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4월 19일 (금)
(백) 부활 제3주간 금요일 내 살은 참된 양식이고 내 피는 참된 음료다.

7성사ㅣ 준성사

[준성사] 복, 축복, 강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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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04-10-30 ㅣ No.68

복, 축복, 강복: 하느님께서 누구에게 빌까

 

 

세상에서 살아가는 사람은 누구나 행복하기를 바랍니다. 그런데 행복이란 무엇입니까? 지나친 욕심을 부리든 체념에 빠지든 저마다 마음먹기에 따라, 행복의 개념은 다 다를 수밖에 없습니다. 우리는 그저 작은 일에서 행복을 찾으며 살라고 배워 왔습니다. 그것은 경험의 가르침이기도 합니다. 유교 사회에서는 보통으로 수(壽), 부(富), 강녕(康寧), 유호덕(攸好德), 고종명(考終命)을 오복(五福)이라 이르며, 이 오복을 다 갖춘 사람을 행복한 사람이라고 하였습니다. 덕을 즐겨 닦고 제 명대로 살다 잘 죽는다는 유호덕과 고종명 대신에, 어떤 사람들은 귀(貴)와 자손중다(子孫衆多)를 오복에 넣기도 합니다. 여복과 여난이 겹쳐 든다고 자랑하는 사람도 있고요. 건강을 가장 큰 복으로 여기는 요즘에는 오관이나 오장의 건강을 오복으로 여깁니다. 어떻든 행복이란 그 사람의 가치관에 따라 다르기 마련입니다.

 

그리스도께서 가르치신 행복은 무엇입니까? 산상 (평지) 설교에서 가르치신 참 행복(眞福)은 종말의 하느님 나라를 바라보게 합니다. "가난한 사람은 행복하다!" 만물이 그리스도를 머리로 하여 하나가 되는 재창조가 이루어져야 가난한 사람이 행복하겠지만, 실제로 가난한 사람도 제 마음만 잘 다스리면 지금 행복을 느낄 수 있습니다. 우리는 세상의 물질적인 행복을 넘어서서 영원한 참 행복을 바랍니다. 그런데 구약성서에서 이야기하는, 하느님께서 내려 주시는 복은 모두 다 현세적인 복(특히 子孫衆多)입니다. 하느님께서는 온갖 생물들을 창조하시고 복을 내려 주시며 말씀하셨습니다. "새끼를 많이 낳아 번성하여라." 사람을 남자와 여자로 지어내시고 복을 내려 주시며 말씀하셨습니다. "자식을 낳고 번성하여 온 땅에 퍼져라." 선택받은 하느님 백성의 조상 야곱은 속임수로 아버지가 장자에게 빌어 주는 현세적인 복을 가로챘고, 하느님과도 밤새 씨름을 하여 억지로 복을 얻어내고 '이스라엘'이라는 이름을 받았습니다. 무속 신앙의 풍토에서 자란 우리는 전에 어디에다 무엇을 빌었습니까? 하늘에, 일월성신에, 칠성님께, 산신령님께, 삼신 할머니에게, 바위에, 당산 나무에다 빌며 온갖 어려움을 물리치고 복을 받기를 바랐습니다. 이른바 '기복 신앙'(祈福 信仰)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현세적이고 물질적인 복만을 바라는 기복 신앙을 극복하여 초월적이고 영신적인 진복을 추구하여야 한다고 배웁니다.

 

그런데 우리가 비는 현세적인 복과 하느님께서 내려 주시는 복을 무슨 말로 분명하게 구분할 수 있느냐 하는 것이 문제입니다. 또 그 복 자체가 다른 것이냐 하는 것도 문제입니다. 실제로 구분이 될는지 모르겠습니다만, 이 문제를 이야기하자면 먼저 하느님께서 복을 내리다 또는 우리가 복을 빌다는 뜻으로 옮겨지는 benedicere (bless; 명사 benedictio, blessing)가 어떻게 무슨 뜻으로 쓰이는지 보아야 할 것입니다. ('복'과 관련하여, 성서에서는 이 말말고도 여러 낱말을 여러 가지 형태로 씁니다.)

 

첫째, 우리가 하느님을 찬양(찬미)한다는 뜻으로 쓰입니다. "나 언제나 주님을 찬미하리니......"(시편 34,2). 둘째, 하느님께서 복을 내리시다, 그래서 우리가 복되다(행복하다) 또는 복을 받는다, 또는 우리가 (다른 사람에게) 복을 빌어 주다는 뜻으로 쓰입니다. "하느님께서는 그들에게 복을 내려 주시며 말씀하셨다"(창세 1,28). "그 자손이 복을 받으리라"(시편 37,26). 셋째, 거룩한 목적을 위하여 어떤 사람이나 사물을 봉헌하거나 축복하거나 축성(성별)한다는 뜻으로 쓰입니다. "예수님께서 빵을 들어 축복하시고 제자들에게 나누어 주셨다"(마태 26,26). 넷째, 나병을 나은 나아만이 예언자 엘리사에게 드리겠다는 것처럼, 선물을 가리킬 때에도 이 말이 쓰입니다. "소인이 감사하여 드리는 이 선물을 부디 받아 주십시오"(2열왕 5,15).

 

우리 나라의 교회 전통을 보자면, 성당에서는 '강복'과 '축성'이라는 말을 쓰고, 예배당에서는 주로 '축복'이라는 말을 써 왔습니다.

 

<밑줄 부분 비교 1>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 하느님께 찬양을 드립니다. 하느님께서는 그리스도를 통해서 하늘의 온갖 영적 축복을 우리에게 베풀어 주셨습니다"(에페 1,3.6: 공동 번역, 대한성서공회). "천상으로부터 온갖 영신적 강복으로써 그리스도 안에 우리를 강복하여 주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신 천주 찬미함을 받으실지어다"(서간 성서, 성분도수도원 역). "찬송하리로다 하나님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께서 그리스도 안에서 하늘에 속한 모든 신령한 복으로 우리에게 복 주시되"(개역 성경전서, 대한성서공회). "Benedictus Deus et Pater Domini nostri Iesu Christi, qui benedixit nos in omni benedictione spiritali in caelestibus in Christo"(Nova Vulgata Bibliorun Sacrorum, L.E.V.).

 

<비교 2> "그들이 음식을 먹을 때에 예수께서 빵을 들어 축복하시고 제자들에게 나누어 주시며 말씀하셨다"(마태 26,26: 공동 번역, 대한성서공회). "저들이 저녁 먹을 때에 예수 면병을 가지시고 축성하신 후 제자들에게 떼어 주시며 가라사대"(서간 성서, 성분도수도원 역). "저희가 먹을 때에 예수께서 떡을 가지사 축복하시고 떼어 제자들을 주시며 가라사대"(개역 성경전서, 대한성서공회). "Cenantibus autem eis, accepit Iesus panem et benedixit ac fregit deditque discipulis et ait"(Nova Vulgata Bibliorun Sacrorum, L.E.V.). "예수께서는 수난 전날 거룩하신 손에 빵을 드시고 하늘을 우러러 전능하신 아버지께 감사를 드리며 축복하시고 쪼개어 제자들에게 주시며 말씀하셨나이다." "Qui, pridie quam pateretur, accepit panem in sanctas ac venerabiles manus suas, et elevatis oculis in caelum ad te Deum Patrem suum omnipotentem, tibi gratias agens benedixit, fregit, deditque discipulis suis, dicens"(미사 통상문, 91항: 감사기도 제1양식).

 

일찍이 리델 주교님을 비롯한 파리 외방 전교회 선교사들이 펴냈던 [한불자뎐](韓佛字典, Dictionnaire Coreen-Francis)에는 '복'이라는 말과 '츅성하다'는 말만 나옵니다. 복(福): bonheur, prosperite, aisance, felicite, beatitude, chance, fortune. 츅성하다(祝聖): benir, indulgencier, consacrer, dedier. 그리고 [한어문전](韓語文典, Grammaire Coreenne)에는 '춍복을 밧다'(recevoir la benediction)는 말이 나옵니다. 이 '총복'이라는 말은 제2차 바티칸 공의회 때까지 성모송에서 써 왔습니다. "주 너와 한가지로 계시니, 여인 중에 너 총복을 받으시며, 네 복중에 나신 예수 또한 총복을 받으시도다." 현재의 성모송은 이렇습니다. "주님께서 함께 계시니 여인 중에 복되시며 태중의 아들 예수님 또한 복되시나이다"(Dominus tecum, benedicta tu in mulieribus, et benedictus fructus ventris tui, Iesus). 중국어(타이완, 홍콩)에서는 讚美, 讚頌, 祝頌, 頌謝, 福, 萬福, 祝福, 眞福, 祝禱, 祝聖, 降福, 賜福이라고 하는데, 주로 축복과 강복을 많이 쓴다고 합니다. 일본어에서는 讚美, 降福, 祝別, 聖別, 掩福, 祝福, 祝聖, 眞福, 福樂이라는 말들을 쓴답니다.

 

[미사 통상문]을 새로이 개정하면서 우리는 '축복'(祝福)이라는 말을 우리말 어법에 맞게 쓰자고 하여, 사람이 하느님께 복을 빌 때에만 '축복'을 쓰기로 하였습니다. 그러나 개정 과정에서는 상당한 논란이 있었습니다. 처음에 용어위원회에서는 본디 한문을 사용하는 중국 미사 경본 등의 용례에 따라, '축복'이라는 말을 '하느님께 복을 비는 것'과 '하느님께서 내려 주시는 복'이란 두 가지 뜻으로 함께 사용하기로 합의하였습니다(1991년 12월 2일 회의). 이 심의 결과는 주교회의 1992년 춘계 정기 총회에서 그대로 확정되고, '강복' 또한 '축복이나 복을 내려주다'는 뜻으로 '축복'과 병행하여 사용하기로 하였습니다. 그러나 전례위원회에서 마련한 [미사 통상문] 개정안에서는 '하느님께 복을 비는 것'만을 '축복'이라고 하였습니다. 우리말을 바로 쓰자, '祝'자가 빈다는 뜻인데 하느님께서 누구에게 빌 수 있겠느냐 하는 국어학자들의 의견이 강력하게 제기된 것입니다. 이러한 의견에 반대하는 주장의 요지는 대개 다음과 같았습니다.

 

'하느님의 축복'은 적합한 어휘다. 하느님께서 인간에게 복을 내려 주시는 일을 '강복'이라고도 하고 '축복'이라고도 한다. 과거에 가톨릭에서는 '강복'이란 단어를 사용하고 개신교에서는 '축복'이란 단어를 사용하여 왔다. 제2차 바티칸 공의회에서 일치 운동을 강조한 직후 1960년 중반에 가톨릭 공용어 심의위원회에서 일치 운동의 차원에서 '강복'과 '축복'을 혼용하기 시작하였다. '강복'은 복을 내리신다는 뜻이므로 그 때까지 '우리를 강복하소서' 하던 것을 '우리에게 강복하소서'로 '축복을 내리시어 길이 머물게 하소서'로 하였던 것이다. 말이란 어느 나라 말이든 시대의 흐름에 따라 뜻이 바뀌기 마련이다. 어원 그대로 남아 있으면서도 다른 뜻으로 사용되는 것이 아주 많다. "모든 것의 근원이신 하느님께서 누구에게 빌 수 있다고 '하느님의 축복'이란 말을 쓰느냐?" 하고 비난하는 사람도 있다. 그러나 국어 사전에서는 '축복'을 아래와 같이 풀이하고 있다. 1) 행복하기를 빎, 또는 비는 일, 2) 남의 복된 일을 기뻐하며 축하함, 3) 기독교에서 하느님이 신자에게 복이나 은혜를 내림을 이르는 말(주여, 축복하소서. / 깊은 믿음에 축복이 있으리라.), 4) 복, 행복(축복을 누리다). 그런데도 ① 만이 옳고 ② 와 ③ 과 ④ 는 틀렸다고 주장하는 것은 개인의 주장일 수는 있어도 대중의 언어 생활에서는 고립될 수밖에 없는 고집이다. '축복'은 이미 '복'과 '행복'이란 뜻으로 널리 사용되는 말마디로 변한 시대에 우리는 살고 있다. 국어 사전에서 '강복'이란 단어는 '가톨릭 용어'로 못박아 설명하고 있다. 일치 운동의 일환으로 개신교에서 널리 쓰고 있고 이미 한국 사회에서 '하느님의 축복'이란 말을 아무 저항 없이 쓰고 있는 것을 가톨릭이 그대로 받아들인 것이다. 중국말에서 온 단어들이 우리말이나 일본말에서 뜻이 변한 것은 무수히 많다. 일본 성경에도 루가 복음 1장 42절에 엘리사벳이 마리아에게 "여인 중에서 당신은 축복받은 분입니다." 하고 축복이란 단어를 하느님의 축복으로 사용하고 있다.

 

"하느님이 누구에게 빌 수 있단 말이냐?"란 주장도 교리를 모르고 하는 것이다. 성서를 보면, 예수님께서 승천하시면서 "우리를 위하여 성부께 빌어 주실 터이므로 무엇이든지 당신 이름으로 구하면 다 들어주실 것이다."(요한 15,16)라고 약속하셨고, 성령께서도 "깊이 탄식하시며 하느님께 간구해 주십니다."(로마 8,26) 하였다. 인류의 구원 사업은 삼위일체이신 성부 성자 성령께서 함께하시고 하느님의 은총은 성부에게서 성자를 통하여 성령 안에서 내려오는 것임을 모든 그리스도인이 믿고 있다. 하느님의 축복은 삼위일체 안에서 빌고 간구하시는 성자와 성령의 작용으로 주어지는 것이라는 기본 교리를 아는 신앙인이라면 "하느님이 누구에게 빌 수 있단 말이냐?" 하는 주장은 교리 무식의 소치임을 깨닫게 되리라. 신앙의 진리를 부족하게 아는 국어학자의 의견을 수렴할 때는 조심할 필요가 있다.

 

이런 이유에서 '축복'이란 말과 '기복'이란 말이 어원상으로는 똑같이 복을 빈다는 뜻이지만 '축복'은 좋은 뜻으로 쓰이고 '기복'이란 말은 나쁜 뜻으로 쓰이고 있다. '축복'은 하느님께서 원해서 주시는 복이고 '기복'은 사람이 현세적인 복만을 빈다는 뜻으로 사용되기 때문에 '하느님의 축복'은 성스러운 것으로 받아들이지만 '기복 신앙'은 배척받고 있는 것이다. 한두 분의 국어학자가 '하느님의 축복'을 말이 안 된다고 우겨대도 대중은 계속 '하느님의 축복'이란 말마디를 사용할 것이다.(이상은 가톨릭 신문 1991년 10월 20일자에 실린 당시 주교회의 의장 김남수 주교님의 글을 거의 그대로 옮긴 것입니다.)

 

복은 우리가 참으로 자주 쓰는 말이다. 그런데 복이 표현하는 내용은 현세적이고 물질적인 것이다. 그래서 우리 조상들은 이런 현세적이고 물질적인 복과 하느님이 내려 주시는 참된 복을 구별하기 위하여 진복(眞福)이라는 말을 쓰기도 하였다. 그리고 복이라는 단어가 지닌 이러한 의미 때문에 '하느님께 복을 빈다'는 의미의 축복(祝福)이 '하느님께서 내려 주시는 복'이라는 의미를 지닐 수 있도록 의미 변화를 일으키고 있는 것 같다.

 

물론 새 번역안을 내놓은 분들은 이러한 의미 변화를 수용하지 않고, 축복이라는 말은 '하느님께 복을 빈다.'는 뜻으로, 강복이라는 말은 '하느님께서 복을 내리신다.'는 뜻으로만 쓰려고 하고 있다. 그런데 강복이 '하느님께서 내려 주시는 복'이라는 의미보다는 '하느님께서 복을 내려 주심'을 뜻하기에 하느님께서 내려 주시는 복을 나타내는 명사로서 강복을 쓰기는 어려우니까 그냥 '복'이라고 쓴 것으로 보이는데 이 때문에 문제가 생기는 것이다. 동양권의 그리스도교에서는 하느님께서 내려 주시는 복이 단지 현세적이고 물질적인 것이 아니라는 것을 표현하기 위해 고심해 왔다. 그리고 그 해결책 중 하나가 축복의 의미 변화인 것이다. 일본의 미사 경본을 보면 '축복'이라는 단어의 의미 변화를 수용하여 '하느님께 복을 비는 것'과 '하느님께서 내리시는 복'을 모두 축복이라고 쓰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중국 미사 경본에서는 가능한 한 복이라는 단어를 피하고 있다. 그래서 하느님께 향하는 것, 즉 복을 비는 것을 '찬송'(讚頌)이라 하였고, 하느님께서 내려 주시는 복을 '천은'(天恩) 또는 '은택'(恩澤)이라 하였다. 그리고 강복이라는 말은 동사체나 복합 명사로 쓰일 때만 사용하고 있다. 그리고 축복이라는 말은 '基他祝福'(aliae beneditiones)라는 표현으로 한 곳에 사용되고 있다.

 

우리 나라 사전에서도 축복이 복을 비는 것이라는 의미뿐 아니라 "기독교에서 '하느님이 신자에게 복이나 은혜를 내림'을 이르는 말"이라고 쓰고 있다. 축복이라는 말이 의미 변화를 일으키고 있음을 보여 주는 예이다. 그런데 이러한 예는 이미 중국에서 1931년에 발간된 사전에서도 볼 수 있다. 즉 한영(漢英) 사전에서 축복을 'to bless'와 'to invoke a blessing'으로 표기하고 있는 것이다. 물론 이 사전은 장로교 계통의 선교사가 만든 것이지만 어떻든 의미 변화는 있었거나 적어도 시도되었던 것이다. 이렇게까지 애를 쓰면서 '복'이라는 단어를 직접 쓰기를 꺼려했던 이유는 복이라는 단어가 갖고 있는 현세적이고 물질적인 것만을 나타내는 특성 때문이고, 그것은 하느님께서 내려 주시는 복과는 거리가 멀기 때문이다. 그러나 새 번역안에 이 말이 너무나 쉽게 포함되어 있음을 보고 경악하지 않을 수 없다. 더구나 우리 나라 사람들은 무속적인 종교 심성이 강하다. 그래서 모두들 기복적인 신앙을 염려하고 있는 터에 너무나 쉽게 기복적으로 또는 무속적으로 흐를 수 있는 단어를 전례문 안에서 스스로 받아들여 사용한다면 혼합주의로 가는 다리 역할을 할 것이 틀림없다.(이상은 [사목] 제164호(1992년 9월)에 실린 윤민구 신부님의 "미사 통상문 새 번역안에 대한 소고" 가운데에서 관련 부분을 거의 그대로 옮긴 것입니다.)

 

위와 같은 반대 의견이 진지하게 논의되었음에도, 주교회의 1995년 춘계 정기 총회에서 미사 통상문 개정안이 확정되어, '하느님께 복을 비는 것'만을 '축복'이라고 하였으므로, 용어위원회도 당연히 주교회의 총회의 그러한 선택을 따릅니다. 이제 우리는 '축복'과 '강복'을 구분하여, '하느님께 복을 비는 것'만을 '축복'이라 하고 '하느님께서 내려 주시는 복'을 '강복'이라 합니다. 따라서 사제는 '축복'을 하고, 하느님께서 '강복하신다(복을 내려 주신다).'고 하여야 합니다. 또한 축복의 대상인 사물과 사람을 구분하지 않고 모두 '축복'이라고 합니다.

 

그러나 이러한 구분으로 '복'이나 '축복'에 관련된 용어 문제가 다 설명된 것은 아닙니다. 하느님께서 인간에게 복을 내려 주셨기에, 인간은 그 보답으로 모든 복의 원천이신 분께 찬양을 드릴 수 있습니다. 강복은 생명을 주는 하느님의 행위입니다. 생명의 원천이신 하느님의 강복은 말씀이며 베풂입니다. 사람 편에서 보면, 축복이란 감사하는 마음으로 창조주께 드리는 흠숭과 봉헌을 의미합니다. 태초부터 종말에 이르기까지 하느님께서 하시는 모든 일이 다 강복입니다. 하느님의 구원 계획이 곧 무한한 강복입니다([가톨릭 교회 교리서], 2545.1078-1079항 참조). 전례에서, 특히 성사와 준성사에서 이루어지는 사람과 사물에 대한 축성과 봉헌 그리고 온갖 축복에 관한 설명은 지면 때문에 다음으로 미룹니다.

 

[사목, 2001년 3월호, 강대인(한국천주교중앙협의회 행정실 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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