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4월 20일 (토)
(백) 부활 제3주간 토요일(장애인의 날) 저희가 누구에게 가겠습니까? 주님께는 영원한 생명의 말씀이 있습니다.

한국ㅣ세계 교회사

[한국] 초대 조선교구장 브뤼기에르15: 교황청, 세계 수도회에 도움 요청

스크랩 인쇄

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17-06-04 ㅣ No.908

초대 조선교구장 브뤼기에르 (15) 교황청, 세계 수도회에 도움 요청


박해로 시름하는 조선 교회 소식에 마음은 이미 조선으로

 

 

- 교황청 포교성성은 직할 선교단체인 파리외방전교회에 조선 선교 책임을 맡겼다. 그림은 사제 서품 직후 조선으로 파견되고 있는 선교사들의 모습.

 

 

1818년 북경교구에 변고가 생겼다. 북경교구장 수자 사라이바 주교가 그해 1월 6일 마카오에서 사망한 것이다. 박해로 북경에 들어오지 못한 교구장 사라이바 주교를 대신하던 포르투갈 라자로회 리베이로 누네스(Ribeiro Nunes, 1767~1826) 신부가 총대리로서 조선 교회를 관리하게 됐다.

 

추기경 회의를 통해 조선 교회를 시급히 돕기로 한 교황청은 선교사 파견이 조선 신자들을 위한 가장 긴급한 사안임을 재확인하고 1822년 조선 교회에 성직자를 보낼 것을 누네스 신부에게 요청했다.

 

이 요청에 누네스 신부는 1823년 교황청 포교성성 마카오 대표부장 라파엘 움피에레스(Raphael Umpierres) 신부에게 조선인 신학생을 선발해 북경에서 교육한 다음 사제품을 주고 조선에 파견하는 것이 어떻겠냐고 역제안을 했다. 사실 누네스 신부는 조선을 도울 의향이 전혀 없었다. 북경의 포르투갈 선교사들은 황제에게 꼬투리를 잡혀 현지에서 쫓겨날까 봐 두려워했다. 이러한 이중적 태도는 누네스 신부가 움피에레스 신부에게 쓴 편지에 확연히 드러난다. 그는 조선인 신학생을 데려와 양성하겠다면서도 현재 북경교구는 조선을 도울 수 있는 형편이 되지 못할뿐더러 들킬 경우 그나마 겨우 명맥을 유지하는 교구의 존립 자체마저 위협을 받을 것이라고 했다.

 

파리외방전교회 본부 전경.

 

 

교황청은 북경교구에 대한 기대를 접었다. 움피에레스 신부는 포교성성에 중국인 신부들에게 조선을 맡기려는 것은 오히려 조선을 파멸로 이끄는 길이 될 것이라고 보고했다. 그러면서 로마나 프랑스의 예수회에 조선 선교 책임을 맡긴 후 예수회원 중 한 명을 조선의 지목구장으로 임명하는 것이 좋을 듯하다는 의견을 내놓았다.

 

포교성성은 움피에레스 신부의 제안을 받아들여 여러 수도회 책임자들에게 편지를 보내 조선에 성직자를 보내달라고 요청했다. 1827년 포교성성은 먼저 예수회에 이를 제안했다. 하지만 예수회는 해산 이후 복구한 지가 얼마 안 돼 이 요청을 거절했다.

 

포교성성은 1827년 9월 1일 파리외방전교회에 현재 북경교구의 사정으로 조선 교회에 아무런 원조도 줄 수 없으니 이 지방을 맡아줄 수 없겠느냐는 내용의 편지를 보냈다. 파리외방전교회 신학교 교장(본부장) 샤를 프랑수아 랑글루아(Charles Francois Langlois, 1767~1851) 신부는 1927년 9월 29일 포교성성 장관 카펠라리 추기경에게 편지를 보내 조선 선교 요청을 정중히 거절했다. 랑글루아 신부는 이 편지에서 △ 선교사 부족 △ 재원 부족 △ 조선 입국로의 불확실성 △ 회칙상 파리외방전교회 소속 대목구장과 선교사의 동의를 얻어야 함 △ 파리외방전교회 마카오 대표로부터 조선으로 갈 가능성에 관한 정보를 받기 전에는 장상으로서 확정적인 대답을 할 수 없다는 등의 이유로 조선에 선교사를 파견하기 어렵다고 했다.

 

교황청 포교성성 장관인 카펠라리 추기경이 파리외방전교회 신학교장 랑글루아 신부에게 ‘조선 선교지를 맡아달라’며 보낸 서한.

 

 

포교성성은 그해 11월 17일 다시 랑글루아 신부에게 편지를 보냈다. 카펠라리 추기경은 이 편지에서 대목구장들이 제안을 받아들이기 바란다면서 필요한 초기 비용의 일부를 포교성성에서 대겠다고 약속했다. 추기경은 또 조선 입국로에 관한 자료로 1824년 혹은 1825년에 보낸 ‘조선인 신자 암브로시오와 동료들이 교황에게 보낸 탄원서’ 사본을 첨부했다.

 

랑글루아 신부는 12월 4일 포교성성에 답신을 보내면서, 조선 신자들에게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 잘 알게 되었지만, 그들을 도우러 갈 가능성이 보이지 않는다고 했다. 그 이유로 그는 조선 신자들이 편지에서 제안한 입국로의 접근 경로가 믿을만하지 않을뿐더러 실현 불가능해 보인다고 했다. 이렇게 해서 교황청 포교성성과 파리외방전교회 간의 조선 선교 교섭은 중단되고 만다.

 

교황청과 파리외방전교회가 교섭하는 사이 조선에서는 정해박해(1827년)가 일어났다. 전라도 곡성에서 시작된 이 박해는 경상도와 충청도로 확산됐다. 이 박해로 조선 교회 재건에 힘썼던 신태보(베드로)를 비롯한 많은 신자가 순교하거나 유배됐고 조선 교회는 또 한 번 피폐해졌다.

 

파리외방전교회 사제들이 본부 성당에서 미사를 봉헌하고 있다.

 

 

한편, 브뤼기에르 신부는 조선 선교지 관할 여부를 묻는 파리외방전교회 1828년 1월 6일자 공동회람을 1829년 샴에서 받았다. 그 공동 회람에는 “돈도 없고, 선교사 숫자는 적으며, 다른 선교지에도 급한 일이 많고, 그 지방에 들어가는 데 거의 극복하지 못할 난관이 있으며, 또 불행한 조선 신입 교우들이 선교사들을 국내로 영입하는 데 사용하겠다는 방법이 가능하지 않다는 사실을 근거로 조선 선교 수락 문제를 미룰 생각”이라는 글이 적혀 있었다.(1829년 5월 19일 파리외방전교회 본부 지도 신부들에게 보낸 편지)

 

하지만 브뤼기에르 신부는 이 편지를 읽고서 자신의 선교 열망이 점점 커지는 것을 느꼈다. 30년 전부터 그리스도교 세계의 도움을 간청해 온 불운한 조선 신자들에게 도움을 주러 갈 좋은 기회가 왔다고 확신했다.

 

“이 가엾은 신입 교우들이 버림받은 상태에 있음을 알자 이들을 구하러 가겠다는 강렬한 열망이 생겼습니다.”(브뤼기에르 주교 여행기 중에서)

 

[가톨릭평화신문, 2017년 6월 4일, 리길재 기자]



2,583 0

추천

 

페이스북 트위터 핀터레스트 구글플러스

Comments
Total0
※ 500자 이내로 작성 가능합니다. (0/500)

  • ※ 로그인 후 등록 가능합니다.

리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