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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주간 수요일 제1독서(이사50,4-9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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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종업 [rlawhddjq] 쪽지 캡슐

2020-04-08 ㅣ No.137396

 

 

 성주간 수요일 제1독서(이사50,4-9ㄴ)

  

 

"주 하느님께서는 나에게 제자의 혀를 주시어지친 이를 말로 격려할 줄 알게 하신다그분께서는 아침마다 일깨워 주신다내 귀를 일깨워 주시어내가 제자들처럼 듣게 하신다주 하느님께서 내 귀를 열어 주시니나는 거역하지도 않고,뒤로 물러서지도 않았다." (4-5)

 

이사야 예언서의 '위로의 책'(40-55)에서 특별히 주목할 부분이 네 개의 노래로 되어있는 '야훼의 종또는 '주님의 종'에 관한 신탁이다 (42,1-9; 49,1-7; 50,4-11; 52,13-53,12).

여기서 주님의 종이 누구를 가리키는가를 두고 학자들 사이에 의견이 분분하다그러나 신약 성경의 저자들은 한결같이 예수님을 '주님의 종'으로 이해하였다.

 

첫번째 주님의 종의 노래는 주님의 종의 선하신 성품과 주님의 종을 향한 하느님의 전적인 보증을 강조했다(42,1-9).

두번째 노래는 하느님의 전적인 부르심과 영광과 승리의 약속을 강조하였다(49,1-7). 이에 비해서 세번째 노래와 네번째 노래는 모두 종의 고난에 촛점을 맞추고 있다는 특징을 가지고 있다.

 

그 가운데서도 오늘 독서가 들어있는 세번째 노래(50,4-11)는 주님의 종이 고난 가운데서도 전적으로 인내하며 순종함으로써 하느님의 도우심으로 승리하리라는 확신을 강조한다.

 

이 점에서 주님의 종의 고난에 집중적으로 촛점을 맞추는 네번째 노래(52,13-53,12)와 구별된다세번째 노래의 말하는 자(話者;화자)도 두번째 노래와 마찬가지로 주님의 종 자신이다이 종은 하느님께 순종적이고 신실한 자이며 하느님의 뜻을 성취하기 위해 큰 고난을 당하지만 하느님의 도우심에 대한 강한 확신으로 믿음을 굳게 지키는 자로서 모든 믿는 이들에게 참 신앙의 표본이 되는 인물이다.

 

'주 하느님께서는 나에게 제자의 혀를 주시어'(4)

 

본문에서 주님의 종은 자신을 1인칭으로 표현하고 있다그는 주님의 종으로서 주님(주 하느님)을 자신의 ''로 칭한다이에 해당하는 '아도나이'(Adonai)는 단순히 종을 자유자재로 부리는 권한을 가진 주인이란 의미가 아니라 온 우주의 주재권을 가지고 있는 만왕의 왕을 지칭하는 표현이다.

 

주님의 종은 바로 이러한 만왕의 왕이신 주 하느님께서 자신에게 '제자의 혀'를 주셨다고 말한다여기서 '제자들'에 해당하는 '림무딤'(limmudim)은 '배우다'(신명5,1),'본받다'(신명18,7)의 뜻이 있는 동사 '라마드'(lamad) 에서 유래하며,'배우는 자'란 문자적 의미를 지닌다.

 

이사야서 8장 16절에서에서 '제자'란 의미로, 54장 13절에서는 '교훈을 받는 사람'이란 의미로 사용되었다이 단어는 단지 공부를 많이 해서 박식해진 사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스승과의 긴밀한 인격적 관계를 통해 그에게 모든 좋은 것들을 다 배워 스승의 뜻대로 행할 수 있는 완벽한 자질을 가지고 있는 사람을 의미한다.

 

따라서 본절에서 '제자의 혀를 주시어'란 말은 주님의 제자로서 주님과의 인격적 관계 아래에서 주님께서 가르쳐주신 말만 하는 것을 나타낸다.

 

또한 후반절에 나오는 '제자들처럼 듣게 하신다'는 내용 역시 주님의 말씀에 대한 주님의 종의 열정을 보여준다즉 주님의 종은 주님과의 깊은 관계를 통해 그의 말씀을 바로 듣고깊이 이해하여 순종하며 주님께서 전적으로 신임할 수 있는 자인 것이다.

 

주님의 종은 그러한 지식을 바탕으로 하여 주님의 백성에게 바른 지식을 가르치는 사명을 감당하게 될 것이다이같은 측면에서 본문의 '주시어'에 해당하는 '나탄'(natan)은 '위임하셨다', 또는 '임명하셨다'는 의미로 의역할 수 있다고 주장하는 이들도 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지상에서 메시아적 사명을 완수하실 때에 사람들로부터 배우지 않은 자인데 어디에서 그런 깊은 지식이 나오는지 모르겠다는 말을 들으셨다(요한7,15-16). 주님의 종이셨던 그리스도는 성부 하느님을 통해 참된 지식을 공급받으셨고그 지식에 근거하여 말씀을 전파하셨던 것이다(요한8,28).

 

'지친 이를 말로 격려할 줄 알게 하신다'(4)

 

이 본문은 왜 주님께서 종에게 제자의 혀를 주시는지 그 목적이나 결과를 말해준다즉 본문은 제자의 혀를 가지신 주님의 종의 주요한 사명이 주님의 말씀을 가르치는 일이 될 것이라는 사실을 예언하고 있다특히 그는 지친 이<困苦(곤고)한 자>에게 말씀을 가르쳐 그를 돕는 일을 하게 될 것이다.

 

여기에서 '지친 이'에 해당하는 '야에프'(yaeph)는 피곤하여 지친 상태를 나타내는 동사 '야아프'(yaaph)에서 유래한 단어로서 영적으로나 육적으로 피곤해 기진맥진한 사람을 의미한다(40,28.30.31).

 

그리고 '말로'에 해당하는 '따바르'(dabar)는 주님의 말씀을 의미한다주님의 말씀은 창조의 권능과 생명을 부여하는 권능을 지니고 있다.

따라서 메시야가 원하는 주님의 말씀은 지친이로 하여금 생명과 능력을 회복하게 하는 수단이 되는 것이다.

 

자신의 무력함을 인정하고 자신의 힘으로는 의로움과 구원에 이르지 못하며 어떤 소망도 없다고 고백하는 자들그리하여 전적으로 주님만을 의지하고 신뢰하는 자들은 그 말씀을 통해 위로와 힘을 얻어 능력있게 살아갈 수 있게 되는 것이다.

 

'아침마다 일깨워 주신다'(4)

 

주님께서는 그의 종이 가르치는 사명을 효과적으로 감당하도록 매일 아침마다 (morning by morning) 그의 이성과 영성을 일깨우신다는 사실이 예언된다. '일깨워 주신다'에 해당하는 '야이르'(yair)의 원형 '우르'(ur)는 문자적으로 잠을 깨우는 것을 의미한다구약 성경에서 모두 65회 사용된 용례에서 이 단어는 주로 마음을 부추기거나 감동시켜 어떤 일을 하게하는 것을 나타내는 데 사용된다이성을 날카롭게 하시고 영성을 일깨우며 사명감을 북돋운다는 의미로 사용된 것이다.

 

이러한 사실은 본문에 이어지는 '내 귀를 일깨워 주시어 내가 제자들처럼 듣게 하신다'란 예언에서 더 확실하게 드러난다.

 

여기서 '듣게 하신다'에 해당하는 '리쉬모아으'(lishimoah)는 '듣다'라는 의미를 지닌 '샤마으'(shamah)의 부정사에 '~하기 위하여'란 뜻의 전치사 ''(le)가 결합된 형태로 직역하면 '듣도록'이라는 의미가 된다.

 

주님의 종은 이스라엘 자손들이 실패한 주님의 말씀을 듣는 문제(이사48,8.18)에 걸려 넘어지지 않고순종하는 마음으로 그 말씀을 먼저 들으시고 그 말씀에 전적으로 순종하는 모범을 보이시는 것이다.

 

'주 하느님께서 내 귀를 열어 주시니'(4)

 

본절은 주님의 종이 이스라엘 백성과는 달리 주님의 말씀을 기쁘게 듣고 순종하는 존재라는 사실을 강조한다이러한 내용은 주님께서 종의 귀를 여셨다는 본문으로 시작하는데 이것은 이스라엘 백성의 귀가 모두 열리지 않았다는 이사야서 48장 8절의 진술과 정확히 대조를 이룬다.

 

"너는 듣지도 못하였고 알지도 못하였다예로부터 네 귀가 열리지 않았으니 네가 배신만 하고 모태에서부터 반역자라 불릴 것임을 내가 알았기 때문이다" (이사48,8)

 

원문상으로도 '열다'라는 의미의 동사 '파타흐'(patah)가 본문과 이사야서 48장 8절에 각각 사용되었다그들은 듣는 귀가 닫혀 있어서 들어도 듣지 못하며(이사6,9) 아예 주님의 명령 듣기를 싫어하는 자들이다(이사48,8).

 

반면 주님의 종은 주님께서 그의 귀를 열어 주심으로 말미암아 주님의 말씀을 완전하게 받아들이고 완전하게 순종한다바로 여기서 주님의 종이 하느님께서 부여하신 사명을 완전하게 감당할 수 있었던 근거가 나온다.

따라서 믿는 이들도 말씀을 듣지 않으므로 거역하고 범죄했던 이스라엘 백성들의 과거 잘못을 되풀이하지 않기 위해서는 주님의 종의 듣는 태도를 배워야 한다.

 

"나는 거역하지도 않고 뒤로 물러서지도 않았다" (5)

 

원문에서 '나는'에 해당하는 '아노키'(anoki)라는 인칭 대명사가 매우 강조되어 있다여기서 이 단어는 '다른 사람은 몰라도 나 만큼은'이라는 강조적 의미를 나타낸다주님의 종만큼은 부르심과 말씀에 절대 순종의 자세로 반응한다는 것이다.

 

본문에서 '거역하다'에 해당하는 '마라티'(marathi)의 원형 '마라'(mara)는 원래 음식의 맛이 매우 쓴 것을 의미하는 단어이다구약성경에서 대부분 주님의 말씀을 듣지 않고 거역하는 마음으로 주님의 마음을 쓰라리게 한다는 의미로 사용되었다(이사1,20; 민수20,10; 신명1,26). 그러나 주님의 종은 절대로 그렇지 않고 오히려 언제나 하느님께서 기뻐하시는 일만 행하신다(요한8,29).

 

또는 '뒤로 물러서다'에 해당하는 '아호르 네쑤고티'(ahor nesugothi)는 겁을 집어 먹고 뒤로 도망친다는 의미를 가지고 있다주님의 종은 사명을 감당하는 자리에 섰을 때 온갖 두렵고 떨리는 일이 계속 일어날 것임을 알고 있다그러나 그로 인해 도망치거나 물러서지 않는다이러한 주님의 종의 사명은 메시아의 공생활 가운데 그대로 구현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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