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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바로알기 / 날파리 신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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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종업 [rlawhddjq] 쪽지 캡슐

2020-10-25 ㅣ No.141671

성경바로알기 2020.10.25.

(공동번역성서)

날파리 신앙


곤충학자, 파브르에 의해면, 그의 날파리에 관한 연구라는 논문에 이런 글이 쓰여 있습니다. 날파리들은 맨 앞의 날파리를 무조건적으로 흉내 내고 따라 간다 무조건적으로. 그런데 그 맨 앞의 리더 날파리도 목적지가 없어요. 그냥 무조건 날아가는 거예요. 향방 없이! 그냥 목표도 없고 방향의식도 없이 막 날아가면, 그 뒤의 날파리들이, 역시 목표도 방향의식도 없이, 엉터리 리더의 몸짓과 날개 짓까지 흉내 내면서, 열심히 쫓아가는 거예요. 열심히! 겉으로 보면, 한 무리로 연합한 날파리 떼가, 어떤 목표지점을 향해서, 열심히 움직이는 것 같아 보이지만, 그들은 그냥 향방 없는 허깨비 열심! 가치 없는 열심을 부리고 있을 뿐이라는 거예요. 날파리들은, 그렇게 떼를 지어서, 한 리더를 쫓아 목표도 방향의식도 없이, 열심히 날개 짓 하다가, 7일 만에 다 땅에 떨어져 죽습니다. 모든 건 진리를 이야기하고 있어요. 정말 여러분 안에 진리를 갖지 못하고, 목표도 방향도 없이, 앞에서 이끄는 어떤 이를 쫓아서, 열심히 날개 짓을 하면서, 한 방향으로 몰려가다가는, 7의 때에 모두 땅에 떨어져 다 죽습니다.


히브리 사람들이 옛 성전을 새의 날개라고, ‘호 호러니스라고 부른다 말예요. 호 호러니스호로스라는 단어에서 나온 단어인데, ‘호러스는 산입니다. 그래서 거기에 관사가 붙어서, ‘그 산그러면 항상 성전을 가리켜요. 예루살렘 성전! 팔레스타인 땅이 평지인데, 딱 거기만 700 ~ 800m 이렇게 올라가 있거든요. 거기에 다가 성전을 지은 거예요. 그게 기둥 역할을 하는 언약(言約)이거든요. 기둥이라는 단어 자체가 언약이란 단어란 말예요. 히브리 사람들의 개념에서는! 그러니까 거기다가 언약의 성전을 세운 거예요. 그래서 그 산그러면, 거기예요. 내가 산을 향하여 눈을 들리라 나의 도움이 어디서 오나?’ 그 산! 그 성전! 이렇게 얘기하는 거거든요.

그 산, ‘호 호러스,’ 거기에서 호르니스, .’ 새의 날개라는 단어가 나오고, 그 단어에서, ‘호 우라노스하늘이라는 단어가 나왔어요. 그래서 이걸 다 성전으로 써요. 성전으로 읽는단 말예요. 그래서 이 사람들은 세 단어를, 같은 단어로도 써 버려요. 하늘! ! ! 이렇게 같이 쓴다 말이죠. 성막과 성전이 완성되면, 그 겉에다 크게 새의 날개를 그리라고 그래요. 율법에 보면. 그러기도 하지만 멀리서 보면 성전이 새의 형상으로 되어 있어요. 날아가는 현상으로. 그래서 성전 그러면 라고 부른단 말예요. ‘.’

그들은 율법이라는 옛 성전! 거기에 올라타서, 자기들이 그리고 있는, 그런 천국으로, 훨훨 날아갈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한 거죠. 그게 날개거든요. 그들을 실어 날라줄 날개라 그랬어요. 그런데 하느님은 아니라, 그 날개, 율법의 날개 아니고, 내 날개, 진리의 날개, 독수리 등 위에 업혀서 가야지 너희들은 율법의 날개에 퍼덕이면서 절대 하느님나라에 못 가!’ 그러는 거거든요.

 

(마태복음 6:25-27) 25 '그러므로 나는 분명히 말한다. 너희는 무엇을 먹고 마시며 살아갈까, 또 몸에는 무엇을 걸칠까 하고 걱정(염려)하지 말아라. 목숨이 음식보다 소중하지 않느냐? 또 몸이 옷보다 소중하지 않느냐? 26 공중의 새들을 보아라. 그것들은 씨를 뿌리거나 거두거나 곳간에 모아 들이지 않아도 하늘에 계신 너희의 아버지께서 먹여 주신다. 너희는 새보다 훨씬 귀하지 않느냐? 27 너희 가운데 누가 걱정한다고 목숨을 한 시간인들 더 늘일 수 있겠느냐?

25절에 걱정으로 시작해요. 가장 중요한 거예요. 이게. 메림나우, 걱정하지 마!그래요. 이 걱정이라는 단어는, ‘메리조, 이렇게 나누다, 분리하다.’라는 단어에서 나온 거예요. 그러니까 걱정이 뭐냐 하면? , 프쉬케가 갖고 있는 그 마음이, ‘두 마음사도들이 계속 지적하는 그 두 마음!’ , , 이것을 스스로 안에서 판단하여, 자기가 옳다고 판단하는 것을 열심히 행하고, 자기가 악하다고 하는 걸 안 하려고 애쓰는 그 마음이 두 마음이에요. 그걸 에피두미야라 하죠. 그걸 탐욕, 탐심이라고 바오로가 번역하기도 했는데!

프퀴케가 갖고 있는 그 두 마음, 그거 모든 것을 율법적 사고로 둘로 바라보게 된단 말예요. 그래서 그 둘로 바라보게 되면, 거기에서 나의 수고와 걱정이 생겨나는 거예요. 그걸 메림나우라 그래요. 그 걱정하지 말라는 거예요. 먹는 거, 마시는 거, 입는 거네요. 그건 다 하늘의 양식으로 먹고, 하늘의 생수로 마시고, ‘, 그리스도의 겉옷으로 입어야 하는 구원의 이야기예요. 그런데 율법적 사고, 그 두 마음으로 메림나조, 걱정하는 이들은 그걸 어떻게 해요? 하늘의 양식으로 우리를 먹이고, 하늘의 물로 우리에게 마시우게 하며, 그 지리의 말씀으로 입히는 거, 이거 다 복음 이야기를 하는 거거든요.

그런데 율법주의자들은 어떻게 했죠? ‘메림나조하는 이들은, 자기들이 그걸 만들어 먹어야 되고, 만들어 마셔야 되고, 만들어 입어야 돼요. 그래서 창세기에서도 무화과나무 잎사귀로 띠를, (치마가 아닙니다,) 부끄러움을 가리겠다고, 진리의 띠, 자기들 나름대로의 진리의 띠를 만들어 해 입는 거고, 자기들이 먹고, 자기들이 마셔서, 자기들을 살찌우고 해갈을 하려고 했단 말예요. 그래서 예수님이 오시더니, ‘내가 떡이야!’ 그리고 초막절에는 , 내가 생수야!’ 그런 거라니까. 그들이 엉뚱한 걸로 먹고, 마시고 입고 있었다는 거 아닙니까? 그 이야기하는 거예요. 그러면 그거 그들의 염려와 수고가 된다는 거예요. 그래서 주님이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네가 내게와! 내가 물 줄게, 생수 줄게, 내가 하늘의 양식 줄게, 내가 그 겉옷 줄게 넘겨줄게 너희에게! 이렇게 말씀하신 거란 말이죠.

그러면서 공중의 새를 봐!‘ 너희들의 그 율법적 열려와, 그 율법적 수고를 성전에서 하고 있잖아요? 그러니까 공중의 새를 봐!’ ‘보라라고 얘기한 게 엔 블랫보예요. ‘자세히 분멸해서 봐!’ ‘엔 블랫보.’ 야 그 공중의 새, 자세히 분별해서 한 번 봐!‘ ’호 피네이로스 호 우라노스거든요. 호 우라노스,‘ 우라노스가 단수로 쓰이고, 그 앞에 관사가 붙으면, 항상 성전을 이야기한다 그랬어요. 성전인데 어떤 성전인가 하면, 그 성전이 진짜 진의로 이해되어졌을 때, 그걸 하늘이라 그래요. ’호 우라노스그리고 그걸 마음에 가진 자들을 복수로 쓰면, ’하늘들이라 그래요. 그래서 우리를 하늘이라 부른다 말입니다. 그런데 그 앞에 호 페네이로스,’ 새가 붙어 있어요. 그 새! 그 성전의 그 새! 성전인데, 그걸 내용으로 갖고 있는데, 그걸 새로 표현하고 있는 그 옛 성전! 그거 한 번 봐! 너희들을 늘 수고하게 하고, 염려하게 하고 있는 그 율법, 그 성전을 봐. 공중의 그 새를 봐! 그런다고요. 이 새가 왜 성전이냐 하면, 이 새가 루가복음에는 까마귀로 나와요. 그 새가 어떤 새인지,

(루가복음 12;24) 24 저 까마귀들을 생각해 보아라. 그것들은 씨도 뿌리지 않고 거두어 들이지도 않는다. 그리고 곳간도 창고도 없다. 그러나 하느님께서는 그들을 먹여 주신다. 너희는 저 날짐승들보다 훨씬 더 귀하지 않느냐?

레위기 11장에 보면 까마귀는 부정한 새라 그래요. 그리고 정한 짐승은 되새김질하는 게 정한 짐승이죠. ? 먹을 것이 내 안에, 양식이, 진리가 내 안에 있어야, 그 안의 것을 되새김질하는 거죠. 그거 못하면 부정한 거라는 거예요. 진리가 밖에 있으면 부정한 거라니까요. 늘 법으로 지키게 돼요. 그건. 그래서 되새김질 하는 게 정()한 거란 말예요.

그런데 그 까마귀가 부정한 짐승이라고 나와요. 그런데 이 까마귀, ‘오제브라는 단어는 알아브라는 단어의 명사형이거든요. 그런데 알아브덮다라는 뜻이에요. ‘부끄러운 어떤 것을 덮다.’ 그게 장막을 치다, 덮다뭐죠? 성막! 성전을 의미하는 거란 말예요. 거기서 까마귀라는 단어가 나와요. 그래서 그 개념을 그대로 갖다가 주님이 지금 쓰고 계시는 거예요. , 까마귀 봐! 저 까마귀! 그 옛 성전! 덮고 있는 장막! 그거 봐!’ 그러는 거예요. ‘까마귀를 봐라!’

그래서 하느님께서 엘리야에게, 가뭄을 예고하시면서, ‘이제 내가 말을 주지 않으면, 너희들에게 가뭄이 올 건데, 절대 하늘에서 비 안 내릴 거다.’ 그래요. 비는 항상 은혜의 비예요. 그런데 하느님이 저주를 말씀하실 때는 하늘에서 말씀이 모래처럼 내린다, 그래요. 물이 없이. 그러니까 그 가뭄이라는 건, 하느님의 말씀이 없음이란 뜻이에요. ‘물이 없음이라는 게 아니라 하느님의 말씀이 없어 목마르다할 때의 그 가뭄 이야기하는 거예요. ‘가뭄이 올 거야라고 이야기하면서, 그 유대 땅이 어떤 곳인지를 엘리야를 통하여 보여주세요. 그림으로. 어떻게 보여주죠? 까마귀를 통하여 떡과 고기를 날라주게 해요. 떡과 고기는, 이스라엘이 광야에서 먹던 거죠? 그런데 예수님이 뭐라 그래요? 광야에서 그거 먹고 다 죽었다 그럽니다. 그걸 진리의 말씀으로 이해하지 못하고, 에너지 삼아 뭘 해 보겠다고 하면, 그걸 먹고 다 죽는 다는 뜻이에요. 그래서 마귀가 돌로 떡 만들어 먹어! 너 산돌이라며? 모퉁이돌이라며? 뜨인 돌이라며, 네가 떡으로 왔다며?’ 그래놓고 거기서 끝. 그러니까 떡을 만들어 먹고, 어떻게 하라는 거요? 배고픔을 해결하여 일하라는 거 아녜요? 그거 아니라는 거예요. 그래서 예수님이, ‘하느님의 입으로 나오는 말씀이지, 그거. 말씀. 그래야 살지. 그거 먹으면 죽지. 떡만 먹으며.’ 이런 거거든요.

그러니까 그 떡과 고기를, ‘엘리야라는 사람에게 갖다 줘서 먹게 해요. 까마귀가 뭐라 그랬어요? ‘덮음.’ 그러니까 장막! 까마귀가 주는 먹이는, 떡과 고기에 불과한데, 거기서 멈추면 안 된다고. 그거 먹으면 가뭄의 땅에서 기근에 죽는 거예요. 그래서 그릿시내에서 그걸 먹어라 그러고, 그릿 시내 물을 마시라 그래요.

그런데 그릿 시내의 그릿이, ‘가라트라는 단어인데, 창세기 15장에서, 하느님이 아브라함에게, ‘너 세 번째 제물 그거 준비해!’ 그러거든요. 세 번째 제물이 뭐냐 하면? 첫 번째 제물이, 이스라엘! 율법주의 하에서의 그 제물, 성전에서 드렸던 제물! 두 번째가 예수라는 제물! 세 번째는 그리스도와 연합한 !’ 하느님께 드려지는 거든요. 그걸 세 번째 성전이라 그러잖아요, 옛 성전이 첫 번째 성전이고, 이 말하는 성전으로 오신 분이 예수님이고, 그 그리스도가 내게 들어와서, 내 안에 성령으로 계실 때, 그걸 바오로가 너희들이 성전이잖아?’ 그러잖아요. 고게 세 번째거든요. 당연히 아브라함이 못 알아먹죠. 아직 진리가 안 됐으니까. 제물을 3년 된 것들을 갖다놓고, 쫙 쪼개버렸어. 그게 인간들의 마음이에요. ‘에피두미야라는 두 마음, , 악에서 나오는, 모든 것을 둘로 갈라놓는 그 열심! 그걸 바탈’ ‘쪼개다, 쪼개놓았다그래요. 그가! 그 때 하느님이 건너가 버리시죠. 같이 있다가. 그건 뭐요? 그 제물로 그 제물을 사이에 두고 너와 내가 분리가 됐다는 뜻이에요. 네가 나에게 그 제물을 갖고 온다면, 나는 너와 같은 쪽에 서 있을 수가 없어. 네가 이제 나에게 넘어와야 되는데, 그건 내 언약으로 넘어오는 거지. 그래서 하느님이 홀로 넘어가신 거예요. 언약으로 넘어오는 거지. 네가 그렇게 쪼개고, 네가 준비한 열심, 제물에 의해 너는 나와 하나 될 수 없어. 그러고 쫙 갈라섰을 때, ‘카라트라고 한다고 그랬죠? 래서 그 분리,’ 거기에서 케리투투라는 단어가 나왔고, 그걸 모세의 이혼 증서라고 할 때, 거기서 쓰는 거예요. 그래서 이혼은, 하느님과 우리와의 이혼을 이야기하는 거지, 단순히 살다가 이혼하고, 그런 거 하지 마! 이런 말이 아니란 말예요.

그러니까 그 카라트,’ 이제 이스라엘과 이방이, 그릿 시내, 그걸 또 요르단 앞이라 그래요. 요르단의 역할을 하는 그게. 가나안 땅과 광야가 갈리는 거예요. 거기서. 그런데 어디가 광야가 되냐 하면, 말이 없는 곳이 되냐 하면? 유대가 말이 없는 곳이 되어버려요. 음식도 떨어지고, 물도 없는 곳! 고작해야 까마귀가 내놓는 떡과 고기만 먹는 그런 곳이, 이스라엘이다 그래요. 그래놓고 카라트, 그릿을 건너가 버리네. 그랬더니 거기에 그 가뭄 중에, 어떤 과부가 기다리고 있어요. 과부는 뭐죠? 자칼이라는 그리스도를 이 땅에서 기다리기에, 이 땅의 남편들을 모두 차압당하고, 빼앗기고, 혼자 과부로 기다리는 거예요. 뭐를? 그 도움을 기다리는 거죠.

그 집에 그 여자가 어떤 상태로 있었느냐 하면, ‘나는 죽어 마땅한 자입니다. 아니 이제 죽습니다. 호밀 가루 한 주먹 먹으면 죽습니다. 난 아무것도 아닌 자입니다. 나는 죽은 자입니다.’라고 자인식을 하고 있는 그 여자! ‘누군가 날 도와주지 않으면 난 죽습니다.’라고 하는 그 여자에게, 이이가 가서 그 집을 풍년을 만들어 주는 거요. 풍년! 거기에만 진짜 음식! 진짜 기름! 말씀! 이게 끊이지 않아요.


(열왕기상 17:1-7) 1 길르앗의 티스베에 살고 있던 티스베 사람 엘리야가 아합왕에게 말하였다. '내가 섬기는 이스라엘의 하느님 야훼께서 살아 계심을 두고 맹세합니다. 내가 다시 입을 열기 전에는 앞으로 몇 해 동안 비는 물론 이슬도 한 방울 이 땅에 내리지 않을 것이오.' 2 야훼의 말씀이 엘리야에게 내렸다. 3 '이 곳을 떠나 동쪽으로 가서 요르단강 동편에 있는 그릿 개울에서 숨어 지내며 4 개울물을 마셔라. 음식은 까마귀들을 시켜 날라다 주도록 하리라.' 5 엘리야는 야훼의 말씀을 따라 요르단강 동편에 있는 그릿 개울로 가서 살았다. 6 까마귀들이 아침 저녁으로 떡과 고기를 날라다 주었다. 그는 계곡의 물을 마셨다. 7 그렇게 얼마를 지내는데 개울의 물마저 말라 버렸다. 온 땅에 비가 전혀 내리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보세요. 이건 시내가 마르는 일이라니까요. 그리고 건너가요. 건너가서 어떤 집을 만나나 보세요.

(열왕기상 17:16) 16 엘리야가 전한 야훼의 말씀 그대로 뒤주에는 밀가루가 떨어지지 않았고 병의 기름도 동이 나지 않았다.

이것이! 끊어지지 않는 양식! 영생이에요 그 이야기하는 거요. 그게 까마귀, 성전, 율법, 그 이야기하는 거란 말입니다. 주님이 공중의 새를 보라? 그거 보라는 거예요. 그러니 여러분이 이 구절들은 인용하면서, ‘! 엘리야에게 까마귀가 떡과 고기를 갖다 줬단다. 하느님이 까마귀를 시켜서 우리에게 먹을 것을 갖다 주실 거야!’ 그런 말 하지 말란 말예요. 그런 말이 아니라니까요.

주님이 그 하늘의 새를 자세히, 분별하여 봐그것이 뭘 얘기하는 건지! 내가 너희에게 거기에서 그런 열심 그런 도륙(屠戮), 도살(屠殺) 열심히 하란 거야? ‘자세히 좀 분별해서 봐!’ 그러는 거요. 그래놓고는 그렇게 자세히 분별해 본 사람들은 그 새가, 공중의 새가 심지도 거두지도 아니하고이렇게 되어 있는데, 원문은 그렇게 되어 있는데, ‘심지도 못하고, 추수도 못하고, 창고에 양식을 쌓지도 못하는 것임을 안다.’ 그래요. 걔는 심지도 않고 추수도 안하고 게으른데, 하느님이 거저 먹이신다. 이게 아니라, 그 율법, 그 새는 오직 우리 주님만이 씨 심는 죽음을 죽으러 오신 분이시기 때문에, 그 율법, 그 옛 성전, 그 새는, 절대로 씨를 심을 주가 없어, 율법은! 그러니까 당연히 추수도 할 수도 없고! 추수가 안 된다는 건, 아무리 그 율법적 신앙을 가져 봐야, 하느님이 기뻐하시는 알곡이 못 된다는 얘기예요. 그러니까 당연히 그 성전에, 진짜 양식을 쌓을 수가 없지 그 얘기하는 거예요. 그런데 어떻게 한다, 그래요?

하느님이 먹이신다. 기르신다그 단어 트래포실컷 먹이다, 은혜를 베풀다, 자비를 베푸다.’ 이런 뜻이에요. 은혜지. 은혜. 그렇게 너희들이 율법적 열심으로 수고하고 애써서, 먹을 거, 입을 거, 마실 거 준비한다고 해서 하느님이 그거 안 기뻐하셔. 그건 하느님과 원수 되는 거라니까. 하느님이 절대 안 기뻐한다고 그래 그거. 그러면서 새를 봐! 아니 저게 뭘 심니? 그럼 심지도 못하는데 거기서 뭘 거두어? 하느님이 트래포, 자비로 먹여야지. 그게 뭔지를 진리로 하느님이 너희들에게 먹여주면, 그 때 너희가 먹고, 마시고, 입는 거야. 이 얘기하는 거예요.

 

잘 생각해 보세요 聖化가 하느님과 聯合되는 거라니까요. 너희들이 아무리 그 율법이라는 성전, 그걸 올라타고 그 율법의 날개를 퍼덕이면서 아무리 날아봐야, 너희들은 향방 없는 리더 따라 움직이다가 7일 만에, 7의 때에 완전히 멸망하게 되는 날파리 인생일 뿐이야. 그러니까 정신 차려. 공중의 새를 좀 봐! 저게 날아가는 새니? 내가 업어 나르고 있잖아? 내가! 자비로 먹이잖아? 그러니까 잘 구별해! 그러는 거예요. 따라서 성도는 반드시 목적지 확인을 먼저 해야 되는 거예요. 그 목적지가, 피조물의 자리! 하느님 흉내 내겠다고, 내가 삶의 주체가 되어서, 선 악 판단의 주체가 되어서 살던, 그 자리에서 내려와, 피조물의 자리, 하느님으로부터 생명력을 거저 부여받아, 그 분에 의해 움직여지는 그 자리로 내려가는 게, 우리의 목적지여야 돼요. 그리로 날아가신다니까요. 우리를 등에 업고! 독수리가! 애굽에서 가나안으로 실어 나르는 거예요.


(고린도전서 9:26) 26 그러므로 나는 달음질을 하되 목표없이 달리지 않고 권투를 하되 허공을 치지 않습니다.

달음질하는데 향방 없이 아무데나 달리면, 간 만큼 제자리로 돌아와야 돼요. 바오로는 향방을 알았다는 거예요. 하느님이 독수리 날개에 실어서 어디로 데리고 갔습니까? ‘날마다 죽노라의 향방으로 끌고 갔다니까요. ‘날마다 죽노라, 다나토스!’ 매일 매일 그 육의 죽음 아래에 있게 만들었다는 뜻이에요. 그 목적지 다나토스죽음의 자리! 그 자리가 우리의 목적지예요.

(로마 8:5) 5 육체를 따라 사는 사람들은 육체적인 것에 마음을 쓰고 성령을 따라 사는 사람들은 영적인 것에 마음을 씁니다.

육신을 따르는 자는 육신의 일을 생각하고, 영을 따르는 자는 영의 일을 생각한다. 영의 일을 생각한다는 게 뭐예요? 그 밑에 육신의 생각은 사망이요. 그 영적인 생각은 뭐고, 그 영의 일은 도대체 뭐냐고요? 육신을 쫓아서, 열심히 율법의 날개 짓으로 퍼덕이는 자는, 그건 육신의 일일 뿐이라는 거예요. 너희들이 아무리 그 육을 갖고, 열심을 부려서 그 염려와 수고로 해 내는 모든 일이, 너희들은 이거 하면 하느님이 기뻐하시겠지 하고 내놓지만, 그건 그냥 육의 일이이야! 그리고 영을 따르는 자는, 진리를 쫓는 자는, 프뉴마의 일을 생각한다. 이게 경향이에요. 경향! 방향성! 진리를 쫓는 자는 그 진리의 방향성 아래에 끌려가게 되는 거예요.

우리는 육이 죽는 날까지, 그 육의 생각, 육의 방향성이에요. 그것도. 그 육의 방향성에서 자유롭지 못하죠? 그런데 그 육의 방향성! 거기에서 자유롭지 못하지만, 그것이 아니라는 걸, 진리의 말씀이, 저 설교자를 통하여, 또 내 안에서 계속 외쳐주네. 그러면 그걸로 어떻게 되죠? ‘난 아니구나!’라고, ‘다나토스로 죽여 낸다는 거예요. 그게 뭐냐 하면? 육의 생각, 그 방향성이 다나토스, 사망이다. 그리고 여기서 이 다나토스가 남성 단수란 말이에요. 그 육의 경향성, 그 방향성, 적어도 성도에게 있어서 그 육의 방향성이 진리의 깨달음을 통하여, ‘, 나에게는 어떠한 이의, 다나토스의 죽음이 없었으면, 안 될 뻔 했구나를 깨닫게 해주는 거죠.

그래서 육의 경향성은, 바로 다나토스로 나를 데려간다는 거예요. 그 예수의 다나토스의 죽음을 깨닫게 하여, 다나토스는 나의 다나토스가 되네. 그러면 그게 바로 영()의 경향성이 되는 거예요. 그 죽음이! 그러면 그걸 생명이라고 하고, 그걸 평화라 그래요. 성경이. 이제는 내가 해야 할 것이 없어졌다는 걸 알기 때문에, 그 때 비로소 평안이 되는 거요. 하느님과 한 멍에를 지고 한 방향으로 가게 되는 게 에이레네이거든요. 이제 드디어 그 분과 어깨동무하고, ‘거봐, 수고하고 무거운 짐진자들 다 이리로 오라 그랬잖아? 그리고 내 멍에를 메라 그랬잖아? 내가 메고 있으니까! 너는 거저 갈 수 있다니까.’ 이 얘기란 말예요. 은혜로! 그래서 그게 생명이고, 평화란 말입니다. 그러니까 다나토스의 죽음, 곧 우리에게 생명이에요.

그래서 창세기의 선악과나무, 생명나무. 이 두 나무 이야기가 나오면서, 나무는 정작 단수로 쓰여 있는 거예요. 그걸 그 선악과나무! 그걸 통하여 네가 그 선악과나무가 뭔지를 알게 되면, 그게 생명이야. 이렇게 얘기하시는 거예요. 그런데 그걸 알기 전까지는 감추어져 있죠. 생명이 모르는 곳에 감추어 놓았다 그러는 거예요. 조거 절대 먹으면 안 돼!’ 이래서가 아니라, 나무가 하나 밖에 없는데, 그걸 선악과로만 계속 보면, 율법으로만 계속 보면, 거기선 생명을 못 얻는 거예요. 그걸로 그냥 죽는 거예요. 그 죄로. 그런데 그걸로 이게 뭔지를 알았으면, 감추어져 있던 생명이 열리는 거라니깐요. 그게! ? 그 생명은 하늘의 것이기 때문에, 이 땅의 어떤 걸로도 설명할 수가 없어요.

이 땅에 가장 흔한 거, . 인간의 그 에피뚜미야의 그 마음. 그 마음을 그리로 쏘는 게 율법이잖아요. 그래서 율법이 없을 땐, 그 양심이 율법이다 그런 거란 말예요. 그러니까 그걸 통하여 생명이 뭔 줄 알고, 그 생명이 뭔 줄 알았으면 그 죽음이 곧 생명이다. 그 죽음이 곧 평안이다. ‘평화다. 이렇게 설명하는 거란 말입니다. 그걸 예수님이 이렇게 설명하십니다.

(요한복음 11:25-27) 25 예수께서는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사람은 죽더라도 살겠고 26 또 살아서 믿는 사람은 영원히 죽지 않을 것이다. 너는 이것을 믿느냐?' 하고 물으셨다. 마르타는 27 ', 주님, 주님께서는 이 세상에 오시기로 약속된 그리스도이시며 하느님의 아드님이신 것을 믿습니다' 하고 대답하였다.

여기서 라는 개념을 잘 이해해야 되는데, 나중에 요한복음에 그 14, 15, 16, 17장을 잘 공부해 보면 그 라는 새로운 개념이 거기서 등장해요. .’ 거기서의 는 그리스도와 연합된 세 번째 성전으로서의 예요. 그러면 가 돼요. 그리스도가 내 안에 들어와서 비로소 생명이 되죠. 우리는 살아나죠. 그 전에는 죽은 자입니다. 그러면 그분이 들어와서 내가 생명이 된다면, ‘는 부정되는 거네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분이 나를 품어 안고 연합하여, 그걸 라고 말씀해주세요. ‘에고 에이미에고, 나를 말씀해주신다니깐요. !’ 그러면 나는 죽은 거네. ‘다나토스로 부정된 거네. 말씀이 완성되어서. 그러니까 그 로 믿게 되면, 가 뭐예요? 그게 부활이고 그게 생명이야. 로 믿으면. 너희가 그 가 되어 그 로 믿으면, 믿음 안에 있게 되면, 그게 부활이야. 그게 산 거야. 죽었다가 산 거니까요.

그런데 그게 살았다는 걸 인정하기 위해서는, 그럼 여태까지 살아 있는 나는 산 거 아니었네!’? 그게 죽음이잖아요? 그러니까 죽은 게 산 거야라고 이야기하는 거예요. 그래서 고 밑에서 뭐라고 하느냐 하면, 그렇게 나를 믿는 자는, 그게 부활이며 생명이라는 것을 아는 자는, ‘죽어서 사는 거야그러는 거예요. 죽어도 살겠고가 아니라, ‘죽어서 살겠고예요. 죽어서 살겠고! 그렇게 해서 이제 살아났어요. 산 자로! 나로 믿는 자는! 그가 이제 영원히 안 죽는 거야. 이렇게 이야기하는 거예요. 그래야 이제 영원히 안 죽는 거야 그러니까 여러분은 이제 영생을 사는 거예요. 영생은 오래 오래 사는 게 아니라니깐요. 지옥에서도 오래 오래 살아요. 거기서도 안 죽어요. 그러니까 여러분은, 지금 이 땅에서, 여러분이 그 성경을 살아야 돼요. 안 그러면, 그냥 이건 나와 아무런 관계가 없는 책이라니까요.

거기에서, ‘죽어서 살겠고에 쓰인 단어가 아포드네스코거든요. 이건 다나토스의 강조형이에요. 그러니까 완전히 죽어야 산다.’ 이런 뜻에요. 내 육이 완전히 부정되면 뭐 무기력해지고 막 산다는 뜻이 아닙니다. 그게 아니라, 그 하느님의 그 권능과 능력 앞에서, 내가 할 말을 잃어버리는 거예요. 그걸 완전히 죽는다고 하는 거예요. 그걸 곡해해서, 자꾸 그냥 막 살아도 되겠네. 이런 말들을 하는데, 어디 그런 말을 함부로 해요? 아니라니까요. 이 세상을 우가리 사람으로서 살아야, 살아 있어야, 그래야 그 진리를 배울 거 아녜요? 그런데 그 사람으로서 세상을 살기 위해서, 우리가 해야 할 인지상정으로서의 도덕윤리나 사회법은, 당연히 해야죠. 남들보다 더 성실하게 잘 해야죠.

그런데 그걸 신앙생활이라고, 그냥 거기서 결론내리고. 그 위에 더 큰 게 있는데. 그걸 말해주지 않으면 그게 거짓말이란 말예요. 성경이 말하는 거짓! 그런데 그걸 이야기해 줄 수 없으니까, 그냥 전부 아래 것으로만 이거 열심히 해! 이거 하지 마! 이거는 해야 돼! 고것만 계속 가르쳐주는 거예요. 그것만! 아니 마치, 우리가 아 하느님이 이미, 예수님이 하느님께 제물로, 완전히 드려졌는데, 헌금이 왜 필요해? 사실은 여러분이 헌금 안 해도, 하느님이 뭐라 안 그래요. 그러나 필요에 의해서 우리가 하잖아요? 마찬가지예요. 도덕과 윤리는, 그렇게 우리가 세상에서 배워야 할 것이 있고, 깨달아야 할 것이 있기 때문에, 당연히 우리가 거기에 맞는 어떤 것을 내어주면서, 같이 가야 돼요. 그렇게 이해하시면서 열심히 하시면 되는 겁니다. 그러나 그걸 유치하게 신앙의 목적지다. 이렇지 말라는 그런 얘기죠.


(야고보서 1:15) 15 욕심이 잉태하면 죄를 낳고 죄가 자라면(長成) 죽음을 가져 옵니다.

욕심이 에피뚜미야예요. 여기서! ‘두오, 희생제사를 드리려고 하는 그 마음, 그게 뭐죠? ‘아 하느님이 십자가에서 다 해결했다는데,’ 그래도 뭔가 불안해. 그래서 내가 자꾸 뭘 하고 싶어. 회개도 해야 되고, 반성도 해야 되고, 그래서 고해성사도 자주해야하고, 봉사도 해야 되고, 헌금도 너무 많이 해야 되고. 그래야 좀 마음이 편해! 요게 에피뚜미야예요. 고 마음. 두 마음. 불안한 인간의 마음. 고걸 탐심이라 그래요. 그런데 고 두 마음이 잉태 한다, 그러죠? 손뼉을 치다, , 두 마음이 작용하여 짝, 어떤 일을 하게 되면, 죄를 낳아버린다, 생산해 낸대요. 거기서 죄가 나오는 거예요. 죄는 그것 밖에 없어요. 성경이 하는 죄는! 그래서 용서()하심을 얻을 죄, 용서하심 받지 못하는 죄, 나누잖아요? 죄는 다 죄지 뭐 용서하심을 얻을 수 있는 죄, 용서하심을 얻을 수 없는 죄가 어디 있어요? 그러니까 우리가 생각하는 그런 종류의 죄? ‘, 그거는 예수님이 다 용서해주러 왔잖아? 그런데 너희들이 끝까지 하느님 자리에서 하느님 흉내 내면, 그건 용서함을 못 얻는 죄지!’ 그 얘기하는 거란 말입니다.

그런데 그렇게 죄가 생산되어, 이제 죄가 어떤 일을 막 하기 시작해요. 그래서 그 죄가 어떤 것을 완성해 내요. 그게 완전히, ‘아프텔레요어떤 것을 성취하여 끝내버리면, 거기서 다나토스, 사망이 온다, 그래요. ? 죄가 우리성도에게 와서 하는 일이 ()’를 깨닫게 해주기 위함이라면서요? 그러니까 그 죄가 그 일을 완성시켜 놓으면 , 그렇제 예수의 그 죽음이 없었으면, 난 큰 일날뻔 한 거구나!’ 그게 다나토스의 죽임이잖아요? 그래서 그러는 거예요. 욕심이, ‘에피뚜미야가 일을 하면, 죄가 딕토하게 되고, 죄가 열심히 일을 해서, 그 일을 완성해 내면, 우리에게 드디어 그 사망이 오는 거야! 그런데 그걸 그게 생명이야!’ 그래요. 그런데 죽음이 나쁜 게 아녜요. 성경에서는!

(로마서 14:7) 7 우리들 가운데는 자기 자신을 위해서 사는 사람도 없고 자기 자신을 위해서 죽는 사람도 없습니다.

여기서 자기 자신을 위하여가 아니라, ‘자기 안에서예요. ‘우리 가운데에라고 한 건 이미 바오로를 포함한 성도, 교회를 이야기하는 거죠. 자 우리, 교회는 그 누구도, 자기 안에서 산다고 하는 자도 없고, 그러니까 지금 자기를 완전히 부인 당하는 거예요. 자기 안에서 죽는 자도 없다. 그래요. ‘라는, 예수님과 하느님과 아무 관계없이, 그리스도와 관계없이, 살고 죽는다는 그 개념도 우리는 내가 챙겨 가질 수 없다니까요. 성도는. 아무도 자기 안에서 죽을 수도 없고, 자기 안에서 살 수도 없대요. 그리고 우리가 살아도, 주님 안에서 살고, 죽어도, 주님 안에서 죽는대요. 그걸 위해, 예수님이 다나토스로 죽고 살아났대요. 그러면 그 죽음 안에서 우리가 죽었다는 거 아닙니까?

보세요. 로마서14,9절에서 죽으셨다가 다시 살아 나셨습니다.” 그러잖아요? 그러면서 어떻게 그 일로 인하여 어떤 일이 방생한다고 말하느냐 하면, “죽은 자의 주님도 되시고 산 자의 주님도 되시기 위해서 죽으셨다가 다시 살아 나셨습니다. ”하면서, 여기서는 네크로스라는 단어를 써 버려요. 진짜 죽은 자! 그 안에서 그렇게 죽어서 산 자가 아니면, 자기 스스로 살겠다고, 율법의 날개를 타고서 열심히 퍼덕이면, 그 놈이 죽은 자라는 거예요. 그래서 그분의 십자가, 그리고 부활이 기준점이 되어서, 여기에, 이 안에서 죽었다가 산 자, ‘다나토스로 죽고, 거기서 다시 살아난 그 자는, 심판과 무관한 자가 되지만, 산 자가 되어서! 그러나 이 것과 무관하게, 계속 뭔가가 불안해서, 계속 희생제사를 드리려고 하고, 계속 어떤 행위를 의지하는 그런 이들은, 죽은 자로 심판 받는다. 그래서, 여기서는 굳이 네크로스라고 쓴다 말예요. 그는 반드시 심판 받는다!

그렇게 우리는 육의 자아를 부정당해야 되는 거지, 말씀을 에너지 삼아, 떡 삼아, 육의 자아를 계발하고 성숙시켜서, 하느님이 기뻐하시는 자로 만들어져 가는 게 아녜요. 그건 하느님이 창세전에 완성하셨어요. 그런데 이렇게 말하면 뭔가가 불안해서, 왜냐하면, 그 안에 그 진리가 없네, 그 은혜가 없으니, ‘, 그래도 그렇게 말하면 안 되죠.’ 자꾸 이래요. 저에게! 그럼 뭐 어떻게 이야기하라는 거예요? 그렇게 다나토스의 죽음을 죽지 않고, 우리가 우리의 열심과 노력으로, 생명을 한 번 만들어 보겠다. 그게 바로 바벨탑이었잖아요? 혼란스러운 비진리의 말씀. 바벨이라는 단어가 그 뜻이니까. 그걸 갖고 우리 힘써서 하늘에 올라가자, 흙벽돌 쌓아서. 그게 흙의 일이라니까요. 그렇게는 못 올라간다니까요. 그걸 주님이 그게 죽은 자의 부활이야!’ 그래요. 죽은 자의 부활은 심판 받으려고 살아나는 부활! 아니 더 정확히 말하면 그들이 만들어낸 생명! ‘, 이렇게 해서 우리는 산 거야! , 이제 좀 안전해. 남들보다 훨씬 더 열심을 부렸고, 이런 나를 하느님이 칭찬하실 거야. 이게 생명이지!’ 라는 건 심판의 부활이라는 거예요. 그것이.

그렇게 죽은 자들의 부활(復活), 여전히 자기가 주인공이에요. 그래서 그 나라에 가서도, ‘내가 뭘 누리면서 살 수 있을까를 기대한다니까요. 그러니까 뻔뻔스럽게, ‘이 정도면 됐잖아요?’ 이렇게 아는 거예요. 염소들이! 아니 나도 노력 좀 했는데. 그러면서 항상 맞장을 뜨려고 한다니까요. 거기서. 그러나 면목 없으면, ‘아 이런데도 어떻게 나를 이렇게 사랑해주세요? 아 예루살렘에 이렇게 흰 여자들이 많은데, 이런 검둥이 술람미 노예를 왜 이렇게 사랑해주세요?’ 이렇게 되는 거예요. 그래야 거기가 천국이죠.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렇게 나를 사랑해 주는 이가, 나를 꼭 붙들고, ‘넌 나만 따라와! 너는 내가 지켜줄게 끝까지!’ 그런데 그 분이 최고의 힘을 갖고 있는 분이네. 그러면 거기가 천국이지. 그러면 들에서 자면 어떻고, 들에서 자면 야영이야. 어디 가서 뭘 먹어도 소풍이 되고, 다 그러는 거지. 아무리 좋은 차, 좋은 옷, 좋은 그런 집에 살아도, 그냥 맨날 시어머니, 시누이랑 쫓아다니면서, 그거 얻어먹으면서 다닌 이게 천국이겠어요? 아무리 좋은 걸 먹어도, 맨날 체해서 소화제나 먹고 그러지.

그러니까 우리는, 그 하느님이 누구인지를 알아 드리는 걸 사랑한다, 나에게 뭘 해 주셨는지! 그러면 나를 먼저 알아야 되고, 그 나를 그 ,’ 이게 다나토스의 죽임이라니까요. ‘그래 그 분이 아니었으면 나는 먼지지 뭐!’ 이거. 그걸 알면 그걸 살았다고 한단 말예요 하느님이. 그런데 엉뚱하게, 자기들이 생명을 마치 창조할 수 있는 것처럼, 이게 영생이지, 이 영생에 내가 기여를 할 수 있지. 그게 죽은 자들의 부활이다. 너희들은 반드시 심판받을 거야. 그러는 거예요.


(마태복음 22:23-32) 23 그 날 부활이 없다고 주장하는 사두가이파 사람들이 예수께 와서 물었다. 24 '선생님, 모세가 정해 준 법에는 '어떤 사람이 자녀가 없이 죽으면 그 동생이 형수와 결혼하여 자식을 낳아 형의 대를 이어야 한다' 고 하였습니다. 25 그런데 우리 이웃에 칠 형제가 살고 있었습니다. 첫째가 결혼을 하고 살다가 자식 없이 죽어서 그 동생이 형수와 살게 되었는데 26 둘째도, 셋째도 그렇게 하여 일곱째까지 다 그렇게 하였습니다. 27 그들이 다 죽은 뒤에 그 여자도 죽었습니다. 28 칠 형제가 모두 그 여자와 살았으니 부활 때에 그 여자는 누구의아내가 되겠습니까?' 29 예수께서 이렇게 대답하셨다. '너희는 성서도 모르고 하느님의 권능도 모르니까 그런 잘못된 생각을 하는 것이다. 30 부활한 다음에는 장가드는 일도, 시집가는 일도 없이 하늘에 있는 천사들처럼 된다. 31 죽은 사람의 부활에 관하여 하느님께서 너희에게 하신 말씀을 아직 읽어 본 일이 없느냐? 32 '나는 아브라함의 하느님이요, 이사악의 하느님이요, 야곱의 하느님이다' 라고 하시지 않았느냐? 이 말씀은 하느님께서 죽은 이들의 하느님이 아니라 살아 있는 이들의 하느님이라는 뜻이다.'

너희 같이 율법에 묶여서, 여전히 그 하늘에서도 중심으로 살려고 하는 자들은, 죽은 자, ‘네크로스예요. 여기서. 그 하나님이 아니라, 이미 죽었지만, 세상에서는 죽었지만, 아브라함, 이사악, 야곱 이들은 다나토스의 죽음을 죽었기에, 그들은 산 자거든. ‘나는 그들의 하느님이다.’ 하느님이 말씀하셨다는 거요. 너희들은 시퍼렇게 살아 있어. 숨도 쉬고 있는데, 너희들이 죽은 자야! 거기에는 장가 안 가고 시집 안 가. ? 장가, 시집이라는 게, 그리스도인 남편과, 신부인 교회의 이야기인데, 그걸 설명해 주기 위해 모형으로 준 건데, 거기 가서도 시집 장가 이야기하고 있냐? 이미 거기는 그리스도인 남편과, 자칼인 남편과, 네케바인 교회! 여자가 연합되어 완성되어 있는 곳인데, 무슨 장가 시집을 또 가냐? 그래서 예수님이 비유를 말씀하실 때마다 그러는 거예요. 잔치에 초청을 하는, 초청을 했을 때, 안 오는 놈들이 전부 먹고, 입고, 마시고 시집가고 장가가느라 안 와요. 이게 다 뭡니까? 이 땅에서 말씀을 율법으로 곡해하여, 인간들이 행하고 있는 그것들이잖아요? 이미 하느님나라에선 완성되어 있는 거라는데, 그러니까 율법주의는 하느님의 초청을 절대로 받아들일 수가 없다는 거예요. 다 그 얘기예요. 소도 사야하고. 소를, 하느님을, 진리를 어떻게 사냐고? 밭도 갈아야 하고. 광야, 교회예요. 그게. 그거 운영하느라 또 못 오네.

우리는 죽어서 사는 거예요. 그러기 위해서는, 반드시 우리의 자존심이 좀 상하는 그런 경험들을 그 과정에서 통과해야 합니다. 히브리서 기자도, 죽은 자의 부활에 관해서 이렇게 경고를 합니다.

(히브리서 6:1-2) 1 그러므로 우리는 그리스도교의 초보적 교리를 넘어서서 성숙한 경지로 나아갑시다. 이제 와서 죽음에 이르는 행실을 버리고 돌아 서는 일과 하느님을 믿는 일과 2 세례와 안수, 그리고 죽은 자들의 부활과 영원한 심판과 같은 기초적인 교리를 다시 배우는 일은 없도록 합시다.

이거 좋은 거 아닙니까? 지켜야 되는 거 아녜요? 그런데 버려라 그래요. 센드 어웨이(Send Away!) 멀리 보내버려라 죽은 행실, 회개함이 첫 번째예요. 아니 죽은 행실, 회개하는 거 칭찬을 받을 일이 아녜요? 그래서 맨날 통회 자복하잖아요? 새벽마다 와서. 어제는 이런 일 했고요. 일주일 동안 하느님의 뜻을 따르지 못하고, 이러이러해서 우리 회개합니다. 용서해주십시오. 다음에는 나가서 더 잘하게. 뭐 이런다고. 그거 잘하는 거 아녜요? 늘 우리가 하는 거고. 그런데 버리래요. 멀리 보내버리래요. ‘메타노이아, 회개는 어떤 것을 반성하고, 단순히 뉘우치는 차원의 그런 개념이 아니라, ‘메타노이아는 어떤 것을 다른 차원의 것으로 보아, ‘, 이거 아니었구나!’ 하고, 그 세계관, 가치관의 쉬프트(shift)가 일어나서, 유턴(U-turn)하는 거예요. 다르게 봐버리는 거예요.

바오로가 , 나는 이게 열심인 줄 알고, 이게 하느님을 위하는 건줄 알았어. 그런데 알고 나니까, 아니 이게 탐욕이었네! 그리고 하느님은 그걸, 교회를 핍박하고 나를 핍박하는 거라고 말씀을 하시네.’ 그러니 당연히 이 열심에서 돌아서겠죠. 그걸 메타노이아라 그래요. 그렇게 바라보고 돌아서는 것까지를 회개라 그래요. ‘메타노이아!’ 그러면 우리가 ()’라는 것을 통하여 ()’를 깨달았어요. 죄를 다른 차원의 것으로 깨달아서, ‘, 이것으로 하느님이 그 (),’ 그 하늘의 생명을 설명해주시려고 한 거구나! 이 선악과 열매를 통하여, 생명나무 열매를 우리에게 먹이려고 한 거구나!’라고, 요걸 다른 차원으로 보면, ‘용서예요. 그게! 죄가 나와 무관하게 되는 거니까.

그래서 예수님이 그러는 거예요. ‘내가 의인을 구하러 왔는줄 아니? 내가 죄인을 불러 회개시키러 왔다.’ 그러죠? 그 말을 직역을 하면, ‘내가 죄인을 불러 그 죄를 다른 차원의 것으로 보게 해 주려고 왔다.’ 이런 말이에요. 그러면 그게 뭔 지를 안 그이들이, 어떻게 여전히 매 번 와서 죽은 행실의 그 회개를 하고 있으면 되겠니? 이런 말이에요. 반성도 하지 말라는 말이 아닙니다. 당연히 해야죠. 인간이면! 그러나 원리적으로, ‘아이 씨, 내가 반성은 해야 되고, 그리고 이런 지긋지긋한 육의 몸, 빨리 벗는 게 나의 소원이 되어야지. 그러나 하느님이 이것도 다 용서하셨다고 하니까. 얼마나 감사한가!’ 여기로 못 가면, 울고불고 맨 날 난리를 치게 된다니까요. 고해성사하고 가슴이나 치고 그런다니까요. 그러면 그 때마다 어떻게 되는 거예요? ‘, 내가 다 해결하고 죽었는데. 너 그러면 내가 미안해서 어떻게, 내가 또 달려서 죽어야 돼?’ 또 예수님을 매 번 죽이는 거예요. 그게 인자를 도륙(屠戮)하는 거예요. 그게 프뉴오, 살인하는 거라니까요. 그게. 그 제사, 영 단번에 드린 그 제사를 못 믿어서, 계속 제사를 드리는 거예요. 그것이 그걸 ()의 초보라 그러고. ‘버려라!’ 그러는 거예요.

두 번째가 하느님께 대한 신앙! , 더 큰일 났네요. 하느님께 대한 신앙이 도의 초보래. 그리고 버리래요. , 그 하느님이 누군데? 그 하느님을 믿고 계세요? 한 번 잘 생각해 보세요. ‘, 하느님을 믿어.’ 하느님이 그랬거든요. ‘나는 신실하다.’ 그럴 때 하느님이 자기 이름을 믿음이라고 하는 거예요. ‘피스티스란 단어거든요. 하느님은 믿음이시다. 이런 말이에요. 그러면 그 믿음이라는 게, 그 하느님을, 그 보이지도 않고, 말로도, 언어로도 담을 수 없어서, 주어로도 다 생략이 되어 있는 그 하느님! 그런데 그 하느님을 어떻게 알고 믿느냐고요?

그래서 하느님이, 당신을 말씀으로, 예수라는 그 안에 담아서 보내야 할 정도로, 그리고 당신을 설명하기 위해, 이 천지를 창조, 바라하실 수밖에 없었던, 그 하느님! 그 하느님은, 우리가 , 어떻게 외부에 있는 어떤 존재로서 인식하여 섬길 수가 없기 때문에, 신앙할 수가 없기 때문에, 말씀으로, 로고스로! 우리에게 내려주셨죠? 우리 것으로. 그러면 아, 그거예요? 그 하느님은 바로 그 아가페, 그 사랑이군요. 그 은혜군요. 그 자비군요.’ 알아서 그걸 내 마음으로 갖는 거죠. 그러면 내가 성전이 된다. 그랬습니다. 그러면 그 성전을 히브리어로는, ‘아브라고 쓰고 , ‘하느님의 집, 아버지라고 읽는 거예요.

그래서 예수님이 그 진리를 담고 왔잖아요? 그래서 예수님이 내가 진리야.’ ‘내 안에 아버지 계시다.’ 그래요. 그리고 또 아버지가 내 안에 있대. 아버지와 나는 하나래요. 그래서 예수님은 죽는 날까지, 마지막 순간 단 한 번 이외에는, 하느님을 하느님이라 안 불러요. 아버지라고 불러요. 그리고 죄인, 그 대표가 되어, 세상 임금이 되어 죽으실 때만, ‘나의 하느님, 나의 하느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시나이까?’ 하면서 죽으세요.

그렇게 하느님으로부터 버림받는 자들은, 그들 안에 그 하느님을 진리로, 말씀으로 갖지 못하고 알지도 못하는 어떤 하느님을, 내 밖의 대상으로 놓고, 두려워서 덜덜 떨면서, 뭘 하면서 비는 거예요. 그래서 예수님이 그러죠. 날더러 주여, 주여 하는 놈들은 하느님나라에 단 한 명도 못 들어간다!’ 그랬어요. ? 나는 그리스도로 네 안에 들어간다, 그랬는데, 주여! 주여! 부른다는 것은, 여기에 내가 있다는 걸 모르는 거 아냐? 그러니까 너희들은 하느님나라에 단 한 사람도 못 들어간다.’ 그랬어요. 기도회에 가면, 너무 시끄러워, ‘주여!, 주여!’하느라고. 여기 없으니까! 저 옆 사람보다는 조금 더 크게 불러야, 그분이 나에게 먼저 올 것 같죠? 그래서 얼이 빠져 갖고 나중에는 무슨 기도를 하는 지도 모르겠고. 무슨 개구리 떼 같아. 와글 와글 와글. 개구리는 부정한 동물이에요.

세 번째는 세례예요. 물에 푹 담그는, ‘뱁타이스’, 물에 빠뜨려서 죽이고 그 물이 호흡(氣息)하는 걸 죽이고, 그 물에서 건져 올려 살리는 걸, 세례라 그래요. 뱁타이스그러면 물 위의 물이 호흡하는 걸 빠뜨려 죽이고, 그게 세례잖아요? ‘너는 이제 그렇게 다나토스의 죽음을 진리로 죽었으니, 산 자야!’라고 저주의 바다에서 끌어올리는 게 세례거든요. 그럼 그걸 알았으면, 더 이상 그 세례를, 정말 율법으로, 이거 안 하면 구원 못 받는다. 이런 가르침을 가르치면 돼요? 안 돼요? 영세 안 받으면 절대 안 된다고 가르치는 사람들 있죠? ‘그거 안 받으면 구원 못 받습니다.’ 그게 뭔데요? 초대 교회 때 죽은 자에게 내리는 세례, 이런 것들이 있었다고 사도 바오로가 이야기하잖아요? 그 때도 아직 정경이 완성이 안 됐을 때예요. 그 때는 목숨 걸고 신앙생활 했던 때잖아요. 요단강에서 공개적으로 세례 받았으니까. 그건 가족들에게 끊기고, 葬事? 못해요. 그러니 나는 예수 믿고 세상과 단절이 되어 살 거야. 공개적으로 자기들끼리. 어떻게 보면 그것도 객기야. 어떻게 보면! 뭐 하러 그래요?

그러니까 그 세례가 너무나 소중했던 거예요. 그래서 진짜, 진짜 확인해 보고, 확인해 보고, 확인해서 이 사람은 진짜라고 생각이 되었을 때, 그 때 세례를 줬거든요. 그런데 너무 확인을 해서 기다리다 죽었네. 이 사람이! 그러면 회의를 해서, 이 사람은 진짜 같은데, 어떻게 하죠? 그러면 세례를 줬어요. 산 사람이 시체 밑에 들어가서 세례 문답하고, 세례를 줬다니까요.

그러나 정경이 완성된 이후에는 그런 거 다 없어졌어요. 그거 왜 필요해요? 세례? 그 세례가 뭔지를 알면, 성령 세례 받은 거예요. 그게! 입에 거품 물고 막 이상한 소리 내는 게, 성령세례가 아니라, 성령은 진리잖아요. ‘프뉴마는 영, 진리, 생명이라 그러잖아요? 그 생명, 내 안에 있으면 성령 세례 받은 거라니까요. 그것이! 그럼 그걸로 끝! 예수님이 물세례 받으실 때 나도 물세례 받은 거고. 그 안에서 일어난 모든 게 나에게 일어난 거니까요. 그런 거, 거기에 너무 묶이지 마! 그러는 거예요.

네 번째는 안수죠. 안수도 버리라 그래요. 안수는 뭡니까? 제물에게, 점도 없고 흠도 없는 제물에게, 내 죄를, 내가 안수하여 전가시키는 거예요. 이게 율법의 안수입니다. 그러면 이 제물이 내 죄를 쪽 빨아들인다, 그래요. 그러면 내가 이제 무흠(無欠)해졌네요. 그 제물과 내가 이렇게 바꿔진 거죠? 그러면 이 제물이 네 죄가 되어서 죽고, 나는 사는 거죠. 그런데 예수가 그렇게 했잖아요? 그러니까 더 이상 그런 제사는 필요 없죠? 그 제사가 필요 없으니 안수도 필요 없네. 그거 하지 마! 그러는 거예요.

그런데 요즘 교회에서 횡횡하는 안수는 뭘까요? 이렇게 이해하고 싶어요. ‘엄마 손은 약손.’ 이럴 때 요기에서 뭔가 원적외선이 나와서, 치료를 해준다네요. 그런 의미에서 교인들끼리 따뜻한 마음으로 쓰다듬어 주며, 기도해 주는 건 오케이. 그러나 여기에서 마치 무슨 능력이 나와서, 머리에다 손 얹고, 등허리에다 얹고, 이건 자기 죄를 자꾸 나눠주는 거예요. 다른 이들에게! 성경에 그러잖아요? 그거 센드 어웨이(send away), 버려라, 그런다니까요. 그렇게 해야 폼도 나고 그러니까 안 버리고 계속하는 거예요.

다섯 번째가 드디어 죽은 자의 부활, 그거 버려라! 그런다니까요. 죽은 자의 부활. 죽은 자의 부활이 뭐라 그랬어요? 하느님이 주시는 부활은 산 자의 부활입니다. 그런데 그 산 자의 부활은, 반드시 다나토스를 겪고 난 다음에, 일어나는 거예요. 그런데 그것도 겪지 않고, ‘왜 우리가 못해? 우리는 할 수 있어. 하느님을 기쁘게 해 드려야지, 뭐 해야지, 뭐 해야지, 뭐 해야지 하고, 하느님 나 잘했죠?’ 하는데, 하느님이 그걸 죽었다 그래요.

죽은 자들이 한 일은 하느님이 아무 가치도 없게 본다고요. 죽은 자의 부활 그거 버려! 하느님이 얘기하시는 부활은 진리의 말씀으로 이 세상에서 죽었던 자들이, ‘, 이게 죄고, 이게 죽음이야. 그런데 어떻게 이게 내 귀에 들렸지? , 큰일 날 뻔 했네.’ 하고 산 게 첫 번째 부활이에요. 묵시록에 나오는! 그들이 그 첫 번째 부활을 통과하지 않고는, 그런데 다나토스의 부활을 통과해야 첫 번째 부활이죠? 두 번째 부활, 완전한 완성으로 못 간다니까요. 둘째 사망, 둘째 부활 이건 다 완성을 이야기하는 거예요. 이제는 없는 거예요. 그 끝은!

그러니 그 부활은, 이 땅에서도 지금 일어나죠. 사람은 날 때 다 죽은 자로 난다면서요. 성경이. 다 죽은 거라면서요. 에제키엘서에 나오는 마른 뼈다귀라면서요. 우리가! 그런데 생기, 말씀이 들어가니까 그들이 산 자가 되더니 군대가 되잖아요? 그럼 다 죽은 거네요. 여기는! 아닌 거예요? 그런데 여러분이 살았네. 그러면 그게 부활이지 뭐예요? 그런데 이 부활을 거치지 않고는, 나중에 그 부활로 못 간다는 말이에요. 그런데 이걸 거치지 않고, 언젠가 올 거기에서의 나의 삶! 이런 것에만 관심이 있는 건, 그게 바로 죽은 자의 부활이라는 거예요. 그들은 심판받을 거라는 거예요. 진리로 이 땅에서 한 번 죽고 산 경험이 없이, 자기가 주인공이 된 어떤 그 부활을, 여전히 꿈꾸고 있다면, 그게 죽은 자의 부활이라는 거예요. 던져 버려라! 그것도! 센드 어웨이(Send away!)

마지막에 영원한 심판이죠. 그 교훈의 터는 절대 닦지 마! 영원한 심판. ? 영원한 심판은 우리 하느님이 당해버리셨거든. 세상 임금. ‘보라! 세상 죄를 지고 가는이니까, 그가 세상의 대표, 임금으로 죽는 거잖아요? 세상의 모든 죄를 대표로 짊어지고 가는 거니까! 그래서 세상 임금이에요. 그래서 그 분이 그랬다는 걸 믿으면 나와 세상은 아무 상관이 없어. 나에게선 그 세상 임금이 죽었으니까. 그런데 그 분이 안 죽으면, 여전히 세상 임금이 나를 끌고 가는 거예요. 그런데 그 때는 그 세상 임금이 마귀가 돼요. 비진리가 된다니까요. 그분이 영원한 심판을 당했기 때문에, 나에게는 이제 심판이 무관해졌어. ? 나는 그 안에서 죽었거든요. 어디에 심판을 받아? 내가 없는데. 내 안에는 그리스도만 사는데.

그러니까 그걸 알면, 하느님이 어디에 심판을 할 수가 없어요. ‘요거 얄미워 갖고, 요거 인생 70년 동안 어떻게 그렇게 살다니, 나쁜 놈아! 넌 그래도 땅콩 다섯 대는 맞아야 되겠다.’ 그런데 때릴 데가 없어. ‘가 없어졌어요. 그 안에 그리스도만 있어! 그걸 아는 이는 절대 단죄를 못 받아요. 그래서 야훼를 알라. 힘써 야훼하느님을 알라!’ 그러는 거예요. 그런데 그 심판을 미끼로 삼아 겁주면서, ‘당신들 이거 안 하면 심판 받아요. 저거 해야 심판 안 받아요.’ 이런 건 안 된다는 거죠? 그런 거 하지 마! 그런 거 하지 마!


(요한복음 5:24-29) 24 '정말 잘 들어 두어라. 내 말을 듣고 나를 보내신 분을 믿는 사람은 영원한 생명을 얻을 것이다. 그 사람은 심판을 받지 않을 뿐만 아니라 이미 죽음의 세계에서 벗어나 생명의 세계로 들어 섰다. 25 정말 잘 들어 두어라. 때가 오면 죽은 이들이 하느님의 아들의 음성을 들을 것이며 그 음성을 들은 이들은 살아날 터인데 바로 지금이 그 때이다. 26 아버지께서 생명의 근원이신 것처럼 아들도 생명의 근원이 되게 하셨다. 27 아버지께서는 또한 아들에게 심판하는 권한을 주셨다. 그는 사람의 아들이기 때문이다. 28 내 말에 놀라지 말라. 죽은 이들이 모두 그의 음성을 듣고 무덤에서 나올 때가 올 것이다. 29 그 때가 오면 선한 일을 한 사람들은 부활하여 생명의 나라에 들어 가고 악한 일을 한 사람들은 부활하여 단죄를 받게 될 것이다.'

자 여기는 다 무덤이에요. 세상은 다. 전체가 무덤이죠. ? 다 죽은 자들이니까! 인정하고 싶지 않으세요? 원래 다 죽은 자들이니까, 무덤이죠? 그런데 그 무덤에, 하느님의 말씀이 떨어진대요. 그런데 그 음성을 듣고 나오는 이가 있고, ‘여기가 좋사오니하고, 이 세상에서 혹은 이 세상을 조금 더 확대한 천국관! 그걸 갖고 여전히 세상에 묶여서, 안 나오는 이들이 있는 거예요. 그 말이 떨어지는데! 나자로처럼 나와!’ 그러니까 굴에서, 옛 성전에서 나오는 이가 있는데, 아브라함, 이삭, 야곱, 요셉, 사라처럼, 막벨라 굴에 묻혀, ‘다나토스로 묻혀서, 거기에서 나오는 이들이 있는데, 그 굴에서 여전히 여기가 좋사오니하고 안 나오는 이들이 있는 거예요. 그들을 죽었다 그래요. 죽었다! 그렇게 하느님의 말씀, 아들의 말씀을 못 듣는 자들을 네크로스, 죽은 자라 그래요. 죽은 자! 그래서 여기에도 네크로스란 단어가 쓰이는 겁니다.

그런데 재미있는 게 워드 플레이(word play)가 하나 나오는데, 주님이 워드 플레이를 하신 거겠죠. 29절에 보면 선한 일을 행한 자라고 하죠. 정확히 번역을 하면, 선이 포이에오 된 자,’ 선이 된 자, 그리스도가 내 안에 들어와서, 이제 그게 선이 된 자예요. 말씀이 이루어지면 그걸 포이에요라고 하거든요. 그 선이 된 자는 생명의 부활이고, 그게 산 것이고 생명이고. 악을 행한 자는, 여기서는 행한 자라는 단어가 들어가요. 선은 되는 거지, 뭘 행하게 되면 악이라는 뜻이에요. 악을 행한 자는 심판의 부활로 나온다. 그가 얻어낸 생명은, 심판이야. 이런 말이에요.

(요한묵시록 20:12-13) 12 나는 또 죽은 자들이 인물의 대소를 막론하고 모두 그 옥좌 앞에서 있는 것을 보았습니다. 많은 책들이 펼쳐져 있고 또 다른 책 한 권이 펼쳐져 있었습니다. 그것은 생명의 책이었습니다. 죽은 자들은 그 많은 책에 기록되어 있는 대로 자기들의 행적을 따라 심판을 받았습니다. 13 바다는 자기 안에 있는 죽은 자들을 토해 냈고 죽음과 지옥도 자기들 속에 있는 죽은 자들을 토해 놓았습니다. 그들은 각각 자기 행적대로 심판을 받았습니다.

그런데 다른 죽은 자들, ‘네크로스들이 어떻게 심판을 받느냐 하면, 또 다른 책들에 적힌 행위로 심판을 받는다, 그래요. 그러니까 이건 같은 책이거든요. 하느님이 우리에게 책을 하나 주셨어요. 하나! 그건 한 권이에요. 성령이 처음부터 끝까지 쓰신 거. 이사야서에 나오잖아요. 이건 성령이, 하느님이 말하시고 성령이 모으셨다. 그런다고. 그런데 그 책은 처음부터 끝까지 다 하나만 이야기하고 있네. 하느님! 그 사랑! 그 아가페! 그런데 이것을 그 사랑으로 이해를 못하면, 이게 다 부스러기가 된다, 그랬죠. 그래서 유다가 떡을 못 받고, 걔만 떡이 아니고, 부스러기를 줬다고 성경에 쓰여 있어요. 그 부스러기들을 받고, 이게 내 양식이야 하고, 율법으로 먹는 이들은 그걸 받으면 그 책들로 심판 받는다, 그래요. ? 그 책들에 적힌 그대로 네가 행할 수 없으니까. 그러나 그 생명! 그 책을 생명으로 알아, 그 생명! 그 하나를 네가 그 마음으로 가지면, 너는 그걸로 사는 거야. 그게 네 생명이야 그래요.

그러니까 여러분, 이 말씀, 이 성경이, 이 설교가, 여러분에게 생명으로 박혀요? 아니면 오늘도 집에 가서 이거 해야지, 저거 해야지, 이렇게 결심을 유발하게 하는 부스러기로 들려요? 아주 중요한 거예요. 이건! 그런데 자꾸 어플리케이션(application)을 말해 달래. 이렇게 사세요. 저렇게 사세요. 구체적으로 말씀을 해 달래. 죽여 달라는 얘기 아녜요. 그거! 날 좀 죽여주세요. 좋은 죽음 말고.

그런데 잘 보십시오. 13절을 보면 이젠 네크로스들이 막 쏟아져 나와요. 심판! 그 행위! 책들로 심판을 받은 네크로스, 진짜 죽은 자들이 어디에서 튀어나오는지 보세요. 튕겨져 나오는지. 바다는 자기 안에 있는 죽은 자들을 토해 냈고 바다가 위의 물을 설명하기 위한, 아래의 물이죠. 그런데 원래 그건 같은 물이잖아요, 원래? 이걸 내용으로 설명하기 위해, 이 땅의 어떤 것으로도 줄 수가 없으니까. 아래의 것을 사용하여 줄 수밖에 없잖아요? 그래서 그 위의 물! 이것이, 그 바다를 이렇게 진리로 이해시키면, 덮으면, 그게 야훼의 영광이다 그러는 거예요. 그래서 물이 바다 덮음 같이 야훼의 영광이 나타난다.’ 그러는 거거든요. 그러면 그 바다에서 심판, 네크로스가 나온다는 건 뭐죠? 그 호 코스모스의 세상과 성경, 예수를 통하여, 그 하느님의 아사랑, 진리를 이해하지 못하고, 그걸로 자꾸 무엇을 하려고 하고, 그것으로 부담을 갖고, 그 염려와 수고를 하게 되면, 그들이 죽은 자라는 거예요. 그래서 그 바다가 네크로스를 토해내더라는 거요. ? 심판하라고. ‘심판하세요!’ 토해내는 거죠.

또 죽음과 지옥도 자기들 속에 있는 죽은 자들을 토해 놓았습니다. (그리고 사망과 지옥 네크로스를 토해내세요. 여기서 사망이 단수 사망이에요. ‘다나토스인데, 다나토스는 좋은 것 아녜요? ! 단수의 다나토스는 예수의 죽음이에요. 예수님이 그 말씀의 완료, 완성으로, ‘다 이루었다!’하고 무트의 죽음을 죽으셨잖아요? 그걸 다나토스라 그래요. 그런데 그 죽음이, 내 죽음이어야지, 그 죽음이 나와 아무 상관없이, ‘그래, 그분이 그렇게 죽어서 나를 살렸대. 그러니까 내가 이제 그 죽음! 그걸 힘 입어, 나는 이제 이 세상에서 열심히 하느님이 기뻐하는 어떤 존재가 되어야지.’ 잘 이해해야 되는데, 그렇게 들고 뛰어버리면, 그 사망(死亡)을 잘못 이해한 거라는 거예요. 그 사망은, 반드시 나의 사망이 되어야 된다는 거예요.

그런데 그 사망은 나와 아무 상관없이, 그냥 내 밖에서, 2000년 전에 그냥 한 번 존재한 거예요. 그리고는 그게 나를 살렸다고, 그냥 막연히 믿어. 그건 나는 그럴만한 가치가 있는 존재라는 걸 전제하고 있는 거거든요. 그게 아녜요. ‘, 그 죽음은 바로 나의 죽음이었어. 하느님이 그렇게 자기를 죽여, 신의 자리에서 내려와 자기를 계시하지 않으면, 도대체가 내가 그 신을 알지 못하기 때문에, 그 신이 나와 벗이 되기 위해, 그렇게, 신의 자리에서 내려와 피조물이 된다는 건, 신의 죽음이란 말예요. 그것이! 그 방법 밖에는 없는 거야! 나는 하느님 아니니까!’ 그게 그렇게 내 죽음이 되어야 그 사망이 진짜 가치 있는 사망이 되는 거예요.

그런데 저 내 밖에서, 내가 기념하고, 내가 섬김의 대상으로 갖고 있는 그 대상, 그 사망! 그래놓고 십자가, 십자가 하는 그 인간들. 그건 아니라는 거예요. 그건 나와 관계없는 십자가라니까요. 오히려 그게 십자가를 우상화시켜 만드는 거예요. 그건 성화주의 보다 더 나쁜 거예요. 그 사람들은 열심히 노력이라도 하지. 이거는 십자가, 십자가 하면서 저기다 세워놓고, 그러니까 우리는 맘대로 살아! 이게 뭐예요? 아무 관계없이. 어떤 영향도 안 받고? 그거 아니란 말입니다. 그건 내 죽음이 되어야 돼요. 그런데 그 사망이 그대로 머물러 있으면, 그 사망이, ‘네크로스를 토해낸다는 거예요. 그리고 음부는 뭐죠? ‘하데스.’ ‘부정접두어. ‘데스’ ‘에이돈, 말하다.’ 말이 없는 곳. 당연히 진리가 없는 곳이니까. 네크로스를 토해내는 거요 그러면 거기에, 심판이 일어난다는 거예요. 심판이 일어나면, 이제 둘째 사망 다나토스, 이제 우리의 그 생명에 사용된 거잖아요? 예수의 죽음도 그렇고. 우리의 다나토스도 그렇고. 그러면 이제, 완전히 완성이 되는 그 때에는 그럼 이게 필요 없네요. 그러니까 이게 사망과 음부가 불에 던져지는 거예요. 비진리와 그 사망, 예수의 사망, 이 땅에서의 우리의 사망. 그래서 그 나라는 다시 눈물이 없겠고, 사망도 없고, 고통도 없고, 이런 말을 하는 거예요. 단순히 거기서는 안 죽는다 이게 아니라. 그게 두 번째 사망이라는 거예요. 이게 완료의 다나토스,’ 진짜 완료의 다나토스라는 거예요. 당연히 불 못에 다 들어가 버리죠.

그러니까 우리는 이 땅에서, 그렇게 잘 죽어서, 피조물의 자리로 싹 내려가서, ‘하느님 맞습니다. 하느님이 전부이고, 하느님이 생명입니다! 우리의 이 날파리 날개 짓, 이걸로는 그 어떤 목적지에 도착할 수도 없고, 방향도 정할 수 없습니다. 하느님 우리를 이끌어주세요. 아니, 그 독수리 날게 위에 얹어주세요!’ 이렇게 가는 거예요. 자꾸 죽어라, 죽어라 그러니까 그냥 아이고 우리는 자꾸 고통당해야 된다, 그러고, 핍박당해야 된다 그러고, 힘들어야 된다, 그러는데, 나는 왜 이렇게 힘이 안 들지?’ 이러는 사람이 있는데, 그 이야기가 그런 고통 아녜요. 그런 고난 아니라고. 그건 신이 주는 게 아니라, 인간들이 만들어낸 거라니까요. 3차원에 사는 이 악마 같은 인간들이, 자기들끼리 부대껴서 만들어낸 비늘 같은 게, 고난, 고통이라는 거예요. 아니 내가 잘못해서 만들어냈다는 게 아니라, 나도 물론 그 안에 들어 있지만, 온 세상이 부대껴서 만들어내는, 이 현상계 속에서 만들어내는 건, 그런 거 밖에 없는 거예요.

그런 걸 통해서도 진리를 이해할 수 있지만, 깨달을 수 있지만, 제가 말하는 고통, 고난, 이런 건 그게 아니라, ‘그 예수의 애통, 그 예수의 고난, 그 예수의 죽음이, 바로 내 것이었군요!’라고 하고, 그 하느님의 자리에 서 있던 그 자리에서, 내가 피조물의 자리로 내려가는 그 과정! 그게 고난이고, 애통이고, 그것이 진짜 죽음이란 말예요. 우리의 죽음! 그건 나에게 감정적인 고통으로 감지가 안 될 수도 있어요. 그러나 그 하느님의 자리에서 내려가는 그것 자체가 죽음이라니까요. 우리에게! 그런데 자꾸 내가 또 중심이 되어서, 내가 아프고, 내가 기쁘고, 내가 환호를 지르고, 이런 걸로 또 이해를 하는 거라. 이게! ! (하하하하)

그러니 또 자꾸 왜 나는 안 아파요?’ 이런 거. 안 아파도 된다니까요. 그러나 죽는다니까요. 그래서 성경이 애통하는 자는 복이 있다에서 그 애통이라는 단어를, ‘과월절이라는 단어로 쓰는 거예요. 그 과월절이 나에게 과월절이면, 그게 애통이야, 이런 말 하는 거예요. ‘그 예수의 죽음이 바로 너의 죽음이었다. 네 육이 그렇게 거기서 죽지 않으면 너는 절대 그 세상에서 못 나와. 그래서 예수가 네가 되어 죽은 거야.’ 그게 이해가 되면, ‘그게 내 육의 죽음이네요. 그렇군요. 그 방법 밖에 없었군요.’ 이게 애통이라니까, 이게 고통이라니까요. 이걸 죽음이라고 한다니까요. 그 죽음을 잘 죽으세요. 기쁘게. 그 현상계가 주는 그런 고통과 아픔과 시련. 이 세상에서 생산해내는 것은, 그런 것 밖에 없다는 걸 확실히 깨달으시고 그 나라를 빨리 희망하세요. 그러면 돼요. 너무 거기에 또 묶여 있지도 말고 그렇게 끌려가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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