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4월 20일 (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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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의 예식 다음 금요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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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만연 [fisherpeter] 쪽지 캡슐

2020-02-28 ㅣ No.136386

 

재의 예식 다음 금요일 독서와 복음 묵상

 

요즘 시대는 예전에 비하면 국민들의 식생활 수준이 많이 높아졌다고 볼 수 있습니다. 예전에는 보릿고개라는 게 있을 정도로 초근으로 연명을 하던 힘든 시절도 있었습니다. 저야 그런 시절을 경험을 하지 않았지만 예전에 그런 고된 시절을 겪은 분들이 이 시대에도 많이 있습니다. 그에 비하면 요즘은 정말 비교가 되지 않을 정도로 영양 상태가 상당히 좋은 시대에 살고 있습니다.

 

물질적인 풍요를 누리는 시대에 살고 있는 사실은 분명합니다. 예전에는 못 먹어서 병이 생기는 시대도 있었지만 요즘은 아이러니하게도 너무 잘 먹어서 영양과잉이 되어 심지어는 만성 성인병으로까지 확산이 되는 경우를 볼 수가 있습니다. 그러다 보니 이제는 거꾸로 단식원 같은 곳을 찾아서 돈을 주고 단식을 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만약 타임머신을 타고 예전 사람들이 지금 이 시대를 다시 온다면 이해를 할 수가 없을 것입니다.

 

육체적으로 단식을 하는 이유는 무엇이겠습니까? 단식을 영어 원어민들은 어떻게 정의를 하는지 싶어 제가 사전을 찾아봤습니다. 아주 간결하게 이렇게 정의를 해놓았습니다. 일정기간 동안 종교적인 이유로 적게 먹거나 아예 먹지 않는 걸로 정의하고 있습니다.

 

단식원에 들어가 단식을 하는 사람들의 목적은 단 하나입니다. 단식을 통해서 건강을 회복하려고 하는 것입니다. 단식은 음식을 먹지 않으면 되는데 왜 굳이 돈을 들여가면서까지 단식원에 가서 단식을 하는 것일까요? 이건 여러 가지 이유가 있겠지만 저는 개인적으로 식욕을 자신 스스로가 통제를 하거나 억제를 할 수가 없기 때문에 그런 유혹을 강제적으로 끊을 수 있는 환경의 도움을 받기 위해 가는 것입니다. 단식을 하면 어떻게 해서 건강해지는 것일까요?

 

제가 가진 아주 작은 상식을 말씀드리겠습니다. 먹지 않거나 양을 줄여서 그동안 자신의 신체가 비축한 에너지나 영양으로 컨디션을 유지하면서 한편으로는 그런 과정에서 신체의 신진대사가 처리되는 중간에 몸에 있던 독소가 빠져나와 몸 밖으로 배출이 되다보니 건강이 회복되는 그런 원리입니다. 그렇다면 단식원에 가는 가장 중요한 원인은 자신의 식욕을 통제하는 수단으로써 또 하나는 신체의 독소를 제거하기 위해 가는 것입니다. 이렇게 하면 나름 건강을 어느 정도 회복을 할 수가 있습니다.

 

이게 지금 세상에서 말하는 육적인 단식입니다. 단식에는 영적인 단식도 있습니다. 오늘이 사순이 시작된 지 사흘째 되는 날입니다. 사순시기하면 생각나는 대표적인 세 가지가 자선, 단식, 회개입니다.

 

오늘 복음을 보면 요한의 제자들이 예수님께 와서 묻습니다. “ 저희와 바리사이들은 단식을 많이 하는데, 스승님의 제자들은 어찌하여 단식을 하지 않습니까?” 하고 말입니다.

 

그 물음에 예수님께서는 혼인 잔치 손님들이 신랑과 함께 있는 동안에 슬퍼할 수야 없지 않느냐? 그러나 그들이 신랑을 빼앗길 날이 올 것이다. 그러면 그들도 단식할 것이다.” 라고 말씀하십니다.

 

저는 예전에는 이 복음이 이해가 잘 되지 않았지만 매일미사 복음 묵상코너에 나온 신부님의 강론 내용으로 조금 이해가 되다 보니 이제는 어렴풋이나마 이 의미를 이해를 할 수가 있습니다.

 

바리사이들은 철저한 율법주의자들이기 때문에 그들은 율법을 지키려고 애를 썼을 겁니다. 근데 예수님께서는 천상의 일을 가르쳐주시고 알려주시는 분이라고 생각하고 평소에도 예수님의 가르침을 잘 배우고 있는데 그렇다면 그들이 봤을 때는 예수님의 가르침을 따르는 제자들은 당연히 단식을 할 거라고 생각을 했는데 그러지를 않으니 그 까닭이 궁금했을 겁니다.

 

그러니 예수님께 의아해서 물었던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하신 답변으로는 사실 그당시 사람들은 그게 쉽게 납득이 되지 않았을 겁니다. 왜 그럴까요? 바로 그건 그들이 아는 단식의 의미는 단순히 음식량을 줄인다든지 아니면 먹지 않는다든지 이런 육적인 의미의 단식을 생각했기 때문에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의미가 도무지 무슨 뜻인지 몰랐을 겁니다.

 

예수님께서는 혼인 잔치 비유를 설명하시면서 단식의 의미를 애둘러 설명하고 계십니다. 혼인 잔치를 하려면 먼저 혼인의 주인공인 신랑과 신부가 있어야 됩니다. 당연히 잔치를 베풀려면 손님 또한 있어야 합니다. 신랑을 빼앗기는 날에 단식을 한다고 하셨습니다. 이게 무슨 말씀일까요? 서두에 말씀드렸듯이 성경 지식을 떠나 한번 상상의 나래를 펼쳐보도록 하겠습니다.

 

혼인은 즐겁고 경사로운 일입니다. 그러니 혼인 잔치 집에는 시끌벅적하며 흥겨운 소리가 나야 정상이지 초상집처럼 우울하면 되지 않을 겁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 내용을 보시면 신랑과 함께하면 슬퍼지 않다고 하셨습니다. 근데 신랑을 빼앗기면 단식을 한다고만 하시고 분위기는 말씀을 하시지 않습니다.

 

문맥으로 유추하면 신랑이 없으면 슬퍼다는 의미로 해석해야 하지 않을까 싶습니다. 여기서 신랑을 빼앗기는 의미가 매일미사 해설에 보면 예수님께서 유다의 배신으로 체포당하시어 십자가에 못 박히는 것을 상징한다고 나와 있습니다. 그것을 마태오 복음사가는 빼앗겼다는 걸로 표현을 했습니다.

 

그럼 혼인 잔치에서 느닷없이 만약 신부 입장에서 신랑이 갑자기 행방불명된다면 신부의 입장은 어떻게 되겠습니까? 하늘이 노랄 것입니다. 이런 상황에서 단식을 한다는 게 무엇을 의미하는지를 오늘 독서를 보면 알 수가 있습니다. 오늘 독서에서는 누가 봐도 진정한 단식은 어떻게 하는 것인지와 그 의미를 명확하게 설명해 주고 있습니다.

 

1절부터 보시면은 하느님께서는 지금 내 백성이 악행과 죄악을 저지르고 있다고 말씀을 하고 계십니다. 또한 그들은 하느님의 공정을 지키고 하느님을 알기를 갈망하는 것 같지만 그렇지 못하다고 말씀하십니다.

 

복음에 나오는 마치라는 단어를 보면 알 수가 있습니다. 이 말은 겉보기엔 그럴 듯하지만 실제 속은 그렇지 않다는 표현이지 않습니까? 이런 모습을 하면서도 말은 하느님께 가까이 있기를 갈망한다고 합니다. 이런 모습을 하는 걸 보시는 하느님 입장에서는 얼마나 역겨운 일이겠습니까? 백성들은 자기들이 단식을 하고 고행을 하는데 하느님께서 왜 자신들을 알아주시지 않는지 항변을 하고 있습니다.

 

이렇게 말씀을 드리니 이제야 하느님께서 너네들이 하는 단식이 제대로 된 단식이 아니라는 걸 알려주십니다. 단식 일에 일꾼들을 다그치고 단식을 한답시고 다투며, 주먹질을 하고 있는 게 단식이 아니라고 하십니다. 오늘 독서 6절 이하를 보면 하느님께서 원하시는 단식이 무엇인지를 소상하게 일러주십니다. 바로 이게 진정한 단식일 것입니다.

 

그 내용을 하나씩 풀어서 이해를 한번 해보겠습니다. 억압받고 있는 사람들이라든지 뭔가 속박된 상태를 자유롭게 해 주는 걸 말씀하십니다. 모든 멍에를 부수어 버리는 것이라고 하십니다. 저는 이 부분을 이렇게 묵상을 합니다.

 

억압을 받는다는 것은 어떤 물리적인 억업도 있을 수가 있지만 가령 고통이라든지, 가난이라든지, 정신적으로 소외되어 고통을 당하는 것과 같은 것으로 생각해봤습니다. 멍에를 부수는 게 무엇이 있을까요? 저는 이렇게 생각합니다.

 

전통이나 관습에 얽매여 그것에 구속되는 모든 걸 말하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하나의 예를 든다면 지나친 율법주의에 갇혀서 율법의 근본정신을 잊어버리고 철저히 율법을 지키려고 하는 사회의 관습이나 병폐 등등 말입니다. 한마디로 일종의 우상을 철폐하는 것을 말할지도 모르겠습니다. 그 우상도 종류가 많을 것입니다.

 

재물에 탐익하는 우상, 자신의 고집만을 주장하는 우상, 남을 무시하고 자신을 드러내보이려는 우상 아무튼 이런 우상들을 철폐하는 게 멍에를 부수는 것일 거라고 상상을 해봅니다. 지금까지는 영적인 단식을 말씀하시는 것 같습니다.

 

7절 이하는 육적인 단식을 이야기 하고 있는 듯합니다. 굶주린 이에게 양식을 나누어주고, 집이 없어 거처할 곳이 없는 불쌍한 사람을 받아들이며 헐벗은 사람을 덮어 주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이 내용은 마치 마태복음 25장에 나오는 최후의 심판을 연상하게 해 주는 것 같습니다.

 

이 내용은 익히 누구나 잘 알고 있습니다. 바로 이게 예수님을 받아들이는 것이라고 하셨고 또한 예수님을 받아들이는 건 하느님을 받아들이는 것이라도 하셨습니다. 이 내용이 영적인 단식이라고 한다면 한마디로 말하자면 나눔을 실천하는 것이라고 정의할 수가 있지 않을까요?

 

영적이든 육적이든 오늘 독서의 내용을 살펴보면 고통 받는 사람들과 고통을 함께 나누는 고통분담이게 바로 진정한 단식이라고 말씀하시는 것 같습니다. 저는 오늘 독서에 나오는 내용으로만 봤을 때 하느님께서 말씀하시는 진정한 의미의 단식은 타인과 함께 그들의 고통을 함께 나누는 것이라고 정의를 하고 싶습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자신이 추구하려는 욕심도 자제를 해야 하고, 자신만의 비움의 미학을 실천해야 할 것입니다. 이렇게 하면 새벽빛처럼, 마치 떠오는 해처럼 솟아오른다고 했습니다.

 

또한 하느님께서 그의 뒤에서 하느님의 영광으로 지켜 주신다고 하십니다. 하느님을 부르짖으면 그 소리를 들으시고 응답해 주시겠다고 하십니다. 이런 단식을 실천했을 때 상처가 곧바로 아문다고 하셨습니다. 이와 관련해서 마지막으로 한 가지 묵상을 해보겠습니다.

 

오늘 복음에 이미 나온 내용입니다. 신랑을 빼앗기면 슬퍼한다고 했습니다. 예수님께서 우리 곁에 안 계신다는 말씀이시겠죠. 신랑되신 예수님을 우리는 2000년 전에 빼앗기셨다고 생각하십니까? 저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인간의 시간으로는 분명 2000년 전입니다. 하지만 하느님의 시간(영적인 시간)으로 보면 바로 지금 현재입니다.

 

왜 제가 그렇게 생각하는지 논리적으로 설명해보겠습니다. 하느님의 시간은 시작도 끝도 없는 태초에서부터 영원까지의 시간입니다. 그 시간의 영역에서는 2000년은 바로 한 순간 찰나일 수도 있습니다. 우리가 사는 지구별도 먼 우주에서 보면 하나의 점도 되지 않는 것처럼 그와 똑같은 이치입니다.

 

2000년 전에 인류를 위해 십자가에서 돌아가신 신랑되신 예수님은 지금 우리와 함께 현존하는 공간에서 이탈되어 계신 것입니다. 우리는 영적으로는 신부입니다. 예수님은 신랑이십니다. 이미 우리는 세례를 통해 예수님의 자녀로 태어났고 또 한편으로는 예수님의 신부입니다.

 

그때 예수님께서는 저희의 죄로 십자가상에서 돌아가셨지만 다시 우리 곁으로 오신다고 하셨습니다. 그 시간과 때는 아무도 모른다고만 하시면서 그 시간이 언제가 되었든 항상 깨어 기다리라고만 하셨습니다.

 

우리는 지금 사순시기를 보내고 있습니다. 예수님의 수난과 죽음을 묵상하며 부활축제를 준비하는 기간에 있습니다. 이 기간을 우리는 육적인 단식과 영적인 단식을 잘 준비해서 우리의 영혼 속에 있는 온갖 더러운 독소를 깨끗이 정화해 저희의 죄로 저희와 헤어져 지금은 예수님과 함께하지 못하는 슬픔에 빠져있습니다.

 

우리가 지금 진정한 단식을 하게 되면 오늘 독서에서도 말씀하시듯이 저희가 부르시면 나 여기 있다.’ 하시며 저희의 부르짖음에 응답해 주신다고 하신 말씀과 약속을 가슴 깊이 명심하여 이제 사흘째 되는 시간이 되지만 남은 기간 예수님의 부활축제를 잘 준비를 해서 의미 있는 사순시기가 되도록 했으면 하는 바람입니다. 감사합니다.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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