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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성] 가톨릭 영성을 찾아서29: 6세기 (4) 북방 선교와 게르만족 영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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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17-06-18 ㅣ No.961

[전영준 신부의 가톨릭 영성을 찾아서] (29) 6세기 ④ 북방 선교와 게르만족 영성


서로를 향한 선교 여행, 신앙 다지는 밑거름 되다

 

 

- 콜룸바누스와 아우구스티누스의 선교 여행 경로. 콜룸바누스는 여러 도시를 경유해 그 이동 경로가 복잡한 관계로 최대한 단순하게 표시했다. 그래픽=문채현.

 

 

6세기 말엽에 브리타니아에서는 상호 교환 선교 활동이 있었습니다. 한편으로 아일랜드 켈트족 출신 선교사들은 유럽 대륙으로 선교를 떠났으며, 다른 한편으로 비슷한 시기에 로마에서 선교사들이 잉글랜드 복음화를 위해 브리타니아로 선교를 떠났습니다. 이러한 사건의 중심에 교황 그레고리우스 1세(Gregorius PP. I, 540경~604), 캔터베리의 아우구스티누스(Augustinus Cantuariensis, ?~604) 및 콜룸바누스(Columbanus, 543경~615) 등이 있었습니다.

 

 

엄격한 수도 생활을 실천한 선교사 콜룸바누스

 

켈트족이 살던 아일랜드 라인스터(Leinster) 출신 콜룸바누스는 어린 시절 북아일랜드 서쪽 언(Erne) 호수 근처에 위치한 수도원 수도원장 시넬(Sinell)의 지도로 집에서 공부했는데 시편을 주석할 정도였습니다. 이후 북아일랜드 동쪽에 콤갈(Comgall, 510/520~597/602) 수도원장이 설립한 뱅고어(Bangor) 수도원에 입회했으며, 사제품을 받고 학생들에게 성경을 가르치면서 대략 40대까지 엄격한 수도 생활을 실천했습니다.

 

수도원장의 허락을 얻은 콜룸바누스는 동료 수도자 12명과 함께 유럽 대륙으로 선교를 떠났습니다. 585년경 해협을 건너 갈리아 북서쪽 브르타뉴(Bretagne) 지방 생-말로(Saint-Malo)에 도착한 콜룸바누스 일행은 대륙을 가로질러 590년경 갈리아 동쪽 부르고뉴(Bourgogne) 지방에 정착했습니다. 프랑크 왕국 메로빙거 왕조 출신이며 과거 부르군드 왕국 지역을 다스렸던 군트크람누스(Guntchramnus, 532/34~593)의 환대로 콜룸바누스 일행은 안느그레(Annegray), 뤽세이(Luxeuil), 퐁텐(Fontaine) 등지에 여러 수도원을 설립했고, 약 20년간 많은 사람에게 엄격한 수도 생활을 가르쳤습니다.

 

하지만 엄격한 윤리관을 지녔던 콜룸바누스가 타락한 왕족들을 자주 비판하자 610년경 후임 왕은 콜룸바누스와 수도자들을 그 지역에서 추방했습니다. 본국으로 압송당하기 직전 낭트(Nantes)에서 탈출한 콜룸바누스 일행은 또 다른 게르만족의 복음화를 지향하며 메츠(Mets)와 마인츠(Mainz)를 거쳐 라린 강을 따라 남쪽으로 선교 여행을 했습니다. 알프스 산맥을 넘은 콜룸바누스 일행은 612년경 이탈리아 북쪽에 위치한 랑고바르드 왕국에 도착해 밀라노(Milano), 제네바(Genova), 보비오(Bobbio) 등지에 수도원을 설립했습니다. 콜룸바누스는 보비오 수도원에서 죽을 때까지 정통 교리를 가르치며 선교 활동을 했습니다.

 

 

엄격한 켈트족 영성을 받아들이기 시작한 프랑크족

 

콜룸바누스는 열정적인 켈트족 종교 심성에 따라 잘못한 죄의 유형과 경중을 따져 보속을 부과하는 전통을 담아 성직자와 평신도를 위한 보속 규정인 「속죄집(De Poenitentiarum)」과 수도자를 위한 보속 규정인 「공동 생활 규칙(Regula Coenobialis)」을 저술했습니다. 한편 콜룸바누스는 뱅고어 수도원 및 아일랜드 수도원들의 전통을 담아 비교적 분량이 적은 저서 「수도 규칙(Regula Monachorum)」에서 수도 생활에 도움이 되는 덕행들을 제시했습니다. 즉, 순명, 침묵, 단식, 청빈, 겸손, 정결, 기도, 식별, 금욕, 완덕의 10가지였습니다.

 

콜룸바누스가 전한 열정적이고 엄격한 켈트족 영성은 한 세기 전에 복음을 받아들였으나 느슨하게 살던 프랑크족 그리스도인들을 자극했으며, 그들 중에서 일부는 엄격한 영성 생활을 받아들이고 실천했습니다. 특히, 갈리아 지역 교회는 콜룸바누스가 전한 잘못한 죄에 대해 참회하고 보속을 실천하는 방식에 대한 가치를 인정하고 받아들였습니다.

 

또한 콜룸바누스는 인문학에 많은 관심을 가지고 있었던 갈리아 지역 교회에 성경 독서와 묵상을 강조했습니다. 콜룸바누스는 그리스도인이 금욕 생활을 올바로 실천하기 위해서 성경 묵상이 뒷받침되어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특히 콜룸바누스는 수도 생활이 지상에서 낙원을 미리 체험하는 방법이라고 여겼습니다. 

 

비록 켈트 전례와 로마 전례의 충돌로 불화를 겪기는 했지만, 콜룸바누스는 유랑하는 켈트족 심성과 열정적인 켈트족 영성을 바탕으로 유럽 대륙 게르만족 영성의 활성화를 위해 많은 영향을 끼쳤습니다.

 

 

토착화 방식으로 서서히 복음화된 게르만족

 

- 그레고리우스 1세 교황.

 

 

한편 교황 그레고리우스 1세는 교황 즉위 전에 로마 시내에서 잉글랜드 출신 노예들이 매매되는 현장을 목격했던 경험이 계기가 되어서, 교황 즉위 이후에 과거 서로마 제국의 영토였던 잉글랜드 선교 계획을 세웠습니다. 596년 교황 그레고리우스는 자신이 설립했던 첼리오 언덕의 수도원에서 595년 원장이 되었던 로마 출신 캔터베리의 아우구스티누스를 선교사로 임명하고 수도자 40명과 함께 잉글랜드로 파견했습니다. 잉글랜드로 건너가기 직전에 주교품을 받은 아우구스티누스와 그 일행은 프랑크 왕국의 도움을 받아 597년 잉글랜드 켄트 왕국에 도착한 후 수도인 캔터베리에 주교좌를 두고 캔터베리의 첫 주교로서 앵글로색슨족을 위한 선교 활동을 했습니다.

 

아우구스티누스 일행의 선교 활동은 대성공을 거두어 왕과 신하를 비롯하여 수많은 사람이 개종했습니다. 또한 아우구스티누스는 잉글랜드 지역 교구 설립에 기여했으며, 도시 외곽에 수도원도 설립했습니다. 다만 켈트족 그리스도인이 선교하기를 꺼렸던 잉글랜드 지역이었음에도 이미 켈트 전례를 따르는 그리스도교가 들어와 있어 로마 전례를 따르던 아우구스티누스 일행 사이에서 마찰이 발생하곤 했습니다. 교황 그레고리우스는 잉글랜드 선교가 성공하자 게르마니아 지역에 살던 게르만족을 위한 선교 계획을 세우고 수도자들을 선교사로 파견했습니다.

 

그런데 교황 그레고리우스는 잉글랜드로 선교사를 파견할 때부터 선교사들에게 선교 지역의 민간 신앙 사원들을 파괴하지 말고 이방신 조각상만 제거하라고 당부했습니다. 또 교황은 이교 축제들도 자연스럽게 그리스도교 예식으로 대처하라고 언급했습니다. 선교를 너무 서두르다 보면 부작용이 생길 수 있다고 생각했던 것입니다. 따라서 선교사들은 이후 게르만족 선교도 이러한 방식으로 이교 미신을 제거하다 보니 복음화가 제대로 됐는지 알 수 없었습니다. 후대 학자들은 이러한 선교 방식 때문에 게르만족이 그리스도교화되기보다는 그리스도교가 게르만화된 것 같다고 평가했습니다.

 

부족 사회를 형성해 제후들에게 충성하던 게르만족은 개종 이후에 그리스도교 성인들을 제후들처럼 섬김으로써 성인 공경 신심이 발달했습니다. 호전적인 게르만족은 세상 전쟁을 단식과 기도 속에서 성전(聖戰)처럼 여겼습니다. 종족 관계로 묶인 게르만족은 단결하는 공동체 의식이 강했습니다. 비록 그리스도인으로서 아직 거친 모습이었지만, 이 같은 복음화는 훗날 게르만족이 서방 교회의 수호자로서 영성 생활을 이끌어 가는 결과를 가져왔습니다.

 

[가톨릭평화신문, 2017년 6월 18일, 전영준 신부(가톨릭대 신학대학 영성신학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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