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4월 24일 (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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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느님의 마음을 품은 한 아름다운 영혼을 보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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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만연 [fisherpeter] 쪽지 캡슐

2019-12-13 ㅣ No.134536

 

 

유튜브에서 김귀웅 신부님의 향심기도에 관한 강의를 듣다가 가슴뭉클한 사연이 있어서 전하고 싶습니다. 독일 한인 성당의 한 자매님의 사연입니다. 어떤 사연인지 한번 먼저 보시겠습니다.

 

옛날 우리나라가 어려운 시절에 독일로 간호사를 파견했는데 그때 독일로 건너가신 자매님이었습니다. 이웃이 이 자매님에 대한 글을 남긴 걸로 보여집니다. 시골의 한 유지 집안의 딸이 서울에서 공부를 마치고 어떻게 해서 독일로 갔습니다.

 

언어와 문화의 장애를 넘어 간호사로서 생활하다가 한 남자를 만나 가정을 이루고 살다가 어느 날 남편이 뇌에 관한 불치의 병으로 삶에 절망적인 그림자가 다가왔습니다. 고통의 삶이 이어지는 나날이었습니다. 그러던 중 이웃집 할머니가 이런 모습을 보고 제안 하나를 합니다.

 

할머니는 자식이 없는 몸이었고 그래서 이런 자매님의 헌신적인 모습을 보고 어떤 딴 마음이 있었나봅니다. 자기에게 남은 재산을 나중에 유산으로 물려주겠다고 하면서 유언장을 변호사를 통해 주겠다고 합니다. , 조건이 있습니다. 자기 몸을 거두어 보살펴달라는 조건입니다.

 

어떻게 해서 돈 때문인 것만은 아니겠지만 아무튼 그렇게 해서 이 할머니를 정성껏 돌봐드렸습니다. 대소변을 받아내는 그런 일을 하면서까지 자신의 힘겨운 삶이 하나의 운명인 것처럼 순응했습니다. 주위 양로원에 맡기라는 주위의 권유에도 이 할머니를 성심껏 보살펴드렸습니다.

 

참으로 눈물겨운 헌신이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할머니의 서류를 정리하게 되었습니다. 이때 망연자실했습니다. 할머니의 이 모든 일이 거짓말이었습니다. 할머니는 자기의 모든 재산을 이미 조카에게 넘겼던 것입니다. 남은 것은 옷과 매월 들어오는 연금뿐이었습니다.

 

집도 할머니가 사는 기간만 사용할 수 있는 조건이었습니다. 정말 철저히 이 자매님을 배신한 행위였습니다. 응급실에서 울음을 터트리며 돈보다도 인간적인 배신에 가슴이 너무나도 아팠습니다. 자신의 노후를 위한 보살핌이었다고는 하지만 그 서운함은 말로 표현할 수 없었습니다.

 

이 상황에서 이 자매님은 자신의 이런 상황에 대해 하느님께 오로지 전적으로 기도에 매달렸나봅니다. 얼마 동안 기도를 한 후에 새로운 마음을 먹었습니다. 오히려 할머니로부터 받은 배신감에 증오를 하고 싶은 마음이 굴뚝 같았을 텐데 그런 마음은 없고 오히려 이 할머니의 영혼을 불쌍히 여기는 마음을 먹었던 것입니다.

 

아무런 대가도 없이 극진히 간호를 하겠다고 하는 것입니다. 몇 년 동안이나 자기 남편을 돌보는 그런 어려운 상황에서 그 할머니와의 약속을 지킨 모양입니다. 할머니의 묘지도 나름 꾸며주며 유종의 미를 거두는 모습을 보여주었습니다.

 

독일에서의 그분의 삶은 고단한 삶의 연속이었지만, 본래의 고운 심성을 버리지 않은 그녀의 일생을 바라보며 사람은 무엇으로 사는가?’에 대한 답을 찾아본다고 합니다.

 

사랑은 고색창연하지만 하나의 헌신이라고 표현을 합니다. 배신한 약속을 알면서도 할머니를 떠나지 못하고 고생한 그녀의 헌신, 그 어려운 사랑으로 그녀는 살아갈 그 어떤 힘을 얻는 것은 아닐까?

 

이게 오늘 제가 들은 사연의 스토리입니다. 이 사연을 들으면서 참으로 많은 것을 생각나게 하는 사연이었습니다.

 

먼저 인간적으로 보면 배신감에 어쩌면 치를 떨 정도의 증오가 쌓일 수가 있었을 텐데 어떤 기도의 힘이 이 자매님께 전해졌는지는 모르지만 그런 상황에서 이 할머니의 영혼을 불쌍히 여길 수 있는 마음을 가질 수 있었다는 걸 보면서 이런 게 어떻게 가능할까를 한번 생각해봤습니다.

 

과연 그 무엇이 그 자매님으로부터 이런 마음을 가질 수 있게 했을까? 물론 눈에 보이지 않는 하느님의 모습과 또한 귀로 들을 수 없는 하느님의 울림이 있지 않았을까 생각합니다. 바로 그렇게 추측할 수 있는 연유는 이 할머니의 영혼을 불쌍히 여길 수 있는 마음을 가진 걸 보면 알 수 있습니다.

 

복음을 보면 예수님께서도 자비를 베푸시기 전에 '측은한 마음이 들어' 라는 표현이 많이 등장합니다. 바로 측은지심, 이런 마음 바로 자비의 마음이 하느님의 마음과 주파수가 같은 마음입니다.

 

설령, 이런 하느님의 마음을 기도로써 받았다고 한다고 하더라도 이 자매님의 영혼 속에 있는 마음이 하느님의 마음과 주파수가 일치하지 않으면 절대 이런 마음을 먹었을 수가 없었을 겁니다. 아무리 하느님께서 어떤 사인을 주시더라도 근본적으로 이 자매님의 마음속에 고결하고 맑은 영이 있었기에 가능했을 거라는 것밖에는 달리 설명할 방법이 없을 것입니다.

 

인간적으로 생각을 했을 때 이런 일을 할 수 있다는 건 정말 불가능한 일입니다. 어떻게 해서 그런 연민과 자비로운 마음을 가질 수 있었을까요? 저는 이렇게 생각합니다. 먼저 이렇게까지밖에 할 수 없는 그 할머니의 영혼이 불쌍하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하느님만이 품을 수 있는 사랑의 극치를 품었기에 가능했을 거라고 생각합니다.

 

저는 또한 이 사연을 보면서 한편 또 다른 묵상을 해봅니다. 파우스트 수녀님께서 남기신 말씀과 견주어 생각을 해보게 된다면 이 자매님의 이런 인생을 인간적인 관점에서 보면 가슴 아픈 인생사인 것은 틀림없는 사실입니다.

 

근데 파우스트 수녀님께서는 이런 내용을 말씀하신 적이 있습니다.

 

우리가 자비를 베풀 때 실제로 다른 관점으로 보면 자비를 입을 수 있는 사람이 있기에 도리여 우리가 자비를 베풀 수 있는 공로를 쌓을 기회가 주어진다는 측면도 있다는 말씀을 하신 적이 있습니다.

 

이에 비추어서 이 사안을 들여다본다면 이 할머니로 인해서 자신의 영혼을 상상할 수 없을 정도로 고결한 영혼으로 고양시킬 수 있게 했다고 본다면 고맙고 감사하게 여길 수 있지 않을까 하는 마음은 좀 어색할 수가 있을지는 모르지만 그렇게까지는 아니더라도 최소한 이 세상에서 이런 기회가 없었더라면 평범한 인간으로서는 보편적으로 가질 수 없는 그런 하느님의 마음을 이 세상에서나마 품어볼 수 있는 기회를 가지게 되어 하느님과 같은 사랑의 마음을 지상에서 미리 맛본 것이라고 한다면 이 또한 하느님께서 이분에게 내려주신 은총일 거라고 생각합니다.

 

이 은총은 정말 인간의 머리로써는 도저히 상상할 수 없는 하느님의 은총이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저는 마지막으로 이런 상상을 해봅니다. 이분은 아마도 나중에 하늘나라에서 하느님으로부터 상상할 수도 없는 상급을 분명히 받으실 거라고 봅니다.

 

자신을 배신한 사람에게까지도 인간으로는 쉽지 않은 마음을 하느님께서 이 자매님의 영혼 속에 심어놓어신 하느님의 마음 씨앗이 잘 자라서 멋지게 싹을 틔운 모습을 보니 정말 한 아름다운 영혼에 깃들어 있는 경이로움을 보는 것 같습니다. 한 편의 드라마틱하고 감동적인 영화를 보는 것 같습니다. 감사합니다.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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