탈출 직후의 백성을 성찰하면, 인간의 본성이란 무엇인지 참으로 깊은 상념에 빠지게 된다. 혹시 인류의 역사란, 변화의 참된 의미를 모두가 이해하기까지 긴 시간을 요구하는 법인지도 모르겠다.

 

 

목이 뻣뻣한 백성의 내면

 

이렇게 광야에서 불평하고 반역한 백성을 전통적으로 ‘광야의 불평’ 또는 “목이 뻣뻣한 백성”(탈출 32,9 등) 등으로 서술해 왔다. 그런데 그들의 주장을 조금 자세히 분석하면, 그들은 이집트 탈출 직후부터 탈출의 근본적 의미를 부정하는 반탈출 이데올로기를 퍼뜨린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 곧 반탈출 이데올로기는 목이 뻣뻣한 백성의 내면이다.

 

모세는 하느님과 친밀한 “주님의 종”(신명 34,5)이자 이집트 탈출의 역군이었을 뿐만 아니라 반탈출 이데올로기에 맞서 이집트 탈출의 의미와 과정을 끈질기게 설득하고 이끈 지도자이기도 하다. 그는 반탈출 이데올로기에 절대 휩쓸리지 않았다. 오히려 반역의 무리와 온 백성을 위해 참회하고 기도하여 하느님 백성의 다수를 구하였다. 모세의 이런 모습은 하느님 백성의 지도자들에게 영원한 귀감이 될 것이다.

 

 

‘반탈출’과 바알

 

구약 성경은 광야에서 거역한 대표적인 사건으로 아론이 수송아지를 만든 일을 기억한다. 모세가 시나이산에서 하느님과 머물고 있을 때(탈출 32,1 참조) 아론은 백성들에게서 금을 모아 수송아지 상을 만들었다(2-4절 참조). 분명히 그들은 바알에 마음이 쏠린 것이다.

 

고대 근동에서 황소는 힘이 가장 센 동물로 인식되었다. 길가메시 서사시 등에서 가장 큰 힘을 상징하는 동물은 사자가 아니라 황소였다. 그리고 황소는 풍우신의 대표적인 상징으로서 바알의 상징이기도 했다.

 

이 이야기에서 백성은 불평하지 않았다. 모세가 없는 사이에 아론과 백성은 아마도 하느님의 크신 업적과 권능을 어떻게 이해할지 혼란스러웠던 것 같다. 새로운 시대를 이끌고 나가는 데 대한 불안감에 휩싸이지 않았을까? 아론은 백성을 등 따습고 배부르게 만들어야 한다는 책임감과 밀려드는 대중에 대한 두려움에 짓눌렸을지도 모른다. 그래서 그들은 가장 큰 힘의 상징인 황소야말로 새 시대의 하느님을 상징하는 가장 적절한 짐승이라고 생각했을 것이다. 가난한 사람을 우선으로 선택하시는 하느님에 대한 확신이 없는 곳에서 바알은 인간의 나약한 마음에 침투한다. 그리고 결국 하느님을 거스르게 이끈다.

 

우리는 ‘목이 뻣뻣한 백성’의 내면을 봐야 한다. 그것은 이집트 탈출의 모든 면을 부정하는 반탈출 이데올로기였다. 그런데 반탈출 이데올로기와 바알의 결합은 여기에서 그치지 않는다.

 

다음 호에는 전혀 새로운 모습으로 탈출 사건을 부정하는 바알을 살펴보겠다.

 

* 주원준 토마스 아퀴나스 - 한님성서연구소 수석 연구원으로 고대 근동과 구약 성경을 연구하는 평신도 신학자이다. 주교회의 복음화위원회 위원이자 의정부교구 사목평의회 위원이다. 저서로 「구약 성경과 신들」과 「신명기 주해」 등이 있다.

 

[경향잡지, 2017년 7월호, 주원준 토마스 아퀴나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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