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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초대 조선교구장 브뤼기에르18: 중국인 신부 여항덕의 등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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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17-07-10 ㅣ No.912

초대 조선교구장 브뤼기에르 (18) 중국인 신부 여항덕의 등장


새로운 선교 자원자, 조선행에 걸림돌이 되지만…

 

 

- 여항덕 신부는 중국 섬서 출신으로 조선에서 본국으로 귀환한 후에도 산서-섬서대목구에서 사목활동을 했다. 사진은 브뤼기에르 주교 당시 산서-섬서대목구청 자리에 20세기 초반 새롭게 건립된 산서교구 주교좌성당. 리길재 기자.

 

 

브뤼기에르 주교는 페낭에 머물면서 북경에서 박해를 피해 마카오에 체류 중인 프랑스 라자로회 선교사 라미오 신부에게 조선의 신자 공동체와 조선 입국로에 관한 정보를 요청했다. 북당에서 사목하면서 청나라 황족의 후손인 도흠과 도민 형제에게 세례를 줄 만큼 북경 사정에 밝았던 라미오 신부는 브뤼기에르 주교에게 “포르투갈 신부들이 원하지 않으면 주교님은 절대 조선으로 입국하지 못할 것”이라는 답신을 보내왔다.

 

브뤼기에르 주교가 동남아시아에서 조선 선교를 위해 여러 방면으로 준비하고 있을 때 교황청에서는 또 다른 변수가 발생했다. 이탈리아 나폴리에서 공부하던 중국인 여항덕(파치피코, 유방제라고도 함) 신부가 포교성성에 조선 선교에 자원한 것이다. 

 

포교성성은 1828년 8월 23일 나폴리 성가정신학교 학장 안토니오 갈라톨라 신부로부터 “1821년 유학 온 중국인 4명의 신학생 중 여항덕이 신학교 도착 후부터 계속해서 조선 선교를 희망하고 있다”는 보고를 받았다. 여항덕이 왜 그렇게 조선 선교를 희망했는지 구체적 이유는 밝혀지지 않았다. 학자들은 4명의 중국인 신학생들이 나폴리로 갈 때 포교성성 장관에게 보내는 조선인 신자들의 편지를 갖고 간 것을 실마리로 여항덕이 그때부터 조선 선교를 꿈꾸지 않았나 추정하고 있다. 

 

여항덕은 1795년 중국 섬서(陝西)에서 태어났다. 그가 성장할 당시 중국 교회의 상황은 청나라 제6대 황제인 가경제(재위 1796~1820)의 박해로 큰 타격을 받고 있었다. 가경제는 가톨릭 교회를 잔인하게 박해했다. 황궁에서 공직을 맡은 선교사 외에 모든 서양 선교사들의 북경 출입을 금했다. 이를 어길 경우 간첩죄ㆍ사교(邪敎)유포죄ㆍ풍속문란죄 등을 적용해 처벌했다. 또 가경제는 중국인 관리들이 천주교를 믿으면 파면했고, 백성들이 세례를 받으면 중노동형에 처했다.

 

중국인 사제 여항덕 신부를 이탈리아 나폴리 성가정신학교에서 사제로 양성시킨 마태오 리파 신부.

 

 

여항덕은 스물네 살 때 신학생으로 선발돼 산서 출신 첸레오, 찬바오로, 방베드로와 함께 1821년 9월 1일 이탈리아 나폴리 예수 그리스도의 성가정신학교에 입학했다. 이 신학교는 1732년 마태오 리파(Matteo Ripa, 1682~1746) 신부가 설립한 교황청 포교성성 직할 신학교였다. 교황청 포교성성 소속 중국 선교사였던 리파 신부는 북경 황궁에서 궁정화가로 활동했다. 그는 중국으로 파견되기에 앞서 속성으로 그림을 배웠다. 때문에 궁정화가로 함께 있던 예수회 선교사 주세페 카스틸리오네(Giuseppe Castiglione, 중국명 낭세녕, 1688~1766) 신부보다 실력이 크게 못 미쳐 1724년 이탈리아로 귀국해야만 했다. 그는 회고록에서 “복음을 선포하는 데 자신을 헌신하고자 했던 바람과 전혀 상관없는 천 염색을 돕고 궁정에 거주해야 하는 것 등은 생각지도 못한 놀라운 일이었다”고 밝혔다. 리파 신부는 고향 나폴리에 예수 그리스도의 성가정신학교를 설립해 80명의 중국인 사제를 배출했다. 

 

여항덕도 이 신학교에서 약 10년간 신학과 철학, 수사학 등을 공부하고 1831년 1월 사제품을 받았다. 그는 1831년 1월 27일 나폴리에서 출발해 그해 7월 31일 마카오에 도착했다. 여 신부는 마카오 포교성성 대표부에서 움피에레스 신부에게 포교성성의 지침에 따라 조선 선교를 위한 교육을 받았다. 그리고 그는 북경 주교에게 조선 선교에 필요한 모든 직무와 자금을 받기로 하고 1831년 11월 12일 이전에 마카오에서 출발해 다음 해 12월 25일 북경에 도착했다. 신학생 때부터 조선 선교를 열망했던 여항덕 신부는 이후 초대 조선대목구장 브뤼기에르 주교의 조선 입국에 걸림돌 역할을 하게 된다.

 

브뤼기에르 주교는 1832년 7월 초 “조선으로 가고 싶으면 지금 당장 떠나라”는 움피에레스 신부의 편지에 이렇게 답했다. “내가 무슨 자격으로 조선에 파견되었는지 아는 바가 없다. 관리자로서인가? 남경 주교의 부주교로서인가? 모르겠다. 신부님이 이 점에 대해 아무런 언급을 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혹여 어떤 중국인 사제, 그러니까 나의 동료이기보다는 오히려 나를 감독하는 사제의 재치권에 따라야 하는 단순한 선교사로서인가? 이것은 알게 모르게 주교의 체면을 위태롭게 할 수도 있을 것이다. 게다가 나는 나와 밀접하게 연결된 파리외방전교회와 결별할 수는 없다. 도리로도 그렇고 보은의 차원에서도 그렇다.… 하지만 포교성성이 원하는 것이 진정 내가 즉시 떠나는 것이라면 아무 조건 없이 떠날 것이다. 나는 교황 성하의 명을 따르기 위해 모든 것을 희생할 준비가 되어 있다.”(「브뤼기에르 주교 여행기」에서)

 

이 편지를 쓰고 며칠 지난 1832년 7월 25일 브뤼기에르 주교는 파리외방전교회 신학교 교수인 장 앙투완 뒤브와(Jean Antoine Dubois, 1766~1848) 신부가 보낸 편지를 받고, 그레고리오 16세 교황이 1831년 9월 9일 조선대목구를 설정했고 초대 대목구장으로 자신을 임명한 사실을 알게 됐다.

 

[가톨릭평화신문, 2017년 7월 9일, 리길재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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