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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성] 가톨릭 영성을 찾아서16: 4세기 (3) 로마 제국의 흥망이 영성 생활에 끼친 영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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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17-03-18 ㅣ No.912

[전영준 신부의 가톨릭 영성을 찾아서] (16) 4세기 ③ 로마 제국의 흥망이 영성 생활에 끼친 영향


종교의 자유 얻지만 분열의 아픔 겪어

 

 

- 성 실베스테르 1세 교황과 콘스탄티누스 황제.

 

 

4세기에 그리스도교는 역사상 가장 파란만장하고도 극적인 대조를 이루던 시기를 보냈습니다. 로마 제국은 4세기 초반에 그리스도교에 커다란 박해를 가했지만, 중반에 그리스도교와 화해의 길로 들어섰으며 후반에 그리스도교를 로마 제국 안에서 유일한 종교로까지 인정했습니다. 한편 종교 자유 이후 교회 안에서 격한 신학 논쟁들이 벌어지면서 동시에 정통 교리를 수호하는 빼어난 신학자들이 등장했습니다. 이 시기에 교회는 더욱 조직화되고 체계화되면서 외형적으로는 확장되어 갔지만, 내면적으로는 분열의 아픔을 겪기 시작했습니다.

 

 

그리스도교 자유와 국교화

 

네로(Nero, 재위 54~68) 황제는 64년 로마에서 발생한 대화재를 빌미로 로마 교회를 박해하기 시작했습니다. 이후 로마 제국을 동서로 분할해 통치한 디오클레티아누스(Diocletianus, 재위 284~305) 황제가 퇴위하기 직전인 303년 시작한 최후의 대(大)박해 때까지 그리스도교는 오랜 기간 박해의 시기를 보냈습니다. 그 후 서방 황제로 추대된 리키니우스(Licinius, 재위 308~324)는 임종 직전이었던 동방의 후임 황제 갈레리우스(Galerius, 재위 305~311)를 설득해 311년 그리스도인 관용 칙령에 서명하게 하고, 자신을 서방 황제로 선포한 콘스탄티누스(Constantinus, 재위 306~337)와 함께 313년 그리스도인 관용 포고인 ‘밀라노 칙령’을 발표하면서, 드디어 그리스도교는 종교의 자유를 얻었습니다.

 

콘스탄티누스 황제와 어머니 성녀 헬레나.

 

 

콘스탄티누스 황제는 324년 로마 제국을 재통일하고 단독 황제가 되어, 330년 로마 제국의 수도를 동방 콘스탄티노플로 옮겼으며, 337년 죽기 직전에 세례를 받았습니다. 한편 테오도시우스(Theodosius, 재위 379~395) 황제는 392년 황제 칙령으로 이교예식 참여 금지를 명함으로써 그리스도교는 로마 제국의 국교가 되었습니다. 하지만 테오도시우스는 395년 두 아들에게 로마 제국을 다시 둘로 나눠 물려주고 사망해 로마 제국은 또다시 동서로 나뉘었습니다.

 

동서로 분열된 로마 제국은 5세기 들어 ‘하나이며 거룩한 교회’를 송두리째 흔들어 놓았습니다. 그리스 신학자들과 라틴 신학자들은 서로 다른 두 문화 환경에서 살면서 동서방의 고유한 사상에 따라 신학을 연구했습니다. 즉, 그리스어는 더 이상 일치의 결속력을 발휘하지 못했으며 서방은 이미 라틴어화 되었습니다. 동방 교회는 1453년 멸망할 때까지 동로마 제국의 안정적인 지지와 카파도키아 교부들의 신학적인 공헌으로 말미암아 풍부한 사상을 바탕으로 독자적인 지위와 특성을 형성해 나갈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서방 교회는 476년 서로마 제국이 멸망하자 세속 권력의 안정적 지지를 확보하는 것 자체가 시급한 일로 다가왔습니다.

 

 

올바른 영적 여정을 위한 공의회의 가르침

 

4세기에 로마 제국의 황제들은 교회 내부 문제에도 깊이 관여하며 교회의 수호자로 자처했습니다. 먼저 콘스탄티누스 황제는 북아프리카 교회에 나타난 이단 사상인 도나투스파(Donatism)를 척결하는 데 앞장섰습니다. 콘스탄티누스 황제가 314년 소집한 아를(Arles) 교회회의에 모인 서방 교회 주교들은 극단적인 엄격주의, 완벽주의 및 분리주의인 도나투스파를 단죄했습니다.

 

또한 콘스탄티누스 황제는 325년 니케아 공의회를 소집했습니다. 공의회에서 교부들은 아리우스(Arius, 256경~336)가 주창한 그리스도의 신성을 거부하고 그리스도도 창조되었다고 주장한 아리우스사상(Arianism)을 단죄했습니다. 즉, 육화하신 말씀은 성부와 ‘본질이 같으신 분’이라고 선언했습니다. 특히 니케아 공의회에서 삼위일체 교리를 확립하는 데에 활약한 아타나시우스(Athanasius, 295/300~373)는 중기 플라톤 사상에 따라 로고스를 피조물로 간주한 아리우스 사상을 반박하며 로고스가 신적 존재라고 주장함으로써 ‘무로부터의 창조(ex nihilo)’ 교리를 재확인했습니다. 훗날 카파도키아의 교부들은 이 점을 받아들이면서 오리게네스의 신비신학 안에 들어있는 오류를 넘어서는 새로운 신비신학을 펼칠 수 있었습니다.

 

한편 테오도시우스 황제는 381년 콘스탄티노플 공의회를 소집했습니다. 공의회에서 교부들은 아리우스사상뿐 아니라 아폴리나리우스(Apollinarius, 315경~392 이전)가 주창했던 그리스도의 인성을 거부한 아폴리나리우스사상(Apollinarianism)도 단죄했습니다. 그런데 콘스탄티노플 공의회에서 콘스탄티노플 교회를 로마 교회와 동등한 명예와 수위권을 가진다고 천명하며 두 번째 서열을 선언함으로써 훗날 알렉산드리아 교회와 치열한 경쟁 구도를 형성했습니다. 사실 앞선 니케아 공의회에서 그리스도교는 로마, 알렉산드리아 및 안티오키아에 이어 예루살렘 교회에 네 번째 서열을 부여하며 명예와 수위권을 인정한 바 있었는데, 330년 로마 제국의 천도로 인하여 콘스탄티노플이 동로마 제국의 수도가 되자 콘스탄티누스 황제가 콘스탄티노플 교회의 지위를 주장했던 것이었습니다.

 

4세기 가톨릭 주요 사건.

 

 

또 다른 백색 순교인 순례 신심

 

이 시기에 콘스탄티누스 황제의 어머니인 황후 헬레나(Helena, 248/49~330)는 그리스도교와 그리스도인 신심 생활에 크게 이바지했습니다. 전승에 따르면, 헬레나가 뒤에서 많은 노력을 기울인 덕분에 아들인 콘스탄티누스 황제가 밀라노 칙령을 발표할 수 있었으며 감옥에 갇혔던 많은 그리스도인도 석방될 수 있었습니다. 특히 헬레나는 326년경 예루살렘으로 순례를 떠났으며 그곳에 오랫동안 머물면서 골고타 언덕에 주님 무덤 성당을 세웠습니다.

 

이러한 일들이 계기가 되었던지 그리스도인들 사이에서 예수님의 자취와 흔적이 남아 있는 성지(聖地)를 순례하는 신심이 널리 퍼졌습니다. 순례 신심은 예수님 성지에만 국한되지 않았습니다. 박해 시대에 순교한 이들을 기억하고 그들의 유해를 모시는 전통이 생기면서 순교한 장소나 순교자의 유해를 모신 곳에 기념 성당을 세우고 순례하기 시작했습니다.

 

순례 신심은 적색 순교 이후에 수도 생활이나 동정 생활의 백색 순교를 실천하기 힘들어하는 그리스도인이 더 수월하게 실천할 수 있는 또 다른 형태의 백색 순교로 여겨지면서 널리 퍼졌습니다. 그리고 순례 신심과 맞물려 전례 예식도 발전하면서 전례 참여를 통한 신심 생활도 발전했습니다.

 

그러므로 4세기에 그리스도교는 갑자기 모여드는 예비신자를 위한 세례 교육을 마련해야 했습니다. 게다가 이미 라틴어화 되었던 서방 교회는 성경 교육을 위해 라틴어 성경이 필요했습니다. 몇몇 교부들은 신비 교육을 강조하면서 그리스도인 영성 생활 발전에 기여하고자 했습니다.

 

[가톨릭평화신문, 2017년 3월 19일, 전영준 신부(가톨릭대 신학대학 영성신학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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