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4월 20일 (토)
(백) 부활 제3주간 토요일(장애인의 날) 저희가 누구에게 가겠습니까? 주님께는 영원한 생명의 말씀이 있습니다.

강론자료

마태오복음 5,38-48 완전한 사랑 (2017. 2. 19. 연중 7주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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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충희 [korangpo] 쪽지 캡슐

2017-02-16 ㅣ No.2163

그때에 예수는 제자들에게 말하였다. 여러분은 눈에는 눈, 이에는 이라고 하신 말씀을 들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나는 지금 여러분에게 말합니다. 여러분에게 잘못한 사람에게 보복하지 마시오. 누가 여러분의 오른 뺨을 때리면 왼 뺨을 대주시오. 누가 여러분의 속옷을 가지려고 소송을 걸면 겉옷까지도 내어주시오. 또 누가 여러분에게 오 리를 가자고 하면 십 리를 가주시오. 누가 여러분에게 원하는 것이 있으면 그것을 주고 누가 여러분에게 빌리려고 하는 것은 빌려주시오.”

 

문제의 율법은 출애굽기 21:24, 레위기 24:20, 신명기 19:21 등에 기록되어 있다. 이른바 동태복수법(同態復讐法)이라는 것으로 고대 바빌로니아 함무라비 왕(BC1728-1686)의 법전에 명문화되어 있는 것으로 유명하다. 비록 두 법의 표현은 같더라도 그 취지는 전혀 다르다. 함무라비 왕의 동태복수법은 신민(臣民)을 형벌로 위협하여 왕권을 강화하는 것을 목적으로 한다. 오직 왕만이 법을 집행하는 권한을 지니기 때문이다. 이에 비해 율법의 동태복수법은 이스라엘 백성으로 하여금 하느님과의 친교 안에 머물러 그분께서 주시는 복을 누리도록 하는 것이 목적이다.

 

남에게 고의로 해를 끼치는 사람은 행동으로 자신의 가치를 부정하고 있다. 남의 목숨을 빼앗은 사람은 자신의 가치를 완전하게 부정하였으므로 사형에 처해지기도 전에 이미 죽은 상태이다. 자신의 가치를 스스로 부정하는 사람은 하느님의 백성이 될 자격이 없다. 율법의 동태복수법은 범죄자와 그가 속한 공동체에게 이 사실을 상기시키려는 것이다. 따라서 범죄자에게 보복을 하는 것은 율법의 본뜻이 아니다. 그렇다고는 하여도 범죄의 피해를 입은 당사자로서는 범죄자를 용서하는 것이 말처럼 쉽지가 않다. 세상 사람들은 자신이 저지른 잘못을 뉘우치기는커녕 자신을 용서하는 사람을 비웃기 일쑤이다. 예수가 제시한 세 가지의 처방은 물론 비유이다. 억지로 그런 상황을 지어내면 모를까 이러한 일들이 실제로 일어나는 경우는 없을 것이다.

 

오른 뺨은 세상의 모욕이며, ‘왼 뺨은 하느님께 대한 겸손이다. 참된 겸손은 남에게 보이기 위해 짐짓 자신을 낮추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현실적인 처지를 있는 그대로 인정하는 것이다. 예수의 제자는 악인을 용서하기 위하여 하느님께 사랑의 지혜를 청하며, 하느님께서는 그에게 지체 없이 성령을 내려주신다.

 

속옷은 사람의 지혜이며 겉옷은 하느님의 지혜(성령)이다. 세상 사람들은 사람의 지혜로 하느님의 지혜를 재단한다. 그러나 작은 지혜로 큰 지혜를 가늠하기는 애초부터 불가능하다. 성령은 이론의 대상이 될 수 없고 오직 실천의 대상이다. 그러므로 예수의 제자는 진리를 행동으로 증언한다. 속옷을 벗기려면 먼저 겉옷을 벗겨야 한다. 이처럼 하느님의 지혜(=실천, 겉옷)는 사람의 지혜(=, 속옷)보다 우선한다.

 

오 리는 육적 사랑이며 십 리는 영적 사랑이다. 육적 사랑은 죽음을 낳고 영적 사랑은 생명을 낳는다. 예수의 제자는 세상 사람들의 삶에 뒤섞여 살면서 그들을 하늘나라로 이끈다, 즉, 육적 사랑을 수단으로 삼아 영적 사랑을 성취한다. 모든 사람은 이 세상을 거쳐가는 나그네이며 사람이 가야할 진정한 목적지는 하늘나라이다.

 

오른 뺨, 속옷, 오 리는 예수의 제자가 세상 사람들에게 부당한 취급을 받는 사건이며 왼 뺨, 겉옷, 십 리는 예수의 제자가 세상 사람들을 하늘나라로 이끄는 사건이다. 각각 애덕, 신덕, 망덕에 해당한다.

 

예수의 제자가 악인에게 주는 것은 성령이며 빌려주는 것은 육정(肉情)이다. 다른 사람에게 성령을 부어주면 줄수록 하느님께서는 성령을 더 풍성하게 내려주신다. 성령에서 오는 영적 생명은 누구도 빼앗을 수 없는 개개인의 몫이다. 육정은 하느님께서 사람들이 이 세상을 사는 동안 잠시 빌려주신 것이므로 그것을 다른 사람에게 다시 빌려주더라도 아무런 손해가 없다. 성령은 삶의 목적이되 육정은 삶의 수단이다. 예수의 제자는 성령의 힘으로 악인을 용서하고 격려하며 그 결과 더 큰 영적 자유와 참된 육정의 자유를 누린다.

 

 

여러분은 친구를 사랑하고 적을 미워하여라.’고 하신 말씀을 들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나는 지금 여러분에게 말합니다. 적을 사랑하고 여러분을 박해하는 사람들을 위하여 기도하시오. 그러면 여러분은 하늘에 계신 아버지의 자녀가 될 것입니다. 그분께서는 악한 사람과 선한 사람에게 똑같이 해를 비추시고, 선한 일을 하는 사람과 악한 일을 하는 사람에게 똑같이 비를 내려주십니다. 여러분이 자신을 사랑하는 사람들만 사랑한다면 하느님께서 여러분에게 상을 주실 까닭이 어디에 있겠습니까? 그런 일은 세리라도 합니다! 또 여러분이 친구에게만 말을 건넨다면 무슨 특별한 일을 한 것입니까? 그런 일은 이교도라도 합니다! 하늘에 계신 아버지께서 완전하신 것같이 여러분도 완전하여야 합니다.”

 

예수가 인용한 성서의 출처는 아마도 집회서인 듯하다. “선한 사람들에게는 도움을 주되 죄인은 돕지 말라.”(집회서12:7) 레위기에는 예수의 가르침에 가까운 구절이 있다. “다른 사람에게 복수하거나 원한을 품지 말고 이웃을 네 몸처럼 아껴라.”(레위기 19:18)

 

예수 당시의 이스라엘 백성은 스스로 하느님의 백성임을 자부하면서 이방인(타민족)을 적으로 돌리는 경향이 있었던 것 같다. ‘아브라함의 자손에 대한 세례자 요한의 언급이 이러한 상황을 암시한다.(요한복음 3:7-12 참조) 자기집단에 대한 우월의식과 외부집단에 대한 공격성은 동전의 양면과도 같다. 집단의 유대를 강조할수록 집단 내부의 갈등이 발생하며, 이것은 결국 외부집단에 대한 공격성으로 표출되기 마련이다.

 

은 하늘나라를 반대하는 세상 사람들이며 박해자는 예수의 제자들에게 직접 위해를 가하는 사람들이다. 예수의 제자는 세상 사람들에게 하늘나라의 복음을 전하므로 필연적으로 적과 박해자를 마주친다. 세상에 복음을 전하면서 복음을 전하는 대상을 미워하는 것은 자가당착이다. 그러므로 예수의 제자는 적을 사랑하고 자신을 박해하는 사람을 위해 기도한다. 남을 위해 기도하는 목적은 하느님께서 그의 마음을 바꿔주시기를 청하는 것이 아니라 그의 고통에 연민을 지니고 그를 돕기 위하여 하느님께 더 큰 사랑의 지혜를 청하는 것이다. 사람의 마음을 바꿀 수 있는 것은 그 자신밖에 없다. 사람들에게 생명을 주시는 것이 하느님의 뜻이고 하느님의 뜻을 실천하는 사람은 그분의 아들이다.

 

는 영적 지혜(믿음)이며 는 영적 생명이다. 예수의 제자는 성령으로 하느님과 일치하고 있으므로 선한 사람이다. 그는 늘 믿음으로 세상 사람들을 살리는 선한 일을 한다. 그러나 성령을 모르는 사람은 사람의 지혜를 의지할 수밖에 없으며, 성령에서 오는 영적 생명을 모르는 사람은 육신의 생명을 위해 전력을 기울이지 않을 수 없다. 악한 사람이란 육정에 눈이 가려서 하느님을 알아보지 못하는 사람에 다름 아니다. 악한 사람은 늘 악한 일을 하게 마련이다.

 

그러나 하느님께서는 원하는 누구에게나 언제 어디서든지 성령을 내려주신다. 자신을 사랑하는 사람만 사랑하는 것은 사랑이 아니라 이해타산에 입각한 거래이다. ‘세리는 돈을 취급하는 사람들이니 이해타산에 밝을 수밖에 없다. 자신에게 친숙한 친구에게만 말을 건네는 것은 사랑과는 거리가 먼 감성적 애착의 표현이다. ‘이교도(異敎徒 pagans)’란 이스라엘 백성이 아닌 다른 민족을 가리키는 단어이지만 예수가 말하는 이교도는 세상 사람들이다. 이교도는 성령을 모르기 때문에 감성적 애착과 이해타산에 입각하여 이합집산을 되풀이한다. 예수의 제자는 하늘나라에 속하고 있으면서 이교도들에게 하늘나라의 소식을 전한다. 그런데 예수의 제자가 이교도들과 같은 행동을 한다면 이것은 터무니없는 자가당착이다.

 

하느님의 ()’은 성령이며, 하느님 자신이시며, 하늘나라이다. 상을 받은 사람은 영적 깨달음을 통하여 자신이 받은 상을 알 수 있다. 예수는 하느님을 아버지라고 지칭하면서 하느님께서 제자들을 낳으셨으며 그들을 계속 돌보고 계심을 상기시킨다. 하느님께서 내려주시는 성령이 아니면 사람은 결코 완전해질 수 없다. 하느님께서 완전하시므로 예수의 제자들도 완전하게 되어야만 그분의 아들로 불릴 자격이 있다. 예수의 말은 레위기에 전거(典據)가 있다. “너희들의 주 하느님인 내가 거룩하니 너희들도 거룩하게 되어라.”(레위기 19:2, 11:44) ‘완전하다(perfect)’는 흠이 없다는 뜻이며 거룩하다(holy)’는 모든 것을 포용한다는 뜻이니 결국 두 단어는 모두 하느님을 가리키는 표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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