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4월 20일 (토)
(백) 부활 제3주간 토요일(장애인의 날) 저희가 누구에게 가겠습니까? 주님께는 영원한 생명의 말씀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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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순 제2주간 수요일 복음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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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만연 [fisherpeter] 쪽지 캡슐

2020-03-11 ㅣ No.136684

 

오늘 복음은 예수님께서 열두 제자들을 데리고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시고 계십니다. 도중에 제자들에게 앞으로 예수님께서 어떻게 되실지 예수님의 수난을 예고하십니다. 이때 예수님의 말씀을 들은 제자들의 속마음이 어떠했을까 하는 생각이 듭니다. 이 말씀을 정말 제대로 이해를 한 제자가 과연 얼마나 있을까요?

 

오늘 복음에서는 이런 말씀을 들었다면 정상적인 사람이라면 최소한 한 사람이라도 아니 스승님, 이게 도대체 무슨 말씀이신지요? 하고 뭔가 질문이라도 했어야 하는데 복음에서 언급되지 않은 걸로 봐서는 너무 기가 막힌 일이라 여쭤볼 엄두가 나지 않아서 그랬을까요? 제가 다른 수난예고와 지금 비교를 하지 않았습니다만 아무튼 오늘 복음에만 한정해서 생각해본다면 이걸 예고하시는 장소가 예루살렘을 향해 올라가시는 도중에 일어난 것에 초점을 맞추려고 합니다.

 

제 생각으로는 18절에 그런 암시가 있는 듯합니다. “보다시피 우리는 예루살렘으로 올라가고 있다.”라고 말씀하십니다. 왜 이런 말씀을 하셨을까요? 예수님의 죽음을 예고하시면서 너희도 내 길을 따르려면 지금 너희는 지상의 예루살렘을 따르는 것이지만 이게 천상 예루살렘을 오르는 길이라는 걸 미리 암시하신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해봅니다.

 

저는 예수님께서 이 부분에서는 예수님의 신성을 나타내셨을 것 같다는 추측을 한번 해봅니다. 예수님의 수난예고를 말씀하신 연후에 마태오복음 사가가 복음을 저술할 때 제베대오의 두 아들의 어머니가 등장하는 내용이 나와서 이들이 예수님께 하는 질문을 보면 이렇게 예측할 수가 있습니다.

 

제가 봤을 때 마태오복음 사가가 이런 식으로 복음을 서술한 의도는 이미 성령의 감화로 복음은 기록되니 마태오 사가를 통해 지금 등장하는 예루살렘이 있는 공간은 지상이지만 지상에서 일어나는 이런 과정이 천상 예루살렘에 오르는 과정이라는 것입니다.

 

재미나는 것은 도중에 제베대오의 두 아들과 어머니가 등장해서 절을 하며 무엇을 청하였다고 합니다. 그런데 마태오는 청한 내용을 이야기하지 않는군요? 단지 무엇이라는 것만을 표현을 했습니다. 이때 예수님의 대답이 좀 흥미롭습니다. 무엇을 청하느냐고 되물으십니다. 만약 청하는 소리가 예수님께서 듣지 못하셔서 그랬을까요? 그러지는 않으실 겁니다. 저희의 머리카락도 세시는 분이신데 이걸 모르실까요? 전혀 그렇지 않으실 겁니다.

 

우리도 예수님처럼 이런 반응을 할 때가 있지 않습니까? 만약 누군가가 누구에게 부탁을 했는데 그 부탁이 하도 어이가 없는 부탁이라든지 하면 다시 부탁하는 사람의 말을 반복해 되묻지 않습니까? 저는 이 상황에서 예수님께서 인지를 못하셔서 되묻는 것이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22절에 보면 너희가 무엇을 청하는지 알지도 못한다고 말씀하십니다. 그러니까 예수님께서는 두 아들의 엄마가 하는 말의 의도는 알고 계시지만 그 엄마 스스로는 자기가 청하는 내용이 무엇을 청하기는 청하지만 실제 그 내용이 무엇인지를 모르고 있다는 말씀이지 않습니까?

 

예수님께서는 두 아들의 엄마가 생각하는 하느님 나라의 모습을 잘못 인식하고 있다는 의도로 말씀하시고 계시는 듯합니다. 또 하나 재미난 것은 하느님 나라라는 표현을 하지 않고 왜 마태오 사가는 스승님의 나라라는 표현을 사용했을까요? 부인과 대화를 하는 상황에서 말입니다. 모르긴 몰라도 부인의 입을 통해 이런 의미를 전달하고자 하는 의미도 있지 않을까요?

 

부인이 추측하기에 지금 이승에서 예수님과의 인연을 맺은 이런 인간적인 생각으로 어쩌면 하느님의 신성을 보지 않고 예수님의 인성에 호소하는 측면을 간접적으로 드러내려고 하는 마태오의 숨은 의미도 있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이건 순전히 제 생각입니다. 그러니 엉터리일 수 있습니다.

 

실제 예수님께서는 오늘 복음 마지막에 너희 가운데에서 높은 사람이 되려는 이는 너희를 섬기는 사람이 되어야 하고 또 첫째가 되려는 이는 너희의 종이 되어야 한다는 것을 알려주시려는 의도의 메시지를 전해주시기 위해 어쩌면 갑자기 예루살렘을 오르시면서 말씀하시는 게 분위기상 적절하지 않을 것 같으니 하느님의 신성으로 이런 것을 예측하셔서 이 부인을 하느님의 권능으로 등장시킨 것은 아니실까 하고 저는 상상을 한번 해봅니다.

 

이 부인과의 대화를 통해서 제자들에게 직접 어떤 메시지를 전달하는 것보다 간접적으로 전달하시려고 하셨는지도 모를 일입니다. 어쩌면 이게 더 효과적일 수가 있습니다. 직접 전달하면 자기가 자기를 바라보는 시각을 객관적인 시각으로 보는 게 조금 힘들 수가 있는데 간접적으로 전달하면 그 현상을 자기가 배제된 상황에서 외부적인 사실에만 초점을 맞추기 때문에 예수님께서 전달하고자 하시는 메시지를 더 잘 이해할 수가 있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아무리봐도 예수님의 고도의 전략이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또 흥미로운 곳이 있습니다. 예수님께 청은 엄마가 하지만 다시 질문을 하시는 것은 두 아들에게 하십니다. 실제 이건 만약 엄마가 청하는 내용이 실현되는지 여부는 엄마의 청과는 상관없다는 뜻일 수도 있습니다. 청하는 것과 상관없이 당사자에 달려있다는 것일 거라고 생각합니다. 예수님께서는 뜬금없이 이런 청에 내가 마시려는 잔을 너희가 마실 수 있느냐? 하고 말씀하십니다.

 

이때 이 사람들이 예수님의 이 말씀이 무슨 뜻인지 이해를 했을까요? 저는 이해를 전혀 못했다고 봅니다. 이 말씀 전에도 무엇을 청하는지 알지도 못한다고 말씀도 하셨겠지만 이 말씀이 아니더라도 문맥의 흐름상 그럴 것입니다.

 

왜냐하면요 아마도 이때 두 아들은 이렇게 생각을 했을 거라도 추측이 됩니다. 예수님께 자기 엄마가 청한 후에 예수님께서 자기들에게 질문을 던지시는 게 예수님의 우편에, 좌편에 앉는 조건으로 이해를 하고 그냥 무턱대고 대답을 할 수도 있다고 생각합니다.

 

일단 그 자리가 욕심이 나니 그것에만 정신이 팔려 있으니 그럴 수도 있습니다. 사람도 그렇지 않습니까? 남자가 어떤 여자에게 콩깍지가 쒸어지면 제대로 판단을 하지 못하는 거랑 똑같을 겁니다.

 

예수님은 내 잔은 그냥 무슨 세상의 물이나 술잔이 아니라 죽음을 받아들여야 하는 그런 잔이다이런 말이지 않겠습니까? 실제 이들이 이런 뜻이라는 걸 안다면 기겁을 했을 겁니다. 하지만 예수님께서는 너희는 내 잔을 마실 것이다라고 말씀하십니다. “너희도 나의 뒤를 따라 순교를 하게 될 것이다라고 하는 메시지인 것 같습니다. 저는 우리가 아는 이 잔에 대해 좀 이색적으로 묵상을 한번 해봅니다.

 

가슴 아픈 하느님의 분노의 잔이라고 생각합니다. 오늘 제1독서에 나오는 예례미야가 한 말을 한번 연결시켜 묵상을 해보면 그렇습니다. 유다 사람들이 예례미야를 향해 제거하려는 음모를 꾸밉니다. 그리고 예례미야의 말을 무시하자고 합니다. 저는 이 대목이 바로 예수님의 상황과 같다고 보여집니다. 오늘 복음에도 나오듯이 예수님께 신성모독이라는 죄명을 씌워서 예수님께 사형선고를 내리려고 하는 모습과 동일합니다. 예례미야는 하느님께 탄원을 드립니다.

 

자신은 그들을 위해서 하느님께서 그들을 향해 내리실 분노에 대해 그 분노를 거두어달라고 애원을 하며 기도를 드렸는데 그들은 자기들을 위해 한 자신의 선을 오히려 자신에 대해 악으로 응대를 하니 선을 악으로 갚아도 되는지요? 하고 눈물로 애원하는 듯합니다. 바로 이때 예례미야가 말한 당신의 분노가 바로 오늘 복음에서 나오는 내 잔과 동일한 것 같다고 생각합니다.

 

사실 하느님께서는 죽음이 지배하는 세상을 안타깝게 생각하시어 사랑하는 외아들을 이 세상에 보내시어 그 아들에게 이 세상의 모든 죄를 짊어지게 해서 그 아들의 죽음을 통해 이 세상을 구원하려고 하시는데 이런 것도 모르고 세상은 하느님의 선을 악으로 대응을 하는 장면에서 얼마나 분노가 치밀어오르겠습니까?

 

그렇지만 그 분노를 분노로 풀지 않으시고 처음 하느님께서 아들을 이 세상에 보내실 때 그 초심을 유지하셨기 때문에 예수님 한 분에게만 그 분노의 잔을 받게 하셨던 것 같습니다.

 

그런 상황만 생각해도 우리를 얼마나 사랑하는지 알 수 있는 대목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내 잔을 마신다고 하셨잖습니까? 내가 걸은 길을 너희도 따르겠지만 너희들이 생각하는 그 자리는 내가 결정하는 게 아니라고 하십니다.

 

내 아버지께서 정하신 이들에게 돌아가는 것이다라고 말씀을 하십니다. 왜 직접 말씀을 하시지 않았을까요? 내 아버지가 바로 예수님이심에도 불구하고 직접적인 답변을 회피했을지도 생각해봤습니다. 잔을 마신 후에는 이미 예수님께서는 이 세상 분이 아니시니 그 다음 영역에서 그 권한은 하느님의 영역이고 하느님 소관으로 이관된다는 말씀으로 저는 이해를 했습니다.

 

이 부분은 다음 기회로 미루겠습니다. 이런 대화를 옆에서 듣고 있던 제자들은 두 형제에 대해 불쾌하게 생각했습니다. 자기들도 그런 생각이 있는데 엉뚱한 사람이 그런 걸 생각한다고 생각하니 그럴 수도 있습니다.

 

마지막에 보면 예수님께서는 단도직입적으로 우편과 좌편에 누가 앉을 거라고 말씀을 하시지 않으시고 단지 누가 하늘 나라에서 가장 으뜸이 되는 사람인지에 대해 가장 낮은 자리에서 남을 섬기는 자가 하늘 나라에서 가장 높은 사람이라고 말씀하십니다.

 

바로 그 자리를 탐할 게 아니라 섬기는 사람이 되면 그 자리는 그냥 얻으려고 애쓰지 않아도 자연히 따라오게 된다는 뜻으로 말씀하셨으리라고 봅니다. 감사합니다.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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