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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성ㅣ기도ㅣ신앙

[기도] 쉽게 풀어쓰는 기도 이야기: 영적 인간 vs 육적 인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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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17-03-14 ㅣ No.911

[민범식 신부의 쉽게 풀어쓰는 기도 이야기] ‘영적 인간’ vs ‘육적 인간’


육신의 욕망, 성령의 인도… 당신의 선택은 무엇입니까?

 

 

찬미 예수님.

 

지난주에 우리는 ‘영성’이라는 말의 한자 표기를 살펴보면서 ‘신령할 영(靈)’에 ‘성질 성(性)’자를 쓰는 영성이라는 말 자체가 우리 그리스도교의 고유한 신앙과만 연결되어 사용되지는 않는다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 예로 ‘불교 영성’이나 ‘이슬람 영성’, ‘생태 영성’이나 ‘문화 영성’등 오늘날 우리 사회에서 자주 쓰이는 말들을 찾아볼 수 있지요.

 

그렇다면 우리는 왜 영성이라는 말에서 자연스레 ‘거룩한 생활’이나 ‘기도의 삶’과 같이 우리 신앙생활과 관련된 부분을 떠올리게 될까요? 그 이유는 이 ‘영성’이라는 말의 뿌리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영성’이라는 말의 뿌리를 우리는 바오로 사도에게서 찾을 수 있습니다. 바오로 사도께서는 그리스어로 당신의 서간들을 쓰시면서 ‘프네우마(πνε?μα)’라는 용어를 사용하시죠. “곧 지난날의 생활 방식에 젖어 사람을 속이는 욕망으로 멸망해 가는 옛 인간을 벗어 버리고, 여러분의 영(프네우마)과 마음이 새로워져, 진리의 의로움과 거룩함 속에서 하느님의 모습에 따라 창조된 새 인간을 입어야 한다는 것입니다.”(에페 4,22-24) 테살로니카 후서에서도 이 단어의 쓰임을 찾아볼 수 있습니다. “그러면 그 무법자가 나타날 터이지만, 주 예수님께서는 당신의 입김(프네우마)으로 그자를 멸하시고 당신 재림의 광채로 그자를 없애 버리실 것입니다.”(2테살 2,8) 이처럼 바오로 사도께서는 ‘영’, ‘입김, 숨결’을 의미하는 단어로 ‘프네우마’를 쓰십니다. 그런데 그리스어로 쓰인 성경이 4~5세기에 들어 라틴어로 번역이 되면서, 이 용어가 ‘스피리투알리타스(spiritualitas)’라는 용어로 번역되고, 이 라틴어 단어에서 오늘날 영어의 ‘스피리츄앨러티(spirituality)’, 그리고 우리말의 ‘영성’이라는 단어가 나오게 된 것입니다.

 

그런데 바오로 사도가 ‘영’이라는 단어를 쓰는 맥락은 ‘영적 인간’과 ‘육적 인간’을 이야기할 때입니다. 사도께서는 ‘영과 육의 대립’ 또는 ‘영적 인간과 육적 인간의 대립’이라는 주제에 대해 여러 번 말씀하시죠. 어떤 이들은 바오로 사도의 이러한 구별을 당시의 그리스 철학에서 유래하는 ‘영과 육의 이원론적 대립 사상’과 연결지어 이야기하기도 합니다. 즉, 영과 육 또는 비물질적인 것과 물질적인 것이 서로 섞일 수 없고 전적으로 반대된다고 보는 철학 사고와 연결되어 있다는 겁니다.

 

하지만 바오로 사도께서 말씀하시는 영적 인간, 육적 인간의 구별은 이와는 조금 다른 차원을 의미합니다. 영적 인간이라고 해서 순수하게 영으로만 이루어진 인간을 뜻하는 것은 아니기 때문입니다. 순수하게 영적인 존재가 있을까요? 네, 물론 있지요. 

 

바로 천사입니다. 하지만 우리 인간은 천사처럼 영으로만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 육신을 함께 지니고 있는 존재이지요. 그렇다고 해서 인간이 순수하게 육으로만, 물질로만 이루어진 것도 아닙니다. 우리 모두는 육신과 함께 정신이라는, 보이지 않는 비물질적인 부분도 함께 지니고 있습니다. 결국 모든 인간은 오로지 영이나 정신으로만 이루어진 존재도 아니요 순수하게 육으로만 이루어진 존재도 아닌, 영과 육, 정신과 육체를 함께 지니고 있는 존재인 것입니다. 

 

그렇다면, 바오로 사도께서 말씀하시는 ‘영적 인간’ ‘육적 인간’ 사이의 대립은 어떻게 이해할 수 있을까요? 그것은 인간이 영으로 이루어졌냐 육으로 이루어졌냐 하는 문제가 아니라 인간이 살아가는 방식에 대한 차이를 구별하는 문제입니다. 즉, 모든 인간이 정신과 육신으로 이루어진 것은 똑같은데 어떤 사람은 영적인 방식으로 살아가고 또 어떤 사람은 육적인 방식으로 살아간다는 것입니다.

 

사도께서는 갈라티아서 3장 3절에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여러분은 그렇게도 어리석습니까? 성령으로 시작하고서는 육으로 마칠 셈입니까?” 또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성령의 인도에 따라 살아가십시오. 그러면 육의 욕망을 채우지 않게 될 것입니다. 육이 욕망하는 것은 성령을 거스르고, 성령께서 바라시는 것은 육을 거스릅니다. 이 둘은 서로 반대되기 때문에 여러분은 자기가 원하는 것을 할 수 없게 됩니다.”(갈라 5,16-17)

 

이 말씀에서 우리가 알 수 있는 것은, 영적 인간은 성령의 인도에 따라 살아가는 사람이라는 것입니다. 이는 그 삶의 모든 부분, 곧 생각하고 말하고 행동하는 모든 것에 있어서 성령께서 이끌어주시는 대로 따라 살아가는 모습입니다. 반대로 육적 인간은 이런 모든 면에 있어서 육의 욕망을 따라 살아가는 사람이라는 것이죠. 여기에서 성령의 인도와 육의 욕망은 분명히 서로 반대됩니다. 육의 욕망을 따르게 되면 성령의 이끄심과는 정반대의 방향으로 가게 되죠. 이런 점에서 ‘영적 인간’과 ‘육적 인간’이 서로 반대된다는 것은 분명합니다. 하지만, 육신을 지녔으면서도 성령의 인도를 따른다면 영적인 삶의 방식으로 살아가는 영적 인간이 될 수 있다는 것, 또 정신과 영혼을 지닌 존재이지만 육의 욕망만을 따른다면 육적 인간으로 살아가게 된다는 것을 생각한다면, ‘영적 인간’과 ‘육적 인간’이 서로 다른 별개의 존재가 아니라는 것도 이해하게 됩니다. 결국, ‘나’라는 한 사람이 택할 수 있는 삶의 방식들인 것입니다.

 

이처럼 바오로 사도께서 쓰신 ‘영(프네우마)’이라는 용어의 쓰임을 보면 왜 우리가 ‘영성’이라는 말을 떠올릴 때 자연스럽게 하느님을 떠올리고 우리 기도의 삶을 떠올리게 되는지 이해하게 됩니다. 물론 우리 그리스도교 신앙의 테두리 안에서가 아니더라도 ‘영적인 차원의 경험’이라고 이야기할 수 있는 부분들은 인간의 삶 안에, 아마도 원시 종교 안에서부터 있어왔다고 할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오늘날 우리가 사용하고 있는 ‘영성’이라는 말의 뿌리에서부터 살펴보면, 이 말 자체는 기본적으로 우리 그리스도교 신앙의 용어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영성 내지는 ‘영-썽’이라고 하면 ‘우리 눈에 보이고 감각으로 경험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넘어서시는 하느님, 성령을 가리키는 그 무엇’으로 알아듣게 되는 것입니다.

 

그럼 이제 영성 생활이 무엇인지에 대한 의미도 조금은 더 분명해졌습니다. 그것은 바로 영적 인간으로 살아간다는 것입니다. 삶의 모든 부분에 있어서 내 육신의 욕망이 아니라 성령의 인도를 따라 살아가는 생활입니다. 그리고 우리 모두는 영적 인간으로 살아가도록 초대받은 사람들이죠.

 

“성령의 인도에 따라 살아가십시오. 그러면 육의 욕망을 채우지 않게 될 것입니다.”(갈라 5,16)

 

그렇다면, 성령의 인도를 따라 살아간다는 것은 또 어떤 의미일까요?

 

* 민범식 신부(가톨릭대학교 신학대학 영성신학 교수) - 서울대교구 소속으로 2003년 사제서품을 받았으며 로마 그레고리오대학에서 영성신학 박사와 심리학 석사 학위를 취득했다.

 

[가톨릭신문, 2017년 3월 12일, 민범식 신부(가톨릭대학교 신학대학 영성신학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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