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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도신경열한번째/ 죄의 용서를 믿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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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종업 [rlawhddjq] 쪽지 캡슐

2019-10-18 ㅣ No.133273

 

 

사도신경열한번째(2019.10.18)

죄를 사하여 주시는 것(죄의 용서)을 믿습니다-마태 6;12

마태6:12

12 저희에게 잘못한 이를 저희도 용서하였듯이 저희 잘못을 용서하시고

 

오늘은 아주 중요한 죄의 용서(죄 사함)에 대해서 공부를 할 차례입니다. 죄 사함이라는 것이 어떤 건지. 단순히 우리가 저지른 죄, 거짓말, 도둑질, 살인, 간음, 뭐 이러한 죄를 용서해 주신다는 것을 우리가 믿는다 라고 고백을 하는 것인지, 아니면 다른 의미가 있는 것인지, 잘보세요. 하느님께서 자기 계시의 소품으로 들어서 쓰신 인간의 죄, 그 죄를 오늘 심도 있게 짚어봄으로 해서 성도의 목적지를 다시 한 번 조명해 보겠습니다.

욥기 57절 한번 보세요.7 무릇 사람이란 재앙을 위해 태어나니 불꽃이 위로 치솟는 것과 같다네.

인생은 재앙(고난)을 위하여 난 거다 라고 이야기 하고 있어요. 사람들이 인정하든 인정하지 않든 모든 인간은 고난을 위하여 난다 라고 할 정도로 고해 같은 삶을 삽니다. 여러분 사는 게 쉬우세요? 어렵죠? 힘듭니다. 그래서 인생을 고해라고 그러지요. 그래서 모든 종교와 이데올로기와 학문, 즉 인간이 만들어낸 모든 선행체계 지식체계들은 전부 인생의 고난을 벗어나는 것을 그 목적으로 삼고 있어요. . 그건 다른 말로 행복해지기 위해서 라고 표현을 할 수도 있죠.

그래서 불교에서는 깨달음과 수도라는 것을 통해서 고난을 벗어날 수 있다고도 하고, 공산주의는 계급투쟁을 통하여 고난에서 벗어 날 수 있다고도 하고, 유교에서는 예와 인의 회복을 통해서 고난에서 벗어 날 수 있다고도 해요. 사회주의 민주주의 사회민주주의 등의 유물론적 유토피아 관에 입각한 이념들도 여러 가지 정책과 시도를 통하여 고난을 벗어날 수 있다고 각기 그 해결책들을 제시하고 있어요. 그렇게 모든 인간들은 행복을 추구하면서 살아요. 그리고 그 행복을 인간들 스스로의 힘으로 쟁취해 낼 수 있다고 믿고 열심히 살자 라고 너스레들을 떨지요?

잘 생각해보세요. 왜 사람들이 이렇게 열심히 살죠? 여러분 왜 그렇게 열심히 사세요 지금? 아기가 태어나면 제일 먼저 하는 게 뭡니까? 우는 거지요? 울지 않으면 그 아이 잘못된 거예요. 그때부터 인간의 고난 탈출이라는 힘겨운 삶이 시작 되는거에요. 인간의 인생은 울음으로 시작이 되는 거에요. 한바탕 울어 제낀 아기는 그때부터 엄마의 젖을 입술이 부르트도록 빱니다. 도대체 누가 어디에서 아기들에게 엄마 젖을 빠는 법을 가르쳤을까요? 아무도 가르쳐 준 적이 없어요. 그건 단적으로 죄인 된 인간의 본성이 어떠한 것인지를 보여 주는 거에요. 엄마의 입장은 전혀 고려하지 않은 채, 나만 살면 된다는 식의 그런 이기심은 나면서부터 가지고 있는 인간의 본성인 거에요. 엄마의 입장은 전혀 고려하지 않고 내가 배고프면 무조건 빨아야 돼요. 나는 어떻게 해서든지 내 힘으로 살아 남아야 한다 라는 거죠. 인간은 그렇게 생래적으로 생존본능을 갖고 태어나요.

석가모니의 천상천하 유아독존이라는 말이 무색할 정도로 모든 인간이 날 때부터 라는 우상을 위해서 전력투구를 해요. 오직 나, , 나뿐이에요. 어떻게 해서든지 살아 남아야 한다는 그런 생존본능은 곧 고난의 바다에서의 탈출 시도로 이어지죠. 다른 말로 행복을 향한 올인의 삶을 살게 되는 거예요. 전부 행복하기 위해서 살아요. 사람들은 나면서부터 죽는 날까지 끊임없이 무언가를 합니다. 공부를 하고, 직장을 가지며, 결혼도 하고, 취미생활을 가져요. 근데 그 삶의 모든 그 모든 삶의 목적이 뭡니까? 행복입니다. 행복. 누가 가르쳐 준 적도 없는 근데 자기 마음속에 새겨져 있는 행복한 유토피아를 성취하기 위해서 모든 인간들은 자기의 삶을 올인해요. 근데 정확하게 그 행복에 유토피아를 그려 낼 수는 없어요. 근데 도달할 수 있을 것 같아요. 그럼에도 인간은 누구나 행복하기 위해 살아요. 그래서 그 행복을 거머쥘 수 있다 라고 하는 보편적 수단으로 알려져 있는 돈이나 명예나 인기나 수려한 외모 등의 세상의 힘을 열심히 추구 하면서 사는 거요. 행복해지기 위해서. 고난의 바다에서 탈출 하기 위해서. 근데 인간들의 마음속에 새겨있는 행복한 유토피아 상은 이 세상 그 어떤 것으로도 채워지지가 않아요. 도달을 할 수가 없어요. 그건 인간들의 마음속에 새겨진 행복의 동산이 얼마나 엄청난 곳인지를 반증해주는 좋은 예인 거예요. 그래서 인간은 만족을 모르는 것입니다.

아무리 많은 돈을 모으고, 아무리 엄청난 명성을 얻고, 아무리 수려한 외모를 가져도 늘 뭔가 부족하다는 것을 느끼면서 살게 되요. 그만하면 이쁜데 계속 성형수술 하고 싶고, 그만하면 부자인 거 같은데 계속 더 벌고 싶고, 그만하면 높이 올라간 것 같은데 계속 명예를 더 추구하지요? 그건 인간을 진짜 행복하게 만들어 주는 건 그런 하찮은 세상의 힘들로는 이 우주를 전부 모아다가 갖다가 넣어도 바꿀 수 없다 라는 그런 것들을 하느님이 경험 하게 해 주시는 거예요. 하느님은 이 세상에 태어나는 모든 인간들의 마음속에 하느님나라 라는 지고한 행복의 동산을 그려 놓으셨어요. 인간들은 그게 뭔지도 모르고 그저 자신들의 힘과 노력으로 그 동산에 입성을 하려고 노력을 하는 거예요. 근데 그 행복의 나라는 이 세상 모든 것을 다 소유해도 도달할 수 없을 만큼 가치 있고 아름다운 그런 곳 이예요. 그래서 이 세상에 힘을 아무리 많이 쌓아도 늘 그 행복의 동산은 저 만치로 밀려나요. 계속해서. 아무튼 그렇게 모든 인간들이 평생 더 나은 행복을 추구하고 더 나은 만족을 추구한다라는 건 그들의 삶에 늘 결핍이 있다 라는 증거죠. 항상 인간은 결핍의 상태에요. 그 결핍은 하느님이 떠난 공간입니다.

 

인간은 하느님의 형상으로 하느님과의 연합되어 존재하도록 지어진 존재에요. 그때 거기가 하느님 나라가 되는 거고 거기가 지고의 행복의 장으로 바뀌는 거에요. 근데 하느님이 빠져나가 버리셨어요. ? 뭔가를 가르치기 위해서. 누구에게? 교회에게 바로 여러분에게요. 하느님은 피조물인 인간과 한 나라에서 함께 사시기 위해서 피조물을 신적 존재로 만드셔서 사시기로 작정했어요. 신이 아니라 신적 존재입니다. 신의 성품에 참여한 자. 근데 피조물이 신적인 존재가 되기 위해서는 그 피조물의 그릇을 완전히 비우고 하느님의 생명력, 그걸 복이라 그러죠, 바라크, 하느님의 생명력을 가득 채워서 살아야 되요. 그것을 국어사전에 나오는 단어로 표현을 하면 순종이라고 표현을 할 수 있어요. 완전한 순종의 상태가 되는 게 피조물의 그릇 비움이에요. 하느님의 은총의 왕노릇에 자신을 완전히 맡겨 버리는 것이 하느님 절대 의존적 존재로 사는 삶인 거예요. 그런 하느님 나라가 이루어지기 위해서는 하느님 측에서 볼 때는 어마어마한 큰 손해와 상함이 필요하고, 인간 측에서 보면 엄청난 복을 받게 되는 거죠. 바로 그 은총의 현실을 알아가는 게 성도의 인생이에요. 이 우주와 인생의 존재 목적인 것입니다. 그렇게 이미 창세전에 훌륭하게 하느님의 형상으로 피조가 된 하느님 나라의 백성들이 순종의 당위성과 은총의 필연성을 여러 가지 소품으로 채워진 이 역사를 통하여 인격과 이성을 가진 상태로 배우게 되는 거예요. 이게 역사입니다. 그게 우리의 인생인 거에요. 그러니까 우리는 성경을 보면서 옛날에 아담과 하와가 살았는데 그들이 하느님의 말씀을 안 듣고 선악과를 먹어 버리는 바람에 하느님이 화가 나셔서 아담을 에덴동산에서 쫓아내셨고, 그 후로 마음이 좀 누그러지셔서 하느님을 믿어 주는 얼마간의 사람들을 다시 모아서 하느님 나라로 다시 데려 가신다더라 라는 식의 이솝우화 수준의 해석을 하시면 안돼요.

 

하느님의 관심은 이미 창세전에 당신의 마음 속에 품어 두신 당신의 백성들에게만 쏠려 있어요. 하느님은 당신의 백성들에게 하느님과 하느님 나라에 대해서 보이는 세계와 물질들을 사용하셔서 설명을 해 주시는 것이고, 그것을 상세하게 기록해 놓은 책이 성경인 거에요. 우선 하느님은 당신의 백성들에게 아담과 하와의 불순종의 사건을 통하여 하느님의 은혜가 빠져 나간 인간의 상태를 교훈하기 시작하세요. 거기에 선악과와 생명나무가 소품으로 쓰인 것입니다. 왜 하느님 나라의 백성들은 자기의 뜻을 내세우면 안되고, 하느님의 뜻에만 순종하며 살아야 하는지를 설명하신 거에요.

선악과 사건은 하느님도 기대치 못했던 얘기지 못했던 그런 우발적 범죄가 일어나서 하느님이 긴급하게 어떤 조치를 취한 그런 사건이 아닙니다. 그러면은 하느님은 전지 전능하신 분이 아니죠? 그들이 따먹을 걸 몰랐단 말이에요? 그리고 그걸 막을 수도 없었단 말입니까? 하느님은 전지전능하시고 편재 하신 분입니다. 아담과 하와가 선악과를 따먹을 때 어디에 계셨을까요? 전지전능하시고 편재하시고 무소부재 하시다는 건 하느님이 그 자리에 계셨다 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하느님이 안 막았단 말입니다. 안 막은 정도가 아니라 선악과를 동산 중앙 잘 보이는 곳에다가 심어 놨어요. ? 따먹고 뭔가 배우라고요. 선악과는 따먹지 말라고 금지의 열매로 주신 게 아니라, 너희들 이것 따먹고 과연 인간들이 하느님의 말을 듣지 않고 자기들 스스로 자기들의 인생의 주인이 되어서 살면 어떤 결과가 초래하게 되는지를 보고 배우라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창세기 1장부터 쫙 끌고 나가시는 거에요. 누구 보라고? 교회 보라고. 읽으라고.

피조물은 하느님께 대한 순종의 삶을 포기하는 순간 마귀화 되어요. 그런 자들은 절대 하느님 나라의 못 들어갑니다. 그 설명에 선악과 사건과 실락원 사건이 모형으로 사용이 되고 있는 거에요. 물론 마귀는 실존하는 존재에요. 그러나 마귀는 하느님의 정적으로 하느님도 때론 버거워하시는 그런 존재가 아니라, 하느님의 은혜의 지리를 떠난 모든 도덕적 피조물들의 상태를 상징적으로 함의하고 있는 존재인 거에요. 마귀는 피조물입니다. 하느님은 창조주세요. 피조물은 창조주가 훅 불면 언제든지 티끌로 돌아가야 되는 게 피조물이란 말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느님이 마귀라는 존재를 만들어 놓고 그와 어떤 대결구도의 그림을 교회에게 보여 주면서 그게 하느님이 얼마나 미워하시는 것인지를 보여 주시는 거예요. 우리에게 가르쳐 주시는 거란 말입니다. 하느님의 은혜의 자리를 떠난 모든 도덕적 피조물들의 상태, 그게 마귀에요. 그래서 우리 주님께서도 하느님의 은혜를 떠난 자들의 모형으로 나타난 바리새인들에게 너희의 아비는 마귀다 라고 말씀하셨던 거에요. 마귀의 자식이라는 말은 그들이 곧 마귀라는 말 아니에요? 마귀 자식 마귀. 그 말은 주님께서 분을 이기지 못하시고 엉겁결에 내 뱉으신 말이 아니에요. 성경은 하느님의 은혜의 자리를 거부하고 불순종의 길에 들어선 모든 인간을 마귀와 하나로 보세요. 그건 제 추측이 아닙니다. 성경이 이야기 하고 있는 바에요.

 

창세기 314절 보세요. 14 주 하느님께서 뱀에게 말씀하셨다. “네가 이런 일을 저질렀으니 너는 모든 집짐승과 들짐승 가운데에서 저주를 받아 네가 사는 동안 줄곧 배로 기어 다니며 먼지를 먹으리라.

뱀은 마귀의 상징적 모형으로 등장한 동물이죠? 다 아시죠? 하느님은 그 마귀에게 흙을 먹을 수 있는 권세를 주십니다. 여러분 뱀이 진짜 흙만 먹나요? 아니죠. 보아 뱀 같은 거는 사슴도 잡아 먹습니다. 꿀꺽 삼켜 버려요, 근데 하느님께서 인간의 타락 이후에 뱀에게 종신토록 흙을 먹어 라고 하신 것이 무슨 의미일까요? 그 명령 바로 아래를 보면 답이 나와요.

창세기 31919 너는 흙에서 나왔으니 흙으로 돌아갈 때까지 얼굴에 땀을 흘려야 양식을 먹을 수 있으리라. 너는 먼지이니 먼지로 돌아가리라.”

보세요. 타락한 인간은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간다고요? 흙에서 와서 흙으로 가요. 이 흙이 바로 마귀의 밥인 거에요. 그러니까 하느님께서 뱀에게 종신토록 흙을 먹어 라고 말씀하신 것은, 마귀와 하느님의 은혜의 자리를 떠나서 흙으로 돌아 가게 되어 버린 바로 그 자들, 하느님의 순종의 자리를 떠난 그 자들을 하나로 보시는 것입니다. 먹고 하나로 연합이 되게 만드시는 거에요. 마귀는 타락한 인간을 먹고 거대한 집단적 존재가 되는 거예요. 마귀가 뱀이 흙을 먹고 뱀이 되는 거에요. 거대한 집단적 뱀. 교회가 예수를 먹고 거대한 하나의 유기체가 되는 원리와 같은 원리인 거에요. 그게 연합의 원리라는 거거든요. 대표성의 원리. 우리가 음식을 먹게 되면 그 음식이 내 살과 피가 되어서 나 가 되잖아요. 그렇죠? 바로 그런 원리에요. 그래서 주님이 바리새인들에게 너희는 마귀의 자식이다 라고도 이야기 하신 것이고, 뱀들아 독사의 새끼들아 라고도 이야기 한 거에요. 연결이 되세요? 하느님의 은혜를 떠나서 자기 마음대로 자신의 소원을 추구 하며 자신이 그려 놓은 행복을 쫓아서, 하느님으로 말미암아 행복이 아니라 자기가 그려 놓은 행복을 쫓아서 열심히 사는 것이 바로 뱀에게 먹힌 흙, 또 다른 뱀들의 삶, 마귀의 삶인 거에요. 자기를 떠난 타락 천사인 마귀가 그러했고, 아담이 그러했잖아요. 그 전체가 마귀라는 집단적 존재가 되어서 그들은 절대 하느님 나라 못 들어간다 를 설명해주는 그림인 것입니다. 하느님을 떠난 모든 존재는 전부 다 뱀에게 먹힌 흙이라는 거죠. 따라서 하느님을 알지 못하는 모든 이들은 뭐다? 마귀인 거에요. 그래서 귀신 들린 자라는 개념을 우리가 잘 이해해야 되는 것입니다. 예수를 알지 못하는 모든 인간이 귀신 들린 자에요. 그런데 흙에서 난 인간이 타락을 하고 하느님의 저주를 받아서 다시 흙으로 돌아가는 걸 성경이 죽음이라고 해요.

 

창세기 217절 보세요.17 그러나 선과 악을 알게 하는 나무에서는 따 먹으면 안 된다. 그 열매를 따 먹는 날, 너는 반드시 죽을 것이다.”

흙으로 돌아가리라 가 아니라 정녕 죽으리라 라고 이야기 하죠? 그죠? 그러니까 하느님이 있으라 한 순종의 자리를 떠나서, 은총의 자리를 떠나서, 자기 스스로 인생의 주인이 되어서 자기가 원하는 행복을 추구하면서 사는 그게 뭐에요? 죽은 상태에요. 죽음(死亡). 그게 뱀에게 먹힌 흙의 삶입니다. 근데 그 죽음은 무엇의 결과다? 죄의 삵이죠. 로마서 6. 그러면 이제 죄의 정의가 자명하게 나오죠. 죄는 단순히 여러분이 거짓말하고 도둑질하고 뭐 간음하고 살인하고 이런 세목으로 표현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이 창조의 목적에 맞게 잘 지어놓은 어떤 것이..... 순종과 은총의 자리를 떠나 자기 맘대로 자기를 위해서 살게 되는, 그 자리로 행하는 모든 사고와 행동, 이런 것들, 이게 전부 죄에요. 그러니까 지금도 우리는 죄 속에 살고 있는 거죠.

솔직해져 보자고요. 여러분 예수 왜 믿습니까? 여러분 위해서 믿죠? 하느님 위해서 믿습니까? 여러분 위해서 믿는 그 믿음이 죄입니다. 거기에서 하느님 때문에 나는 하느님의 영광을 위해서 예수를 믿는 자로 지금 바뀌어 가는 거에요. 따라서 내가 천국 가기 위해 나는 예수를 믿어요, 내가 천국 가기 위해 나는 신앙생활을 해요, 이게 죄라니까요.

인간은 철저하게 이 세상에서 나는 나를 위해서 살아서는 안 되는 존재였구나. 하느님 절대 의존적 존재로 하느님에게 이끌려 사는 존재인데 나는 여태까지 내가 내 인생의 주인이 되어서 내가 내 인생의 왕으로 살았구나 이거 배우는 것입니다. 그리고는 그 삶의 결과가 얼마나 처참한지를 우리의 인생을 통해서 배우는 거예요. 그리고 하느님 나라에 가서 하느님만 꼭 붙들고 하느님만 사랑하는 자가 되는 것입니다. 그게 우리의 인생의 목적인 거에요. 그렇게 마귀의 음식으로 사는 삶을 죄라고 하고 바로 그러한 삶의 결과가 죽음인 거에요. 그래서 마지막 때에 마귀라는 존재가 유황 불못에 들어가게 되는 것으로 심판이 끝나 버리는 거에요. 그들은 절대, 그런 사고와 행위로는 절대 하느님 나라 못 들어 간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다 말씀 드린 대로 거기에서 그 마귀는 집단적 존재에요. 그러니까 마귀라는 존재는 하느님의 은총을 떠나서 독립성과 무의탁성을 지닌 존재로 사는 모든 도덕적 피조물을 총칭 한다고 생각하시면 돼요. 도덕적 피조물이 뭐죠? 하느님의 모든 피조물 중 천사와 인간을 도덕적 피조물이라고 하는데 그들은 하느님 절대 의존의 상태로 살도록 지어진 존재에요. 그런데 그들이 하느님을 향한 순종의 자리에서 독립과 무의탁을 외치며 떠났을 때 그들은 모조리 마귀 집단이 되는 거에요. 그들은 자기에게 유익이 되고 자기가 좋아하는 것을 선이라 칭하고 자기에게 해가 되고 자기가 싫어하는 것을 악이라고 칭하면서 스스로 선악을 판단 하기 시작했어요. 그게 선악과를 먹은 상태인 마귀의 상태인 거에요.

원래 도덕적 피조물들은 하느님이 선이라고 하는 것을 선으로 받아들이고 하느님이 악이라고 규정하신 것을 악으로 받아들여야 하는 존재에요. 그런데 그들이 왜 우리가 하느님의 말과 뜻만 쫓아 살아야 하느냐고 반란을 일으킨 거예요. 그래서 선악을 자기들이 판단하기 시작했어요. 뭘로? 도덕과 윤리와 사회법으로. 그래서 자기들이 좋아하고 자기들에게 유익이 되는 어떤 수준에 오면 착한 거, 선한 거, 그게 아니면 악한 거, 더러운 거, 이렇게 자기들이 판단하기 시작했다고요. 그건 진리로만 판단할 수 있다. 그러니까 진리가 예수님인 거에요. 그건 예수님에 의해서만 판단되어져야 하는데 자기들이 저건 착한 거, 저건 악한 거, 이렇게 구분을 했단 말입니다. 그게 뭐예요? 하느님만이 판단하고 분별하고 심판할 수 있는 하느님의 심판권을 인간이 도둑질 해가 버린 거란 말입니다.

잘 이해하셔야 되요. 그래서 교회 안에서 도덕적이고 윤리적인 삶을 못 살아내는 사람도 있을 수 있는 것입니다. 그게 착함이 아니거든요. 착함, 선함, 토브 라는 말은, 하느님께서 우리 안에서 착한 일을 시작하셨다, 거기에서 그 인용 된 토브 라는 단어는 보시기에 좋았더라에서 나온 거에요. 그러니까 함이라는 건 하느님의 창조의 목적의 자리로 가서 제 역할을 해내는 걸 착함이라고 하는 거에요. 함이라고 하는 거예요. 그래서 하느님께 순종을 하기 위해서 거짓말 한 게 착함인 거에요. 사무엘. 하느님의 말에 순종하기 위해 죽여 그러면 죽이는 게 참함인 거에요. 여호수아. 하느님 말씀에 순종하기 위하여 나라 팔아먹어 그러면 팔아먹는 게 착한 거예요. 라합. 그러니까 도덕과 윤리로 선악을 판단한다면 여우리들은 아직도 아담적 존재인 입니다. 우리는 거기서도 한 발 위로 올라설 수 있어야 되는 거에요. 그런 것이 바로 마귀적 발상이에요. 그런 자들은 절대 하느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다는 것을 그렇게 알기 쉬운 그림으로 우리 성도에게 설명을 해 주는 거에요.

아무튼 마귀들은 그렇게 하여 선악을 판단하시는 하느님의 심판권을 침범하고 스스로의 힘으로 행복에 도달해 보겠다고 하는 만용을 부림으로 해서 하느님의 은총과 사랑을 거부해 버렸어요. 그걸 죄라고 해요. 하마르티아. 그 죄의 상태에서 비롯되는 모든 현상과 사건과 시도들이 전부 악이에요. . 그러니까 악은 죄가 현상으로 나타나는 것을 말해요. 그 악 때문에 인간세상에 고난이 온 것입니다. 모든 부조화와 무질서 불안 공허 슬픔 눈물 전쟁 질병이 모든 것들이 전부 악이에요. 그게 혼돈과 공허와 흑암이죠? 그죠? 거기에 은총이 부어지지 않았을 때 그게 지옥인 거에요.

 

그래서 창세기 1장이 혼돈과 공하와 흑암에서 시작이 되는 거에요. 그 상태가 지옥인데 하느님의 , 라하프, 감싸 안자마자 거기에 창조가 일어나게 되는 것입니다. 너희들은 바로 그런 은총으로 하느님의 백성이 된 거라는 걸 창세기 11절부터 설명해 주고 있는 거예요. 그러한 혼돈과 공허와 흑암이라는 악은 모두 죄의 결과물들이에요. 그리고 그 악의 결론은 죽음이며 지옥입니다. 그러니까 지금 우리가 겪는 모든 악은 전부 뭐라고 할 수 있어요? 지옥의 맛보기인 거에요. 쉬운 말로 여기가 지옥이라는 말입니다. 여기다 불만 보태면 지옥이에요. 하느님이 일반 은총을 싹 빼고 여기다가 불만 보태면 거기가 지옥입니다. 근데 악이, 그 지옥이 왜 왔다고요? 혼돈과 공허와 흑암이 어떻게 해서 이 땅에 도래했습니까? 도덕적 피조물이 자기 자리를 떠나 스스로를 위해 스스로가 정한 행복을 추구 하게 되면서 오게 된 거에요. 그게 지옥이라는 말이에요. 항상 나와 내 편, 내 것만을 위해 사는 이 세상, 그 자체로 작은 지옥의 모형인 것입니다. , 내 것, 내 편, 내 가족만을 위해서 사는 것. 그래서 다른 모든 이들이 내 경쟁자요, 적이 되는 거, 그게 바로 지옥이에요.

하느님은 당신의 백성을 그 지옥의 세상에서 건져내시겠다 라는 거에요. 따라서 우리는 이 지옥에서 대장 되려고 하면 안 돼요. 여기서 건져 내어져야 되는 것입니다. 거기서 나와야 되는 거에요. 나와 내 것만을 위해서 살던, 그리고 나에게 그런 능력이 있다 라고 믿고 살던, 그 사람이 그 지옥의 세상에서 그 삶에서 나오는 게 자기 부인이에요. 바보 되는 것입니다. 세상에서. 빼앗기고 비워주는 삶으로 자꾸 지어져 가는 것, 그게 세상에서 나오는 삶이에요. 선악과 사건이 뭐였어요? 자기주장 아니었어요? 왜 내가 당신 말만 들어야 돼요? 그러니까 그 반대편에 대척점에 우리 성도의 삶이 뭐겠냐고요? 자기 부인입니다. 그 삶으로 우리를 하느님이 끌고 가시는 거예요.

잘 보세요. 우리가 창세기 314절 꼭 짚고 넘어가야 할 부분은 마귀인 뱀과 흙 된 인간이 어떤 방법으로 한 몸이 되는가를 밝히는 거에요. 그 방법은 바로 강자인 뱀이 약자인 인간을, 흙을 먹는 방식으로 하나가 되는 거에요. 뱀이 흙을 먹음으로 하나가 되는 게 마귀가 집단적 마귀로 존재하는 방식이에요. 그게 바로 적자생존과 약육강식으로 요약이 되는 이 세상의 삶의 원리인 힘의 원리잖아요? 힘의 방식. 먹고 먹히는 순환 괘도에 따라서 먹히는 쪽이 먹는 자 쪽으로 흡수 통합이 되는 거예요. 그게 마귀들이 사는 삶의 원리란 말입니다. 약자는 항상 강자에게 복속이 되어버리는 이 세상. 일등만 기억하는 더러운 세상. 강한 자가 남고 약한 자는 강한 자의 몸을 구성하는 방식이에요. 그래서 주님은 힘의 원리로 살아가는 이 세상의 주인이 마귀라고 하는 거에요. 이 세상 모든 것은 하느님 거에요. 주님께서 이 세상의 주인이 마귀라고 하신 것은 이 세상의 삶의 방식이 마귀의 시스템으로 움직이고 있기 때문에 너희들은 지금 마귀의 조종 하에 살고 있는 거라는 의미에서 세상의 주인이 마귀다 라고 이야기 하는 거에요. 그리고 그 마귀를 가리켜 세상 신이라고도 하고 세상 권세 잡은 자라고도 얘기 하시는 거에요. 권세는 하느님께만 있어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마귀를 세상 권세 잡은 자라고 얘기하는 건 세상이 지금 마귀의 원리로 그 시스템 안에서 지금 살고 있다 라는 그런 뜻입니다.

하느님은 그런 마귀적 세상에 당신의 백성들을 나그네로 보내세요. 그러고는 그 죽음의 상태, 뱀에게 먹힌 흙의 상태가 얼마나 추악하고 더럽고 불가능하고 폭력적인지를 경험하게 해주세요. 그래서 나는 내 안에서 마귀를 경험해요. 마귀적 삶을 내 스스로에게 수시로 폭로 당합니다. 구원 받은 이후에도 마찬가지로. 그리고 그들을 그 세상 속에서 건져내시는 과정을 통과하게 하세요. 통과하게 하심으로 해서 그들이 어떠한 은총으로 하느님의 백성이 된 것인지를 가르치시는 거에요. 그래서 우리가어디까지 내려 가야 되냐면, 지금 하느님이 저를 지옥 보낸다고 해도 저는 아무 할 말이 없어요. 저는 그렇게 나쁜 놈입니다. 저는 죄인 중에 怪獸에요. 거기까지 내려가셔야 합니다, 그렇게까지 자신에게 폭로 당하셔야 돼요. 때로 야 이러고도 내가 예수 믿는 자가 맞아? 이 세상에서 제일 못된 놈이 나인 것 같아. 이렇게 자기를 인정할 때가 있죠? 잘 가시는 거에요. 그래서 그리스도교는 지옥에서부터 출발해야 한다 라고 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의 인생에서 지옥이 경험 안 되면 안 돼요. 마귀적 속성이 우리 자신에게 폭로가 안 되면 안됩니다. 그리스도교는 도덕적으로 윤리적으로 착한 사람이 되어 가는. 그걸 목적으로 하는 게 아니란 말입니다. 그런 하느님의 커다란 은총, 우리의 무력함을 설명하기 위해 소품으로 등장한 게 예수님의 십자가인 거에요. 이 세상의 삶의 원리가 강한 자가 약한 자를 먹고, 거대한 하나의 마귀가 되어 가는 것임과는 달리, 하느님의 나라의 삶의 원리는 강한 자가 약한 자에게 먹히는 십자가의 원리라는 것을 예수님의 그 골고다 사건이 우리에게 웅변해 주고 있는 것입니다.

 

(요한653-56) 53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이르셨다. “내가 진실로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가 사람의 아들의 살을 먹지 않고 그의 피를 마시지 않으면, 너희는 생명을 얻지 못한다. 54 그러나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는 사람은 영원한 생명을 얻고, 나도 마지막 날에 그를 다시 살릴 것이다. 55 내 살은 참된 양식이고 내 피는 참된 음료다. 56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는 사람은 내 안에 머무르고, 나도 그 사람 안에 머무른다.

보시다시피 하느님 나라의 삶의 원리는 강자가 약자에게 먹히고 둘이 한 몸이 되는 원리에요. 쉬운 말로 먹힌 자가 승리자가 되는 곳이 하느님 나라라는 것입니다. 그걸 예수님이 삶으로 십자가로 보여 주고 가신 거예요. 세상에게 먹혔어요. 졌어요. 맞아 죽었는데 그분이 승리 자가 되는 게 하느님 나라의 삶의 원리에요. 하느님 나라는 각자의 존재가 모두 자기를 위한 삶을 살지 않고 유기체적으로 연합이 된 한 몸의 유익을 위해 자신을 비워내고 털어내는 삶을 사는 나라라는 것입니다. 근데 그 한 몸이 누구예요? 한 몸의 머리가 예수. 그래서 만물은 예수로부터 말미암고 예수를 위하여 창조가 되었다 라고 이야기 하는 것입니다. 그건 하느님 나라 백성 전 존재들은 예수님처럼 그렇게 하느님의 영광을 위해서 하느님이 사랑하라고 하신 내 이웃을 사랑하는 것으로 승리를 하게 되는 거에요. 그래서 우리 모두가 왕인 거에요. 나 이외의 다른 전체가 나를 섬기기 위해 존재 하니까.

우리는 이 땅에 태어날 때부터 타락한 아담적 육신을 입고 태어나요. 마귀로 태어난다는 거에요. 그래서 아기들이 그렇게 막무가내인 거에요. 자기가 원하는 거 안 주면 무조건 울고불고 난리를 치잖아요. 오죽하면은 애기 보는 걸 베이비 시팅 이라고 하겠어요? 깔고 앉고 싶은 마음을 억누르면서 그래도 내 새끼니까 보는 거에요. 베이비 시터, 깔고 앉는 자. 부모의 입장, 주변의 상황, 전혀 고려하지 않고 내 것만을 얻어내려고 하잖아요. 아기들이. 누가 아기가 순진하다 그래요? 악당인 거에요. 하느님의 은혜를 떠난 모든 존재가 전부 그런 악당이에요. 나면서부터. 근데 그 뱀들은 항상 예수님의 발뒤꿈치를 물게 되어 있어요.

 

(창세315)15 나는 너와 그 여자 사이에, 네 후손과 그 여자의 후손 사이에 적개심을 일으키리니 여자의 후손은 너의 머리에 상처를 입히고 너는 그의 발꿈치에 상처를 입히리라.”

마귀는 여자의 후손, 즉 예수님의 발뒤꿈치를 무는 삶을 살아요. 근데 주님은 자신의 발뒤꿈치를 문 마귀에게 자신의 살과 피를 주는 방식으로 그 마귀를 하느님의 백성으로 바꾸어 내시는 거에요. 그게 은총입니다. 자신의 살과 피를 내어주어서 누군가에게 먹힘에도 불구하고 먹는 쪽이 먹히는 자에게 편입이 되는 것, 그게 바로 내어줌의 원리라고 하는 거에요. 그걸 성경이 사랑이라고 표현을 해요. 그래서 그 십자가를 사랑이라고 하는 거에요.

하느님은 우리 같은 흙에 불과하며 흙으로 돌아가야 하는 자들을, 당신은 나라에 데리고 들어가셔서 함께 사시기 위해서 그러한 손해와 상함을 감수해야 하셨다는 것을 우리가 그 그림을 통하여 배우는 거에요. 삼위일체 하느님은 그 자체로 만족이고, 그 자체로 풍요이고, 그 자체로 행복이며, 그 자체로 안식이에요. 하나님은 부족한 게 없어요. 근데 우리 같은 피조물들을 당신의 나라로 들이시기 위해서 거처가 따로 필요 없으신 그 하느님이, ? 영인데 영은 형체가 없는데 거처가 왜 필요해요. 그 하느님이 우리와 함께 살기 위해서 천국, 하느님 나라 라는 걸 만드셨단 말이에요. 그리고 거기서 우리와 함께 사시기로 했어요. 무소부재 편재하시는 그 하느님이. 심지어 성자 예수님은 우리와 함께 사시기 위해서, 그리고 보이지 않는 하느님을 육신을 갖고 있는 우리에게 눈에 보이게 계시하기 위해 영원히 육신을 입으시기로 작정을 하셨단 말입니다. 하느님의 그런 손해와 상함을 감수하고 우리와 함께 살게 된 걸 너희가 아느냐를 창세기 11절부터 묵계시록 끝까지 설명하고 있는 거예요. 그 중간에 십자가 팍 꽂혀서 이런 손해였다를 보여 주는 것입니다. 그런데도 너희가 너희만을 위해서 살 거야를 물으시는 거예요. 그게 성경입니다. 그걸 배워 가는 걸 신앙생활이라고 해요. 그런데 전부 앉아 가지고 이 지옥에서 대장 만들어 달라는 거 아닙니까? 여기서 살 찌워 달라는 거 아니에요? 그걸 그리스도교라고 합니까? 그런 사람들을 우리가 성도라고 하나요? 그렇지 않아요. 그리스도교는 그렇게 저급한 무당 잡교가 아닙니다.

우리 안에 발뒤꿈치를 물리시며 자신의 피와 살을 내어 주시는 예수가 이제 들어 오셨어요. 그리고는 그분이 내 삶을 사세요. 나의 옛사람은 십자가에서 죽이고. 그러면 나의 삶이 이제 어떻게 끌려가게 될까요? 세상에게 발뒤꿈치를 계속 물리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를 물어뜯는 그들에게 우리의 피와 살을 내어주어 그들을 나와, 성도인 나와 연합시키는 전도의 삶, 그걸 전도라고 하는 거에요, 그 삶을 살게 되는 거에요. 그래서 점점 우리가 이렇게 바보가 되는 거예요. 옛날 성질 다 죽었다. 왜 죽었어요? 하느님이 죽이신 것입니다. 점점 당해주고, 섬겨주고, 손해를 봤는데도 거기에 대해서 응전을 하지 않고, 그런 사람으로 조금씩 우리가 변해 가는 거에요. 끌려 가는 거에요. 그러나 그것 또한 우리가 하는 게 아니죠? 하느님의 은총을 떠난 자들은 끊임없이 자기 마음대로 살겠다고, 스스로가 그려 놓은 행복에 도달하겠다고, 그리고 자신은 그런 능력이 있다고 부산을 떨어요. 그게 창조의 목적을 무시 하는 마귀들의 하나느님 발뒤꿈치 공격인 거예요. 하느님은 창조주가 목적에 맞게 만들어 놨는데 아니라고 자기 맘대로 살겠다고 그리고 당신과 함께 있는 게 행복이 아니라 내가 원하는 행복이 있다고 간 게 하느님 발뒤꿈치 계속 무는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지금 하나도 빠짐없이 하느님의 발뒤꿈치 계속 물고 있는 거에요. 하느님은 근데 계속해서 우리에게 자기의 살과 피를 먹혀요, 빨리고 있어요.

예수님의 살과 피가 뭡니까? 나는 뭐로 왔다, 이 세상에? 말씀으로 왔어요. 그러니까 우리가 계속해서 그렇게 나는 마귀구나, 나는 계속해서 나만을 위해서 살 수 밖에 없구나, 나는 경건도 나의 유익의 재료로 쓰는 그런 못된 마귀 새끼구나를 계속 폭로 당하는데 예수님의 살과 피가 나에게 계속 떨어져, 먹혀져, 뭐가? 말씀이 나에게 계속 떨어져, 복음이 계속 떨어지는 거에요. 그러면서 내가 하느님이 원하시는 예수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으로 자라가는 거예요. 예수님의 살과 피를 먹으면서. 그리고 끊임없이 나의 마귀적 속성을 폭로 당하면서.

근데 계속해서 우리 안에 있는 그 마귀적 속성들, 그 오염, 죄의 잔존들은 계속해서 하느님의 발뒤꿈치 물게 하죠. 그럼 또 거기에 예수의 살과 피가, 말씀이 또 떨어지는 거에요. 그래서 올바른 복음이 제대로 떨어지지 않는 곳을 교회라 하지 않는 것입니다. 그들의 그 마귀적 속성을 발각 시키고, 폭로 시키고 그리고 거기에 복음을 쏟아 붓는 그런 올바른 말씀이 전해지지 않으면 그걸 교회라고 않는 거에요. 그렇게 우리가 계속해서 예수님의 발뒤꿈치를 물어 뜯고 있는데 하느님의 말씀이 계속 떨어지면서, ~ 나는 이런 큰 은총으로 예수에게 연합이 된 존재이구나를 알아가면서 점점 내가 부인이 되죠? 결국 마지막엔 어떻게 되요? 나의 옛사람이 죽죠. 보세요. 여자의 후손의 발 뒤꿈치를 마귀가 계속 물어 뜯습니다. 근데 여자의 후손이 그에게 살과 피를 계속 빼앗겨요. 주어요. 먹어라 그랬더니 나중에 이 마귀적 존재가 이 뒤꿈치에 밟혀서 죽어요. 그리고는 예수와 함께 새 몸으로 태어나는 거에요. 우리는 이 세상에서 그렇게 예수의 발에 밟히는 것입니다.

우리의 삶에 복음이 떨어진다는 건 여러분을 계속 해체시키고 여러분 공격하는 예수님의 발뒤꿈치로 와야 되는 거예요. 그래서 우리가 말씀을 듣고 무슨 세상적 위로와 격려를 받고 가면 안돼요. 우리는 예수님에게 짓밟히고 가는 거에요. 근데 하늘의 편안과 안식이 거기서 나에게 오는 거예요. 그게 성도에 올바른 삶인 것입니다. 그래서 창세기 315절을 원시복음이라고 하는 거예요. 아니 마귀가 뭐 발을 물어 뜯고 예수님이 머리를 밟는 게 무슨 복음인가? . 우리는 물어뜯는데 예수님은 우리에게 살과 피를 내어주고, 결국엔 옛사람을 죽여 버리고 새로운 존재로 탄생케 만드는 거에요. 그런데 그렇게 머리를 밟혀서 그냥 영원히 죽는 존재들도 있어요. 하느님의 선택 밖에 존재들, 끝까지 마귀로 살게 될 자들은 그렇게 머리를 밟힌 채로 영원한 불못으로 보내져서 천국 백성들에게 영원한 본보기가 되는 것입니다. , 우리가 저 지경에 처해도 아무 할 말 없는 존재였는데 어떻게 이렇게 하늘의 왕이 되었을까, 보는 거에요. 그래서 지옥은 있습니다. 그렇게 성도는 끊임없이 자기 자신을 신으로 삼아서 자신의 인생의 주도권을 스스로가 꼭 쥔 채로 하느님의 발뒤꿈치를 물고 있는 물고 있는 자기 자신의 실체를 폭로 당하면서 말씀으로 임하시는 하느님의 거룩한 발에 무참히 밟혀서 하느님의 은총의 자리, 하느님을 향한 순종의 자리로의 회귀를 소망 하는 자로 바뀌어 가는 거에요.

그래서 하느님은 때때로 우리가 왜 날 좀 가만히 안 놔두냐고, 누가 도와 달래냐고, 방해나 하지 말라고, 그리고 날 왜 이렇게 짓밟느냐고 그렇게 불평을 할만한 사건과 상황들을 때때로 허락하시는 거에요. 그게 예수님의 발 뒤꿈치가 우리들을 계속 밟고 있는 거예요. 우리가 의지하고 있는 하느님 이외의 것이 하나하나 짓밟혀서 우리에게서 떨어져 나가야 하기 때문에 우리의 삶에 예수님의 발이 수시로 날라 드는 것입니다. 우리는 그렇게 선악과를 따먹고 얻은 경향과 성향 그리고 그 마귀적 상태에서 자신을 보호하고 자신을 행복하게 하려 쌓고 익힌 모든 힘과 습관들을 否認당하고 해체 당하는 삶을 살아야 맞는 거에요 . 따라서 성도는 자신의 소원과 비전과 야망을 이루는 게 아니라 자꾸 부인을 당하고 기각 당하며 하느님의 은총만을 꼭 붙들고 자신의 행복의 근원은 하느님뿐이라는 것을 배워가야 하는 것이고, 자신의 힘으로는 절대 하느님의 자녀로써의 자격을 갖춘 수 없다는, 그 은혜의 필연성을 절감하는 삶을 살아야 하는 거예요. 따라서 그리스도교는 스스로의 힘으로 고난에서 벗어나서 행복에 도달하려 하는 다른 모든 종교들과는 완전히 다른 것입니다.

우린 이미 하느님의 행복에 도달해 있는 자들로서, 어떻게 우리가 그곳에 도달하게 되었는지를 배우고 있는 중이지, 우리가 원하는 행복에 도달하기 위해 신앙생활을 하는 아니란 말입니다. 그런 것이 성도의 인생이어야 한다면, 우리의 연약함과 불가능함이 스스로에게나 타인에게 자주 들키는 게 유익이에요, 성도는 여전히 죽을 육신을 입고 있는 상태에서 성자의 자리로 완성이 될 수 없어요. 그래서 우리를 위한 새 몸이 허락되어 있다 라고 성경 이야기 하는 거에요.

따라서 성도는 죽을 육신 속에 새 생명을 가진, 다른 말로 세상과 천국이 오버랩 되어 있는 아주 기묘한 삶을 살면서 세상의 악마성과 천국의 거룩성을 조금씩 번갈아 가면서, 맛보면서 살아야 되기 때문에 자신이 자신의 연약함과 불가능함도 자주 폭로가 되는 거고, 그 속에서 거룩한 자기 부인이 일어나는 것이며, ? 야 어떻게 이런 존재가 추구하는 소원과 비전과 야망을 좇아 살 수 있는가, 나에 대한 신뢰를 자꾸 놓는 거예요.

그리고 때로는 그런 자기 부인 속에서 내 안에 새 생명으로 자리하고 계신 예수의 삶을 경험하기도 하는 거예요. 내가 자꾸 부인 되는데 근데 내 삶 속에서 간혹 하나님이 원하시는 그런 삶이 나올 때가 있단 말입니다. 그건 누구의 삶? 내 안에 사는 예수의 삶(갈라20:20) 그러니까 우리는 자랑을 할 수가 없는 거예요. 따라서 성도의 목표지점은 착한 삶이 아니에요. 착한 삶은 하느님 나라에서 새 몸을 입은 뒤에 우리가 원 없이 영원히 살게 될 거에요. 그런데 그 삶을 좀 많이 살라고, 그냥 하느님 나라에서 영원히 살게 될 그 삶을 이 세상에서 좀 많이 살아서 나를 좀 기쁘게 해 달라고, 우리를 이 인생 속에 던지셨겠습니까? 성도의 인생은 착한 삶이 목적이 되어서는 안 돼요. 하느님의 말을 내가 듣는 자로 변했는가를 목적으로 삼아야 되는 것입니다. 성도 임에도 불구하고 그 삶 속에 더러움과 추악함이 나올 수 있어요. ? 나는 이런 자라는 게 폭로되는 그런 과정을 때에는 우리가 무참하게 사람들 앞에서 개망신을 당할 수도 있어요. 예수 믿는 놈이 그 따위 짓을 해? 이런 욕을 먹을 수도 있어요. 그 때 죽고 싶죠. 그런 일을 겪으면서 하느님 나는 이렇게 하느님이 지금 지옥 보내도 아무 할 말 없는 그런 존재입니다. 그리로 자꾸 자기를 밀어 내리는 것입니다. 어줍지 않은 착한 삶, 세상이 규정해 놓은, 도덕과 윤리로 판단에서 착한 삶이라고 해 놓은 그 삶을 살아내서, 오히려 하느님 앞에, 아이 나는 이 정도 삶을 살아냈는데 하느님 제보다는 내가 낫죠? 그게 바리새인의 기도 아니었습니까? 하느님 저 세리같이 않게 태어나게 해주셔서 감사합니다. 그랬더니 하느님이 이 뱀 새끼야. 그게 뱀이란 말입니다. 뱀에게 먹힌 흙. 우리의 삶에 일어나는 착한 일, 착한 삶은 우리 안에 계신 하느님이 완성하시고 성취하실 일이에요. 그리고 그렇게 성취가 되고 완성이 된 하느님의 백성은 이제 영원히 착하게 살게 되요. 토브의 삶, 하느님의 창조의 목적에 맞는 삶. 그 삶을 이제 영원히 살게 되요. 성도는 다양성 속에서, 어떤 이는 착한 일을 열심히 하다가 정말 하느님이 도우시니까 이렇게 불가능한 자의 삶 속에서도 착한 삶이 나오는구나, 내 안에 사는 예수가 진짜 밖으로 나오는구나를 경험하게 해주실 수도 있는 거고, 어떤 사람은 착한 삶에서 끊임없이 실패하면서 하느님께서 예수님을 보내 주지 않으셨다면 난 어떻게 될 뻔 했는가? 이걸 가르쳐 주실 수도 있는 거란 말입니다.

그러니까 성도는 성도가 된 이후에는 이렇게 저렇게 반드시 살아야 한다라는 공식 같은 것은 전혀 없는 거예요. 따라서 성도가 되었으면 당연히 이 정도 수준까지 착해 져야 되고, 이 정도 분량의 선행은 쌓아야 하지 않는가 라는 판단, 그리고 이 정도의 종교 행위는 나와 줘야 되지 않는가 라는 그런 판단을 우리가 할 게 아니에요. 그건 진리만이 판단할 거란 말입니다. 예수만이 판단을 거란 말이에요. 우린 그저 우리는 하느님의 은총이 아니면 안 되는 사람들 이라는 것만 배우면 돼요. 그러니까 우리 주위에 있는 분들에게 넌 예수 믿고도 어찌 아직 그 모양이냐 이런 소리 함부로 하면 안 됩니다, 그러는 너는, 너는 착하냐? 착한 게 뭔지도 모르면서 그러는 너는? 대신 질문해 주세요. 착한 거는 그렇게 자기보다 연약하고 나약한 이들을 자기 스스로 약하고 악한 것으로 판단을 해서 자기를 위로 올리는 게 착한 삶 아니란 말이에요. 오히려 아래로 더 내려가서 지금 당장 하느님이 나를 지옥에 보내도 할 말이 없는 그 사람이 누구를 가리켜서 너는 예수 믿고도 아직 그 모양이야? 이런 말을 어떻게 하냐고요? 너는 예수를 믿고도 어떻게 아직 그런 것도 못 끊었어? 넌 예수를 믿고도 어떻게 아직도 그런 욕을 해? 그 상황 속에서 하느님이 그를 만져가고 계신 걸지도 모르잖아요.

 

로마서 520절 보십시오. 20 율법이 들어와 범죄가 많아지게 하였습니다. 그러나 죄가 많아진 그곳에 은총이 충만히 내렸습니다.

율법이라는 게 우리에게 주어진 이유가 뭡니까? 율법을 잘 지켜서 착하게 살라는 거에요? 거짓말 하지 말아라, 부모님에게 효도해라, 간음 하지 말아라, 도둑질 하지 말아라, 착하게 그거 잘 시켜서 하느님을 기쁘게 해드리라고 준건가요? 여기서 뭐라 그래요? 범죄를 더 하게 하려 함이래요.

율법이 들어온 건, 율법이 우리에게 주어진 건, 범죄를 더하게 하려 함이래요. 근데 바리새인들은요 전자의 사고를 갖고 율법을 대했어요. 이거 잘 지켜서 하느님을 기쁘게 해 드려야지, 행복에 도달 해야지, 하늘에 도달 해야지. 그래서 목숨 걸고 지켰습니다. 뒤에서 적들이 칼 들고 쫓아 오는데 안식일이라는 율법을 지키지 위해서 뛰지를 않았어요. 목숨 걸고 지킨 거죠, 그만하면. 그런데 그런 이들에게, 그렇게 착하게 살자 이들에게, 일주일에 두 번씩 금식하여 그 금식한 돈으로 가난한 이들을 도왔던 그들에게, 예수님이 내려 오시더니 이 뱀들아 독사의 새끼들아 라고 이야기 하더란 것입니다. 누가 너희들에게 그걸 지켜서 내 앞에서 자랑하라 그랬니?

천국이, 내가 여기 와있는데 진리가 여기 와있는데 나를 붙들고 하느님 나를 살려 주세요 라고 해야 될 인간들이 그걸 지켜서 내 앞에 내놓겠다고 하니 네가 뱀이 아니고 뭐냐? 뱀에게 먹힌 흙이라는 것입니다. 그런 인간들의 시도가 오히려 선악과를 따먹고 뱀에게 먹혀 있는 마귀라는 거예요. 따라서 율법은 우리 인간들이 스스로 지킬 수 없는 것이 자명해지죠? 왜냐하면 율법이라는 건 그 자체가 하나님의 성품이며 하느님 나라의 삶의 원리를 말하는 거예요. 그게 인간의 힘으로 지켜질 수 있다면 인간이 신이죠. 하느님의 성품과 하느님 나라의 삶의 원리가 인간의 힘으로 가능하다면. 그러니까 율법 그러니까 자꾸 여러 가지 세목으로 나눠진 그런 생각하지 마세요. 예수님이 율법이 뭐라 그랬어요? 너 말고, 너 자신 말고, 하느님과 네 이웃을 사랑하는 거, 그 삶이 하느님의 성품이고 그 삶이 하느님 나라의 삶의 원리인데 너희들은 지금 너만을 위해서 살고 있잖아, 네 것만을 위해서 살고 있잖아. 그거를 확인하라고 우리에게 준 게 율법이란 말입니다. 그걸 여러 가지 세목으로 나누어서 진짜 너희들이 이걸 온전히 지킬 수 있는지 한번 볼래 라고 그냥 주신 거란 말이에요. 그거 안되잖아요? 우리 스스로 그 삶을 누구도 살 수 없잖아요. 율법은 완벽하게 지켜야 의롭다 함을 받을 수 있어요. 완벽하게 지켜야.

로마서 213절 보세요. 13 율법을 듣는 이가 하느님 앞에서 의로운 이가 아니라, 율법을 실천하는 이라야 의롭게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 말은 율법을 완벽하게 지켜야 의롭다 하심을 얻는다 라는 그런 뜻이에요. 듣고 흉내만 내는 게 아니라 행하는 자, 완벽하게 지켜야 의롭다라는 뜻이거든요. 그래서 야고보도 이렇게 얘기하는 거예요  

야고보서 21010 누구든지 율법을 전부 지키다가 한 조목이라도 어기면, 율법 전체를 어기는 것이 됩니다.

죽을 때까지 율법을 다 지키다가 죽는 순간 정신이 혼미해서 하나 어겼어요. 그러면 그 동안의 삶이 전부 죄가 된다 라는 거에요. 이걸 누가 지킬 수 있냐 말입니다. 율법은 그걸 착하게 지켜서 하나님께 나오라고 주신 게 아니라, 너 지금 하느님을 사랑하고 있니 너를 사랑 하고 있니, 그거 확인하라고 우리에게 준거란 말이에요.

따라서 우리가 착한 일 몇 개 더 하고 덜한 거 이거 중요한 거 아니라니까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떤 사람들은 하느님의 말씀은 여기 교회 말씀을 듣고, 교회는 자기 교회 다닌다 그래서 왜 거기서 안 나오세요 그랬더니, 자기 00님이 착하시데. 아주 도덕과 윤리를 잘 지키며 성인군자래요. 그래서 본받으려고 따뜻하니까. 그게 마귀적 집단인 거에요. 우리는 그걸 지켜서 본받아서 행함으로 하느님께 칭찬받는 존재들이 아니라, 오히려 인간들은 하느님의 은혜가 임하지 않으면 이럴 수 밖에 없구나를 서로 피차간에 폭로 당하는 거에요. 이렇게 율법은 우리 힘으로 지킬 수가 없어요. 그 말은 바꿔 말하면 우리 피조물은 스스로의 힘으로 하느님의 성품으로 하느님 나라의 삶의 원리로 살 수 없다는 거고, 하느님 나라에 입성할 수 없다는 걸 보여주는 거에요. 그러니까 항복하고 너희들은 하느님의 말만 들어야 돼, 이걸 우리에게 가르쳐 주시는 거에요. 그래서 바오로는 율법을 다 지켜야 의롭다 하심을 얻을 수 있다고 해놓고 금방 이렇게 이야기 하는 거에요.

 

로마서 32020 어떠한 인간도 율법에 따른 행위로 하느님 앞에서 의롭게 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율법을 통해서는 죄를 알게 될 따름입니다.

금방 다 지켜야 된다 라고 해놓고 율법으로는 절대 의롭다 하심을 받을 육체가 없다 라고 이야기를 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율법은 우리 피조물들이 스스로의 힘으로 하느님의 자리에 도달 할 수 없음을 폭로 하기 위해서 우리에게 주어진 거에요. 율법으로는 오르지 죄가 무엇인지를 깨닫는 일 밖에 할 수가 없어요. 우리는 율법을 받아 들고 우리는 도저히 그것을 다 시킬 수 없음을 경험하며 죄인 됨을 깨닫게 되는 거고, 또 한편으로는 아담처럼 스스로 지켜보겠다고, 그리고 지킬 수 있는 힘이 자신들에게는 있다고 교만을 떠는 그런 죄인 됨의 모습을 또 폭로 당하기도 하는 거에요. 따라서 거짓말 하지 마라, 간음 하지 마라, 도둑질 하지 말아라 라는 등의 율법은 일차적으로 우리의 힘으로 지켜서 우리의 착함과 의인 됨을 입증해 보라고 주신 게 아니라,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를 입지 않고는 항상 거짓말 할 수 밖에 없는 자이고, 항상 세상과 간음할 수 밖에 없는 자이고, 항상 남의 것을 탐낼 수밖에 없는 자라는 것을 폭로 당하라고 주신 거에요. 그러한 폭로 속에서 자기 부인이 나오고, 내 안에서 실제로 거짓말 안 하고, 간음 하지 않고, 도둑질 하지 않고, 부모에게 효도하는, 부모에게 오르지 순종하라는 예수의 삶이 나오는 것입니다.

구원받은 성도 마찬가지예요. 구원 받은 성도 또한 열심히 노력을 해서 율법을 지켜내는 것을 목적으로 해서 사는 게 아니라, 그렇게 자신 속에 내재해 있는 아담적 죄성이 낱낱이 폭로가 되고, 스스로가 스스로에게 주었던 신뢰를 하나 하나 내려놓게 되면서 우리는 비로소 우리 안에 살아계신 예수의 삶을 밖으로 내어 놓을 수 있는 삶을 살게 되는 거에요. 그래서 바오로가 죄가 있는 곳에 은혜가 넘친다 라고 이야기한 것입니다. 내 죄가 나에게 그리고 세상에게 자꾸 폭로가 될 때마다 근데 나에게 말씀이, 약속이, 언약이, 계속 떨어지잖아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너는 구원받았다 라는 그러한 말씀이 떨어지면서 아~ 이게 왠 은혜냐, 이걸 우리가 경험 하는 거예요. 그러면서 우리는 하느님 앞에 면목 없이 서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야 우리가 보화를 담은 질그릇이 되지요. 지금은 우리가 보화잖아요? 예수님이 질그릇이고. 보화를 담은 질그릇으로 바뀌어 가는 거예요. 나는 그릇이구나. 내가 존귀한 건 내 안에 있는 예수 때문에 존귀한 거구나. 내가 무슨 착한 일을 많이 하고 내가 무슨 도덕적 윤리적으로 엄청난 일을 행하고 크나 큰 선행과 업적을 쌓아서 그렇게 보배가 된 게 아니라, 나는 질그릇인데 언제 깨져도 깨질 질그릇인데 내 안에 보화가 담겨 내가 가치 있는 존재가 되는 거구나를 깨닫는 거에요. 그리고 하느님 나라에 가서 그렇게 사는 것입니다. 그리고 거기서 죽도록 착한 일 하세요. 진짜 착한 일. 그러니까 우리들 삶 속에서 세상이 규정해 놓은 도덕적 윤리적 그런 삶의 성숙이 너무 더디게 온다고 조바심 내지 마세요. 물론 우리에게는 성령이 소원을 두고 행하시는 일, 그 부분이 있기 때문에 조바심이 나게 되어 있어요. 그러나 거기서 절망하시면 안돼요. 우리가 잘 가고 계시는 거에요. 오히려 쑥쑥 변하고, 쑥쑥 성숙해지게 되잖아요? 그러면 우리 자신을 자꾸 의지하게 되요. 거기에 점수를 주게 되요. 그걸 자기의 라고 합니다. 자기 가치 증진, 자기 가치 향상, 나의 가치를 위로 올려서 남들에게 인정받고 싶어하는, 그게 세상의 삶의 원리잖아요. 그게 지옥의 삶의 원리라니까요. 그게 마귀의 삶인 것입니다. 세상에게 인정 안 받아도 돼요. 우리들 안에 예수가 계셔서 우리들은 소중하고 귀중한 분들인 것입니다.

 

로마서 71-6절 보세요. <율법에서 해방된 그리스도인> 1 형제 여러분, 여러분이 율법을 아는 사람들이기에 말합니다. 율법은 사람이 살아 있는 동안에만 그 위에 군림한다는 사실을 모릅니까? 2 혼인한 여자는 남편이 살아 있는 동안에만 율법으로 그에게 매여 있습니다. 그러나 남편이 죽으면 남편과 관련된 율법에서 풀려납니다. 3 그러므로 남편이 살아 있는 동안에 다른 남자에게 몸을 맡기면 간통한 여자라고 불리지만, 남편이 죽으면 그 율법에서 자유로워져, 다른 남자에게 몸을 맡겨도 간통한 여자가 되지 않습니다. 4 나의 형제 여러분, 여러분도 이와 같이 그리스도의 몸 덕분에 율법과 관련해서는 죽음으로써, 다른 분 곧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되살아나신 분의 차지가 되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하느님을 위한 열매를 맺게 되었습니다. 5 사실 전에 우리가 육에 갇혀 있을 때에는, 율법으로 말미암아 생겨난 죄 많은 여러 욕정이 우리 지체 안에서 작용하여 죽음에 이르는 열매를 맺게 하였습니다. 6 그러나 우리가 이제는, 우리를 사로잡고 있던 율법과 관련해서는 죽음으로써 그것에서 벗어났습니다. 그리하여 법전이라는 옛 방식이 아니라 성령이라는 새 방식으로 하느님을 섬기게 되었습니다.

열매열매 하니까 자꾸 열매를 맺어야 되는데. 우리는 가지라니까요. 거기에 붙어 있으면 내 안에 있는 예수가 열매를 맺는 거지 내가 노력하여 맺는 게 아니란 말입니다. 율법은 선한 것이기 때문에 죽을 수가 없어요. 따라서 누가 죽어야 되요? 이 관계가 깨질 라면. 내가 죽어야 되요. 내 옛사람이. 그래서 예수님에 의해 예수님의 십자가 안에서 내가 죽었어요. 그 삶을 엑츄어라이징 해서 이 세상에서 내가 예수님의 발에 짓밟히면 하루하루 경험하면서 사는 거예요. 나는 이런 존재구나. 그래서 예수님이 밟아서 머리를 부숴 버리지 않으면 나는 계속 살아서 올라오겠구나 뱀 대가리처럼. 밟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은총의 필연성만 잘 배우시고 가면 되는 거예요. 어떤 면에서 우리 착하게 살고 윤리적 도덕적으로 훌륭한 삶을 살아서 남에게도 존경 받고 인정받고, 교회에서도 인정받고, 하느님께도 칭찬 받겠다 라는 그런 시도를 한다면, 그 자체가 죕니다. 굉장히 선한 시도 같지요? 그러나 그렇다고 열심히 부리지 말라는 건 아니에요. 우리 삶 속에 반드시 열심이 나옵니다. 근데 누구의 열심이에요? 하느님의 열심이에요. 은혜 왕 노릇이라는 게 뭐냐면, 우리 안에서 소원을 두고 행하게 하시는 하느님의 열심인 거에요. 근데 그 하느님의 열심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자꾸 실패해요. 그래서 나중에는 내가 열심을 부리는 게 아니라 내 안에서 열심을 부리시는 그 하느님의 음성을 듣는 것입니다.

그래서 내가 열심히 해 놓고도 내 공로가 안 되는 그 상태로 지어져 가야 되는 거에요. 자꾸 내가 열심히 해서 착해지면 안되요 우리 힘으로 착해지면 안되요. 하느님의 힘으로 착해지셔야 되요. 그들이 하느님 앞에 가서 자기를 완전히 비울 수 있어요. 안 그러면, 공로가 요만큼이라도 남아있으면 그것 때문에 지옥가요. 그래서 복음인 겁니다. 우리가 할 게 아무것도 없기 때문에 복음인 거예요.

우리에게 아직 도덕법이 아직 남아 있다면 그게 무슨 복음이에요? 의문에 쓴 증서, 율법, 그게 채무 증서. 법적인 채무 증서 근데 그걸 십자가에서 도말 하셨어요. 근데 도덕법이 아직 남았다면 채무 증서를 다 도말 한 게 아니라 빚을 요만큼 남겨 두고 가신 거 아닙니까? 교회가 전부 그게 뭔지도 모르면서, 착하게 살아야 돼, 도덕적으로 윤리적으로 착하게 살아야 돼, 이러고 있단 말입니다. 우리는 아무것도 안 해도 되요. 그런데 내 안에 예수님이 나를 부인해가시면서 내 머리를 계속 밟기 때문에 내 옛사람이 부인되어 가면서, 내 삶 속에서 열매가 맺히게 되어 있어요. 그리고 내 안에서 거룩한 열심이 나오게 되어 있어요. 그래서 성도의 열심은 어떤 면에 있어서 실패하기 위한 열심이에요. 그래서 실패했다고 좌절하지 마세요. 그때마다 예수님을 붙잡고 다시 일어나면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느님이 나를 이 세상에 보내셨구나, 내가 누구의 은총으로, 얼마나 큰 은혜로, 어떻게 존재하는 자인지를 가르쳐 주시려고 하느님이 나를 이 인생 속에 보내셨구나. 그걸 잘 배우는 거에요. 관계를 형성하여 스스로 행복에 도달하려고 하는 그 전체가 죄가 인격화 하여 내 안에 존재하는 게 옛사람이라고요. 그걸 지금 날마다, 바오로가 나는 날마다 죽는다 그랬죠. 그걸 예수님이 날마다 밟아서 죽여가고 있어요. 근데 그런 사람이 하느님 말고 내가 의지하고 있는 걸 더 달라고 계속 기도하고 있으면 어떻게 되는 거에요? 형통의 원리를 상속하면서 계속해서 자자손손 나를 살찌워 주세요, 나의 옛사람을 살찌워 주세요, 그러면 어떻게 되는 거에요? 옛사람에게 자꾸 보약 먹여 주고 있는 거에요 .예수님은 밟고 계신데, 죽어라 죽어라 그러고 밟고 계신데 나는 살려주세요, 살려주세요 하고 있는 거에요. 그게 오늘날 교회의 현실이에요. 그게 무슨 교회입니까? 우리 안에 하느님이 들어와 계세요. 내 옛사람을 죽여 가고 계세요. 거기에서 우리들은 계속 그냥 죄인 됨, 마귀적 속성을 폭로 당하고 하느님의 열심을 경험 하시면 돼요. 하느님이 이렇게 끌고 가고 저렇게 끌고 가면 그 자리에 계세요. 낙담의 자리에 끌고 가면 그 자리에서 그 낙담을 다 받아내셔야 되요. 하느님의 은혜를 떠난 자들의 삶은 이런 거구나 라는 그 고통을 우리가 다 받아내야 되요. 거기서 건져달라고 하시면 안되요. 우리는 이미 건져진 이들인데 뭔가 배우기 위해 그 과정을 통과하는 거기 때문에 그걸 건져 달라고 하시면 안 되는 것입니다. 그 경지까지 올라가셔야 되는 거예요. 근데 그런 사람들이 무슨 착한 일 좀 많이 했다고 남 앞에서 뻐기고, 나는 도덕적으로 윤리적으로 이만한 경지에 올랐다고 자기를 자랑하고, 그렇지 못한 사람들을 뒤에서 수군거리며 모함하고 시기하고. 이게 될 법한 소립니까? 무슨 도덕법이 남아 있어요? 율법은 그 자체로 한 유닛이에요. 싱글 인디비주얼 호올. 자체로 하나라니까요? 근데 그게 나누어져요? 아닙니다. 착하게 살아서 천국 가는 거 아니에요. 하느님의 은총의 필연성을 깨닫고 천국 가는 거에요.

우리가 관심을 두어야 할 것은, 나는 과연 나를 위한 삶에서 하느님의 영광을 위한 삶으로 자꾸 돌이켜지고 있는가, 그거 확인하면 되요. 그 삶 속에서 착한 일 선한 일이 격발되어 나오는 거에요. 근데 안 될 수도 있어요. 그 때 낙담하지 마세요. 그냥 죽는 날까지 아주 추악하고 지저분하게 살다가 마지막에 하느님 그래서 저는 예수만 꼭 붙들어야 되겠네요, 죄송해요, 당신의 나라에 임하실 때 저를 꼭 기억해주세요. 막판 뒤집기로 가는 사람 있습니다. 그게 성화의 절정이에요. 우리의 옛사람이 죽는 건 우리의 마음이 가 있어야 할 과녁이 하느님인데 다른 과녁에게 우리의 마음이 가는 거에요. 그걸 다른 말로 죄라 그러잖아요. 그래서 죄를 하마르티아 라고 하는 거에요. 따라서 죄를 용서해준다는 건 뭐죠? 죄에서 우리를 건지신단 얘긴데 그 삶 속에서 우리를 건져내어 하느님께로만 우리의 마음을 돌린다는 이야기잖아요. 내 마음에 하느님은 저쪽에 가 계시고 내가 원하는 행복의 조건들이 더덕더덕 붙어 있어요. 이 상태를 죄인이라고 하는 거에요. 근데 우리는 하느님은 어디 계신지 몰라요. 그냥 이 상태의 나를 살찌워 달라는 거죠? 점점 더 마귀로 살찌워 달라는 거에요. 이게 마귀의 상태거든요. 이게 죄인의 상태란 말입니다. 여기에서 내 마음에 덕지덕지 붙어 있던 저것들이 떼어져 나가는 게 옛사람이 죽는 거에요. 그리고 그게 예수의 발에 머리를 밟히는 삶인 것입니다. 그리고 결국은 하느님과 내가 붙어요. 그리고 나머지 것들은 내 관심 밖으로 나가는 거에요. 하느님이라는 안경을 통하여 그것들을 보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그 자리로 가는 걸, 그걸 구원이라고 그래요. 있어야 할 것이 원래의 제 역할을 하면서 그 자리에 가게 되는 것, 그게 구원이란 말입니다, 그러니까 죄를 용서하여 주신 것을 믿는다 라는 건, 우리를 반드시 세상에서 건져내서 이 상태로 만들어내신다는 걸 내가 믿습니다 라는 그런 말인 거에요, 따라서 하느님이 우리 삶 속에서 우리를 이 상태로 만들어 내기 위해 나의 삶 속에서 돈, 건강, 가족 관계, 이런 것들을 하나하나 쳐내실 때 끌려가면 되요. 하느님이 왜 이런 것도 안 막아 주시냐고 그런 소리 하시면 안 되는 거에요. 하느님이 하시는 일인데 누가 막아요?

야고보가 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믿음이라고 그러죠? 함은 누구에요? 내 안에서 하시는 분은 오직 한 분이에요. 나는 죽었기 때문에 예수가 행하는 행함. 그 행함이 뭐겠어요? 의 옛사람을 죽여가는 그 행함의 삶이 안 나오면 너희들의 믿음은 죽은 믿음이다 라는 것이지 착한 일 많이 안 하면 너희들 죽은 믿음 가진 거야 이런 말 아니라니깐요. 예수의 행함이, 내 옛사람의 머리를 짓밟는 그 예수의 행함이, 우리의 삶에서 나오는 게 우리에게 고난으로 고통으로 느껴질 수 있단 말입니다. 근데 그 때마다 야~이 행함이 있는 믿음이 나에게서 나오고 있구나, 그렇게 기뻐하란 말이에요, 그게 성도의 삶인 거에요. 하여 주신 것(용서)을 믿습니다. 뭔지 아시겠죠?

 

 

죄의 용서 부분을 누락했네요

참고하세요. ㅎㅎ  살롬.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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