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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직 한 번 희생제물로 (히브리10,12-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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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종업 [rlawhddjq] 쪽지 캡슐

2021-01-27 ㅣ No.144053

 

 

2021 1 27일 연중제3주간 수요일 독서묵상글 (공동번역)

 오직 한 번 희생제물로 

(히브리10,12-14)

12 그러나 그리스도께서는 당신 자신을 오직 한 번 희생제물로 바치심으로써 죄를 없애 주셨습니다. 이것은 영원한 효력을 나타내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리스도께서는 하느님의 오른편에 앉으셔서 13 당신의 원수들이 당신의 발 아래 굴복할 때까지 기다리고 계십니다. 14 그분은 단 한 번 당신 자신을 바치심으로써 거룩하게 만드신 사람들을 영원히 완전하게 해 주셨습니다.


'예수가 우리의 거룩함이다. 의다' 이렇게 얘기하잖아요. 여기보면 한 번의 제사로 우리가 영원히 완전하게 됐다 그럽니다. 그 제사는 역사 속에서는 이 천년 전 십자가에서 드려졌지만 창세 전에 이미 드려진거죠 창세전에 이미 묵시 속에서 예수라는 제물로 말미암아 이제 제사로 드려지고 그리고 우리가 하느님의 백성이 된 것이죠. 그걸 이제 이 역사 속에서 우리가 경험하고 배워가는거예요. 그 창세전에 이미 우리가 예수의 은혜로 우리가 구원을 받았다라는건 하느님 곁에서 살 수 있는 존재가 되었다란 말이예요. 죄를 지었는데 용서를 받았고 하늘의 존재가 어떻게 성취되고 완성되는가를 설명하기 위해 끌어들여진 개념이지, 역사속에서 그 사람들이 갖고 있는 어떤 이성이나 논리로 자꾸 성경을 바라보려고 하면 안됩니다. 그렇게 되면 구약적 관점에서 성경을 자꾸 해석하려고 하면 바리사이인들이나 율법교사들처럼 자기들의 신학을 갖게 된단 말이죠 예수님이 오셨을 때 이 세상에서 예수님을 못 알아본 인간들의 공통점이 뭐냐하면 자기의 신학을 갖고 있는거예요.

자기가 갖고 있는 교리와 신학에 너무 뚜렷하게 고정화 돼있어서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를 이야기하면 그걸 몰라요 천주교회는 정말 하느님의 그 십자가와 은혜도 제대로 가르치지도 않았고 예수 십자가라는 그런 큰 틀안에서 성경을 풀어 해석해 주는 것도 부족하거든요. 하느님은 이미 우리에게 거룩함을 주셨어요. 그 예수 안에 나, 저마다 예수 안에 나예요. 그러기 때문에 사도바오로가 예수 안에 우리라는 말을 그렇게 많이 쓰는 거예요 예수님이 저주의 잔을 다 받아 마셨고, 있음의 흉내를 내는 그 인간들의 그 모든 시도를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완전히 원천 봉쇄한 게, 예수님이 그 저주를 가져 가셨다란 뜻이란 말예요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돌아가시면서 '말씀이 이뤄지게 하기위해 목마르다'라고 하셨다 그러죠 '목 마르다'라고 하신게 말씀이 이뤄지게 하기 위해서였다 라고 하는데 그런데 신 포도주를 우슬초에 묶어서 입에다 갖다 댔다. 그러죠 그럼 우슬초는, 과월절 출애굽 때 어린 양의 피를 바른게 우슬초잖아요. 그런데 이 우슬초가 왜 예수님에게 갔다가 대어져야 되냐 말이예요.

성경에는 두 종류의 잔이 나와요 예수님이 말씀하신 아버지 아버지가 내게 준 그 잔, 이게 좀 비껴갔으면 좋겠다고 생각되는 바로 그 잔과 새 언약의 피를 말씀하시면서 내가 너희들에게 주는 잔이 있죠? 우슬초에 묻혀진 피는 그 자체로는 저주와 심판의 피예요 어린 양이 죽어서 묻혀진 피니까. 그런데 이게 어떤 대상에게 발라지면 이게 용서와 구원의 피가 되는거 란 말입니다.

예수님에게 신 포도주라는 잔이 우슬초에 묻혀져서 가는 거예요. 그럼 예수님이 그 잔을 받는 것입니다. 그 잔을 예수님이 받고 예수가 묻혀지는 거예요. 그리고 그 우슬초가 여러분에게 발려지는게 십자가란 말입니다 그래서 말씀이 이뤄지게 하기 위해 신 포도주를 우슬초에 묻혀서 받는 잔을 받는 거예요 저주의 잔! 진노의 잔! 그 분이 우리의 대표가 되어서 저주의 잔을 받고 ...그 피가 그러니까 거기서 완전히 제거가 된거예요 이렇게 살면 안된다라는 것이 우리에게 발려지는 거예요. 이걸 '속죄'라고 하고 '대속'이라고 하는거 란 말입니다. 그리고는 구원받은 거예요.


오늘 본문에 우리는 한 번의 제사로 영원히 완전하게 된다 그리고 우리는 거룩함을 얻었다 라고 한단 말예요. 그 거룩함이 어떻게 얻어졌는가? 에페소서 1장에 가보면 '하느님이 창조이전에 아들과 계약을 하셨는데 우리를 점도 없고 흠도 없고 거룩하게 하시려고' 라고 그러잖아요 창세전에, 그 거룩하게 하기위해, 창조이전에 아들과 계약하시고 거룩하게 하신거란 말예요. 그럼 창조이전에 이 거룩함이 이미 우리에게 주어진 거예요. 얻어진 거란 말예요

그러면 그 하느님을 찬미하고 찬양하는게 바로 우리의 몫인데 인간들이 자아확장, 이게 죄속에 율법아래에 가두어진 채 보내졌기 때문에 하느님은 가두어서 보냈다 그랬는데 이 인간들이 벗어났다고 하는 인간들이 있어요. 그게 마귀래니깐요

사무엘상 5 1 불레셋군은 빼앗은 하느님의 궤를 에벤에젤에서 아스돗으로 옮겼다. 2 불레셋군은 그 하느님의 궤를 다곤 신전으로 옮겨다가 다곤 바로 곁에 두었다. 3 그런데 이튿날 아침 아스돗 백성이 일어나 보니 다곤이 땅에 얼굴을 박은 채 야훼의 궤 앞에 쓰러져 있었다. 그들은 다곤을 일으켜 제 자리에 세웠다. 4 이튿날 아침 일어나 보니 다곤이 또 땅에 얼굴을 박은 채 야훼의 궤 앞에 넘어져 있었다. 다곤은 몸통만 성한 채로 남아 있었고 부러진 목과 동강난 두 손은 문지방께에 구르고 있었다.

당신의 백성은 거기에 가두어서 보냈다구요. '나는 아니다'라고 한건 '당신의 백성 아니다' 란 뜻이라구요 그게요 뺏겨서 블레셋이 그걸 갖구 왔어요. 갖구 왔는데 블레셋이 처음에는 벌벌 떨다가 어떻게 홀대를 하냐하면 '우리한테 맥을 못쳐 이건 뭐 아무 것도 아니네' 그들의 신학이 세워지는 거예요 그래서 아스돗의 신당에 쳐박아두죠? 근데 이 우상이 법궤만 들어가면 모가지가 부러지고 손이 짤려지고 이러거든요. 같은 일이 일어나요.

그래서 에글론으로 옮겼더니 또 그래요. 아이! 재수없다 그래서 다시 돌려줘요. 그래서 소에 다가 척 얹었더니 법궤가 소를 이랴 이랴하며 자기가 찾아가요 이스라엘로 이스라엘의 신학을 깨고 블레셋의 신학을 깬 다음에 법궤는 자기 마음대로 우발적으로 막 움직여요. 하느님의 일이 그래요. 그런데 우리는 교회 안에서 어떤 비결들을 찾아내려고 그래요.

 

그래서 안되면 더 강한 약을 치는 거예요. '삼십분 기도했는데 안됐어? 매일 한 시간씩 기도해야지' 이렇게 되는거예요. 그럼 사람들이 '와 저 사람 진짜 믿음 좋다' 세상 사람들은 어떻게 자기가 추구하는 일이 안됐을때 금방 포기 하는데 그리스도교인이라는 인간들은 하느님의 힘을 이용하여 자기가 추구할려고 하는 욕심을 기도를 해서라도 성취해 낼려고해요. 누가 더 나쁜 놈이예요? 이게 일곱귀신이 들어간 거예요.

신앙이란 걸 갖구 하느님을 이용하여 세상과 내가 추구하고 얻어내려고 하는 복을 오히려 세상 사람보다 몇 배 더 큰 집념으로 이걸 얻어내려고 하는 인간이에요. 세상 사람들은 금방 포기하는데 그리스도교인들은 헌금을 덜내서 그런가? 온갖 방법을 다 동원하여 나를 확장할려고 한다니깐요. 세상 사람들은 마귀 하나가 들어가 있는 인간들인데 예배당에 앉아있는 성도라고하는 인간들이 마귀가 일곱개가 들어갖구 더 부르짖구 앉아 있는거예요. 예배당(성당)에 마귀 새끼들이 더 많테니깐요.

하느님이 그랬잖아요 '너희들 이땅의 것 아랫 것 추구하다가는 다 죽는다 내가 죽일거야 이 악마들아!' 그랬단 말예요. 그런데 우리는 우리가 하는 꼬라지들을 보란 말예요. 어떻게 해서든지 내가 남들보다 훌룽한 사람이 되고 가치있는 인간이 되기위해 무언가를 행한다. 이건 다른 이야기인 것 같지만 똑 같은 거예요. 뭐 돈을 많이 벌고 못 벌고 이거보다 사람들에게 인기를 얻고 존경받는게 훨씬 더 이게 풍만감이 커요. 우리들이 하는 꼬라지들을 보면 전부 이걸 위해서 한다니깐요. 진짜 우리가 보이지 않는 그 하느님을 위해서 구원이 너무 감사해서 행하는 선이 있습니까?

솔직하게 우리가 하루 동안 하느님을 몇초나 의식하면서 살아요? 그러면서 자긴 하느님의 영광을 위해서 뭘 한대요. 공부도 하느님의 영광을 위해서 한다구 그러구 직장도 하느님의 영광을 위해서 다닌다구 그런데 그렇게 위장하고 있는 그 사람들의 흥을 또 돋구어주구 힘을 더 실어줘서 그 사람들이 더 자기를 위장하고 숨는데 도와주는 강론이 행해져요.

 

로마서4장이후에 아브라함의 마지막 이야기가 뭐냐하면 하느님이 급기야 이름까지 바꾸어 줄 정도란 말예요. 하두 율법으로 이 이스마엘이나 하느님 앞에 살게 하시고 당신의 약속은 이미 성취되기 글렀으니까 율법 이스마엘이 율법이라 그랬으니까. 그랬을 때 하느님이 이름을 바꾼다구요. 뭐라구 바꿨냐하면 아브라함 만국의 아비죠? 누구 이름예요? 그게 원래 모든 것은 예수로 말미암고 비롯된다 그러죠? 그럼 아브라함은 누구의 이름이냐구요 예수의 이름이예요.

누구의 이름을 또 바꾸어주죠? 야곱의 이름을 바꾸어주죠 이스라엘 진짜 참 승리를 이루시는 예수의 이름이예요. 베드로의 이름 바꾸어주죠 시몬 조약돌입니다 아무데나 굴러다니는 그걸 게파 반석으로 바꾸어주죠. 고린도전서에서 그 반석이 뭐라 그래요 예수라 그러죠.

전부 예수의 이름으로 바꾸어 주는거예요 그런데 그들이 뭐가 변해서 바꿔줬어요? 가장 처절하게 마귀짓 할 때 바꿔주었어요. 사탄아 내 뒤로 물러가라 그래놓고 바꿔주었대니깐요. 야곱은 끝까지 하느님 이겨 먹을려구 씨름에서 안 지는데 하느님이 거기서 이름 바꿔 주었대니깐요. 아브라함은 이스마엘 내놓자 넌 내 은혜가 아니면 안되는구나 하구 이름 바꾸어줬어요. 그러면서 전부 뭐라 그랬냐하면 이름 바꾸어주면서 내가 하리라 내가 하리라 내가 하리라너는 못 한다는 뚯이예요 그래서 이름을 바꿔주는 거예요. 이름을 준다는 건 그 사람의 존재를 아예 그 분이 탄생케 하구 정의하구 규정한다는 뜻이란 말입니다.

하느님이 하시는거예요. 그러니까 그 은혜를 아주 풍성하게 깨닫고 어떻게 이런 존재를 하느님이 그렇게 당신의 이름까지 주시면서 예수의 이름 까지 붙여 주시면서 묵시록에 가면 성도의 이마에 전부 예수의 이름이 붙어있는 거예요

하느님은 사랑이시기 때문에, 하느님이 사랑할 수 있는건 사랑밖에 없어요. 그래서 사랑은 하느님께 속했다구 하구 하느님은 사랑이시다 그러는 거예요. 그건 하느님 자체가 사랑이에요 우리보고 서로 사랑하란 말이 뭐겠어요. 하느님은 예수만 사랑하는데 너희들을 하느님이 사랑하신다고 하셨을 때는 너희들을 하느님이 예수로 봐 준다는 거예요. 그럼 우리가 서로 사랑하기 위해선 '아 그 예수 사랑이신 그 예수 저기있네' 라고 인식할 때 이걸 사랑이라고 하는거지요

 

성경에 나오는 온유 절제 인내 이런 거 다 여러분이 알고 있는 그 단어 아니예요?. 겨우 표피적으로 그 국어사전의 개념을 갖구 읽어 놓고는 전부 '예수의 발자취를 쫓아 인내하고 사랑하고 용서하며, 제발 세상을 아름답게 만드는 인간이 되자' 예요 '그러면 바로 그 예수가 하늘에서 너희들을 기뻐 할 것이다' 이거 聖化論 아닙니까? 그런데 예수 안 믿는 자가 보는 성경적 관점과 성도라는 우리가 보는 관점이 어떻게 똑같냐구요.

하느님이 우리에게는 무슨 이름을 주었나요? 안티오키아 교회에서(사도11) 성도를 최초로 '그리스도인'이라고 불렀죠 '너 예수다' 라는 뜻예요 그리스도 이름을 받은게 그리스도인 이라니깐요. 당신이 선택한 백성을 그리스도라 불러주는 거예요. 우리가 그리스도인 이예요 . 그리고 그걸 성도라고 하잖아요. '聖徒 거룩한 무리'

오늘 본문에 나오는 거룩한 무리 그 단어 똑같은 단어예요. 그 거룩한 무리 그 무리라는 건 집합적인 개념이란 말예요. 그 거룩함을 오늘 본문에 의하면 우리가 그냥 얻은 거라 그랬죠? 이게요 거지가 밥 얻어먹는거 얻었다에 쓰는 단어예요 . 거지가 밥 얻어먹을 때 얻었다! 뭐 해서 주는 거 아니잖아요 우리가. 얻어 먹는 거 그냥 주는 거예요 불쌍히 여김을 받는 거...


그래서 사도바오로가 그렇게 자비(긍휼)란 단어를 많이 쓰는거예요 아버지의 자비(긍휼), 긍휼이란 단어가 자궁이라 그랬잖아요. 그냥 아기가 나와버리는 거예요 긍휼이라는 건. 자궁에서 그냥 나오는 거예요. 허 이 놈이 그 안에서 무슨 어미의 이 생각에 못 미치고 어미가 원하는 그런 수준에 못 미치면 그 못 나오게 틀어막습니까? 자궁 안에 든 애는 반드시 나오게 돼있는 거예요. 그걸 긍훌이라고 한다니깐요. 그리고는 내가 이렇게 보살펴 주고 섬겨주고 이 맛에 애를 키우는 거라구요. 그게 하느님 나라래니깐요.

애기. 그냥 기저귀 갈아주는게 너무 즐겁고 행복해서 또 오줌 안싸나 ㅎㅎㅎ 그게 신기 하잖아요 처음에 애낳으면은 ...그럼 또 밥은 언제 또 먹여 줘야되나 그 밥 먹는게 신기해 갖구 드디어 이유식 한 숟갈을 애가 먹었다 그러면 뭐가 대단한거라구, 블로그나 카페에 올리구그러잖아요 드디어 씹었다 뭐를 막 이렇게. 이게 애기와 아버지의 사랑의 관계예요 이것이. 아버지는 끊임없이 뭔가를 섬겨주구 부어주구. 그래서 성경에 보면 아버지가 우릴 섬긴다 라는 말이 그렇게 많이 나오는 거예요. 우리가 하느님 섬기는 거 아니예요. '하느님은 우리의 섬김을 받으시는 분이 아니니' 라고 정확히 나오잖아요. 그런데 뭔 사명이 그렇게 많고 마치 내가 없으면 하느님 나라는 움직여 지지도 않을 것 처럼?

 

성경은 하느님이 우리한테 섬김을 안 받는다고 그러는데. 예레미야에 보면은요 예레미야에게 하느님이 말씀을 주시면서 뭐라고 그러냐하면.... '너는 가서 부숴라! 파괴하고 부수고 맨 마지막에 새로 건설하라' 옛 계약속에 들어있는 인간들의 그 집요한 인본 주의는 말씀에 의해 부수어지는 거예요.

지금도 마찬가지예요 지금도 우리가 부숴져야 되는거지 그걸 세워 준다고 하면 안돼요. 그런데 대부분 그걸 다 세우겠다고들 하니까. 우리들이 생각하고 있는 존경할 만한 신학자나 신부나 목사나, 천국에 가서 우리 못 만날지도 몰라요. 그것도 우리가 판단 할건 아니지만 못 만날 거예요. 그만큼 하느님이 택한 백성은 적어요.

내가 믿음을 보겠니? 라는 말은 거의 없는 거예요. 그러면 그 진짜들을 가려내기 위해선 신앙인들 중에 가짜가 반드시 있어야 돼요. 참인 새것이 왔는데도 모형을 붙들고 있는 가짜가 반드시 있어야 돼요. 그것도 어떤 모습으로? '양의 모습. 광명한 천사의 모습' 으로 있어야 돼요.

신천지 이만희나 문선명이나 이들은 이리의 탈을 쓴 이리구. '양의 탈을 쓴 이리' 가 있어요. 그게 건강한 그리스도교랍니다.


우리가 할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어요. 하느님이 끌고 가실 때 하느님이 그려내시는 그림을 잘 그려내시면 돼요. 때로는 우리 안에서 마귀 같은 모습이 그려질 수 도 있고 그러면 그때 그래서 예수님이 목숨까지 바쳐 그 진노의 잔을 우슬초에 받으면서 까지 나를 구원하실 수 밖에 없었던거구나.....때로는 우리 안에서 상상할 수도 없었던 용서와 인내와 사랑의 모습이 나오거든, 아 하느님이 진짜 내 안에서 하늘의 삶을 이렇게 잠깐 보여주시는구나... 내 안에 사시는 이가 예수라며 (갈라220절에) 내 안에 사시는 예수가 분명히 가끔 나오게 되어 있어요. 그러면 그때 아! 이렇게 이게 진짜 극대화 되어서 모든 이가 바로 이 사랑과 이 용서와 이러한 인생을 살아가는 곳이 하느님 나라겠구나 ...그런데 왜 그 삶을 갖구 자꾸 나를 자랑하려하구 남을 판단 할려하구 하냐구요.

왜 우리는 선악과를 먹으면 안 되었는가? 왜 선악 판단은 우리 것 이여서는 안되는 가를 반드시 여기서 배워야 되는 거예요. 그래서 그 어떤 것도 내가 죄인 중의 괴수가 되면 그 어떤 것도 단죄의 대상이 될 수가 없어요. 내가 제일 나쁜 인간인데 어떻게 단죄의 대상이 됩니까? 그리고 게 진짜 깨달아진 사람은 자기의 상황이나 처지가 절대로 선악 구조에 의해서 판단이 되어 나에게 절망이 되거나 좌절이 하지 않아요. 歷史가 뭐예요? 인간들의 자기 흔적 남기기잖아요? 이건 파괴해야 될거라구요

그래서 인간이 역사를 통해서 배울 수 있는 건 '아 배울 건 진짜 개뿔도 없구나' 역사에서 이거 하나 배우는 거예요 . 흔적 남기려 하지마세요. 이름 남기려구두 하지 마시구 그냥 이렇게 슬며시 있는듯 없는듯 살다가 하느님 나라 가서 왕 되세요. 여기서 왕 하려고 하다가는 큰일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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