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4월 20일 (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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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요셉 신부님의 매일 복음 묵상 - 그리스도는 성령을 주시기 위해 죽으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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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현아 [estherlove] 쪽지 캡슐

2020-01-19 ㅣ No.135443

 

 

가해 연중 제2주간 월요일



<그리스도는 성령을 주시기 위해 죽으셨다>

 

 

 

 복음: 마르코 2,18-22


 


성모자


부티노네(Butinone) 작, (1490), 밀라노 브레라 미술관 


 

 

 

 

혜경양은 학창시절 혜경아 공부해라.” “TV 좀 그만 보면 안 되니?” “학교 갈 시간이야.” 등등의 어머니의 잔소리가 매우 싫었습니다. 회사 다닐 때는 피곤하다는 핑계로 어머니께서 무엇인가 물어보시면 나중에 얘기하자며 방문을 닫고 잠자기 일쑤였습니다.

그런데 건강하시던 어머니께서 갑상선 암으로 성대 제거 수술을 받게 되었습니다. 그 후로 혜경양은 어머니의 목소리를 들을 수 없었습니다. 그렇게 듣기 싫던 어머니의 잔소리를 들을 수 없다는 사실이 너무 가슴 아팠습니다. 그동안 어머니께 했던 행동들이 머릿속으로 하나둘 스쳐 지나갈 때마다 후회가 됐습니다.

 

그 후로 혜경양의 행동은 많이 바뀌었습니다. 어머니의 입 모양을 보면서 대화하기 위해 많은 노력을 기울였습니다. 그런데 재활의학 박사로부터 희망이 담긴 말을 들었습니다. 기계를 이용하면 성대를 대신해서 그 부분을 울려주기 때문에 보통 사람들과 똑같은 목소리는 아니지만 다른 사람들과 대화가 가능하다는 것이었습니다.

 

혜경아, 일 끝나고 온 거니?”

비록 기계의 울림소리였지만 어머니가 자신의 이름을 불렀을 때 그녀는 감동과 기쁨의 눈물로 목이 메었습니다. 혜경양은 어머니 목소리의 가치를 알고부터 작은 것에 감사할 줄 아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우리의 변화는 우리가 받는 은총의 가치를 아느냐, 모르느냐에 달려있습니다.

 

헨리 나우웬 신부는 자신의 저서에서 너는 보물을 발견한 사실에 기쁨을 느낄 것이다. 그러나 보물을 발견했다고 해서 네 것이 되는 것은 아니다. 다른 모든 것을 포기할 때 보물을 네 것으로 만들 수 있다.”고 했습니다.

 

내가 가진 것을 보물로 인정하느냐, 아니냐는 내가 그것을 위해 무엇을 포기할 수 있느냐로 증명됩니다. 천국의 비유에서는 땅에 묻힌 보화를 발견한 사람은 자신의 전 재산을 다 팔아 그 밭을 샀다고 합니다. 우리는 하느님께서 주시는 은총을 위해 무엇을 포기할 수 있나요?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가장 큰 보물은 성령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꾸준히 청하라고 하시며 너희가 악해도 자녀들에게는 좋은 것을 줄 줄 알거든, 하늘에 계신 아버지께서야 당신께 청하는 이들에게 성령을 얼마나 더 잘 주시겠느냐?”(루카 11,13)라고 하십니다. 우리는 하느님께서 주시는 가장 귀한 보물인 성령의 가치를 잘 알아야 합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아무도 새 포도주를 헌 가죽 부대에 담지 않는다. 그렇게 하면 포도주가 부대를 터뜨려 포도주도 부대도 버리게 된다. 새 포도주는 새 부대에 담아야 한다.”고 말씀하십니다. 새 포도주는 바로 성령의 은총이고 새 부대는 그 은총의 가치를 아는 마음입니다.

 

같은 성체를 영하더라도 그것으로 감동하여 인생이 바뀌는 사람이 있는가하면, 어떤 사람은 그냥 비타민처럼 영하기도 합니다. 우리 신앙인들은 성령으로 말미암아 하느님을 아빠, 아버지!”라 부르며 하느님의 자녀가 됩니다. 새 부대는 성령 받고 성령의 불을 끄지 않기 위해서라면 목숨도 아깝지 않게 바칠 수 있는 마음입니다.

 

 

그렇다면 우리에게 성령의 가치는 얼마로 평가하며 살아갑니까? 사실 성령은 그리스도의 살과 피입니다. ‘하느님의 목숨 값입니다. 우리가 하느님의 자녀로 새로 태어나게 하시기 위해 하느님께서는 목숨을 바치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누구든지 물과 성령으로 태어나지 않으면, 하느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다.”(요한 3,5)라고 하셨습니다. ‘물과 성령성사’, 특별히 세례를 상징합니다. 바오로 사도는 어떤 때는 그냥 단순하게 성령으로 세례를 받는다.’라고도 말합니다(1코린 12,13 참조).

 

구약에서 세례의 가장 큰 상징은 이스라엘 백성이 홍해(紅海)’를 건너는 사건입니다(1코린 10,2 참조). 그런데 바다를 왜 홍해’, 붉은 바다라고 하였을까요? 하느님의 어린양의 로 세례를 받기 때문입니다. 교회는 바닷물은 십자가의 신비를 상징하고그 물에 세례를 받는 것은 자신을 십자가에 못 박아 그리스도의 죽음에 일치함을 의미한다.”(가톨릭교회교리서, 1220)라고 가르칩니다.

 

누구든 그리스도께서 흘리신 피로 이루어진 그 붉은 바다를 건너면 옛 본성이 그 피 속에 수장되고 그리스도와 같은 본성을 지닌 하느님의 자녀로 새로 태어납니다. 하늘나라의 백성은 그리스도의 피로 자신들의 옷을 깨끗이 빤 정결한 사람들의 공동체입니다(묵시 7,14 참조).

 

따라서 그리스도의 피로 세례를 받는다고 말하는 것이나 성령으로 세례를 받는다고 말하는 것이나 다르지 않습니다. “교회는 그리스도의 피와 성령의 작용으로 교회 안에서 죄의 용서가 이루어지도록 하늘 나라의 열쇠를 받았습니다.”(가톨릭교회교리서, 981)라고 말합니다. 하느님의 피가 곧 성령이고 그 성령으로 인간의 옛 본성인 죄가 씻기는 것입니다.

 

세례를 받을 때, 고해성사를 할 때, 성체를 영할 때도 성령으로 죄가 사해집니다. 그러나 그 성령이 바로 그리스도의 수난의 대가임을 알 때에만 죄에서 벗어날 수 있습니다. 고해성사 할 때마다 자신의 자녀의 팔을 하나씩 잘라야 한다면 죄를 지을 사람이 없을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인간의 죄 사함의 값이 그리스도의 목숨 값임을 믿어야 죄에서 멀어지고 하느님의 자녀가 될 수 있습니다.

 

 

여기까지 읽으셔도 됩니다. 제 책에 대한 가장 큰 비판 중의 하나가 하느님께서 어떻게 죽으실 수가 있느냐?’, 혹은 어떻게 어떤 때는 아버지가 하느님이시만, 어떤 때는 아드님만 하느님이실 수가 있느냐?’는 것입니다. 성부-성자-성령, 세 분이 동시에 하느님이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얼핏 이 말이 맞는 것 같지만 사실 삼신론이라는 삼위일체 이단에 빠질 가능성이 많은 생각입니다.

아래의 내용은 이 의문에 대한 제 삼위일체 교리에 관한 의견입니다.

 

우선 하느님께서 죽으실 수 있음을 이해해야 합니다. ‘성령하느님의 피라면 당연히 성령을 주시기 위해 하느님께서 죽으셔야 하지 않겠습니까? 피는 곧 생명입니다. 하느님의 가장 완전한 선물은 성령이시고, 성령은 생명이시기 때문에 성령은 주시는 하느님은 죽으실 수밖에 없으십니다. 이것을 넘지 못하면 삼위일체신비는 그 사람에게 뜬구름잡기에 불과합니다. 그리고 성령의 가치를 모르게 되어 성령이 그 사람을 변화시킬 수 없게 됩니다.

 

자녀는 부모가 주는 음식에서 부모의 피를 발견할 수 있어야 비로소 감사하고 변화하게 됩니다. 부모가 주는 용돈이 부모의 살과 피임을 믿을 때 함부로 사용하지 않고 자신의 삶을 변화시키는 데 씁니다. 우리에게 오시는 성령의 은총, 혹은 성사의 은총이 하느님의 목숨 값임을 알아야 성사생활을 통해 변화가 생기는 것입니다.

 

 

성령께서 하느님의 피이자 목숨임을 세 가지 측면에서 설명하겠습니다. 위에서도 설명했듯이 성령죄의 용서의 측면에서 하느님의 피와 같습니다. 성경에서 그리스도의 피’, 성령은 숫자 ‘50’으로 상징이 일치합니다. 교회에 성령께서 오신 날이 오순절이었습니다. 오순절이란 숫자상 오(: 5)와 순(: 10)이 곱하여진 날로 ‘50’을 상징하는 날입니다.

 

창세기 18장에 하느님께서 죄로 가득한 소돔 땅을 유황불로 멸하시려 하실 때 아브라함이 그 안에 살고 있는 자신의 조카 롯을 살리기 위해 애쓰는 장면이 나옵니다. 이때 하느님께서는 소돔 땅에서 의인 쉰 명을 찾을 수만 있다면, 그들을 보아서 그곳 전체를 용서해 주겠다.”(창세 18,26)라고 하십니다. 죄의 용서는 그리스도의 피로 이루어집니다(에페 1,7 참조). 여기서 그리스도의 피는 ‘50’과 연관됩니다. 오천 명을 먹이실 때 사람들을 ‘50’명씩 앉히신 것도 당신의 살과 피가 ‘50’과 관련 있기 때문일 것입니다(루카 9,14 참조). 그리스도의 피가 곧 그리스도의 성령이기 때문에 오십 일을 나타내는 오순절에 오셔야 했던 것입니다. 교회는 그리스도의 수난을 통해 오시는 성령으로 우리가 생명을 얻는다고 말합니다.

 

우리는 모두 한 성령 안에서 세례를 받아…… 한 성령을 받아 마셨습니다.”(1코린 12,13). 그러므로 성령께서는 또한 샘에서 물이 솟아나듯 십자가에 달리신 그리스도라는 샘에서 솟아나는 생수이시며, 이 생수는 우리 안에서 솟아올라 영원한 생명을 주십니다.”(가톨릭교회교리서, 694)

 

두 번째로 성령이 하느님의 피, 즉 하느님의 생명인 이유는 그 성령을 통해 하느님께서 성령을 받는 이에게 들어오시기 때문입니다. 성령 안에는 하느님의 생명과 존재가 들어있습니다. 성모님께서 성령으로 잉태하실 때, 성자께서 그 성령을 통하여 당신 온 존재를 성모님께 내어놓으신 것입니다. 성령 안에 하느님의 온 존재가 담기기 때문에 성령을 받으면 하느님의 성전이 됩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당신 자신을 넣어서 내어주시는 성체와 성혈이 곧 성령입니다. 성령 안에는 하느님의 본성이 담겨 있습니다. 그래서 성령도 하느님과 같은 본성을 지니게 되시는 것입니다.

 

교회는 이렇게 가르칩니다.

그리스도의 은총은 무상의 선물이며, 하느님께서 우리 영혼을 죄에서 치유하여 거룩하게 하시려고 성령을 통해서 우리의 영혼 안에 불어넣어 주시는 당신 생명이다. 이 은총은 세례로써 받는 성화 은총(聖化恩寵, gratia santificans) 또는 신화 은총(神化恩寵, gratia deificans)이다. 이 은총은 우리 안에서 성화 활동의 샘이 된다.”(가톨릭교회교리서, 1999)

 

인간이 성령을 받음으로써 하느님이 될 수 있다면 그 성령 안에 당신 온 신적 본성을 맡겨주셨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생명을 내어주시면 살아계실 수 없고, 신성을 내어주시면 계속 하느님이실 수 없습니다. 하느님께서 마치 피자조각처럼 성령을 나누어주신다고 생각하니 성령의 가치를 제대로 느낄 수 없는 것입니다. 하느님은 당신 온 존재를 성령을 통해 내어주시기 위해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셨습니다. 우리가 받는 성체성혈은 곧 그리스도의 죽음 값인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성령께서 하느님의 피이신 이유는 계약때문입니다. 모든 관계는 계약입니다. 계약은 쌍방 간의 필요에 의해 맺어집니다. 그리고 상대를 위해 자신의 의무를 다해야 합니다. 모르는 두 사람이 땅을 사고팔기 위해 계약을 맺으면 새로운 관계가 맺어집니다. 그러나 그 관계는 돈을 주고 땅을 주어야 하는 쌍방의 의무를 다할 때에만 유효합니다. 만약 이 두 관계가 영원하려면 영원히 자신의 것을 내어줄 줄 아는 관계가 되면 됩니다. 남편과 아내의 관계가 영원하려면 끊임없이 상대에게 자신의 모든 것을 내어주어야 합니다.

 

교회와 그리스도와의 관계도 마찬가지입니다. 미사 때 사제가 성혈이 든 성작을 들고 너희는 모두 이것을 받아 마셔라. 이는 새롭고 영원한 계약을 맺는 내 피의 잔이니, 죄를 사하여 주려고 너희와 많은 이를 위하여 흘릴 피다.”라는 예수님의 성만찬 때 하신 말씀을 되풀이합니다. 미사는 마치 그리스도와 교회가 맺은 혼인 계약을 잊지 않기 위해 계약서의 조항을 되새기는 시간과 같습니다.

 

남편과 아내가 서로 자신이 낀 결혼반지를 보며 부부의 의무를 되새기는 시간과 같습니다. 남편이 밖에 나가서 피 같은 돈을 벌어와 아내에게 주듯이 그리스도께서는 교회를 위해 당신 피를 흘려 신랑으로서의 계약조항을 준수하십니다. 신부가 필요한 것은 신랑의 피입니다. 그러면 신부인 교회는 그리스도께서 원하시는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처럼 너희도 서로 사랑하여라.”의 계명을 지킴으로써 그분과의 계약을 유지합니다. 계약이 유지되어야 관계가 유지됩니다. 이웃을 미워하면 성령으로 맺어진 그리스도와의 계약이 끊어지기에 그리스도와의 관계도 끊어지게 되는 것입니다.

 

바오로 사도도 이 계약은 문자가 아니라 성령으로 된 것입니다. 문자는 사람을 죽이고 성령은 사람을 살립니다.”(2코린 3,6)라고 말합니다. 교회는 그리스도의 피로 맺은 계약, 곧 성령으로 맺는 계약에 대해 이렇게 가르칩니다.

그리스도께서는 바로 당신 피로 새로운 계약을 맺으시고, 유다인과 이방인 가운데에서 부르신 백성을 혈육에 따라서가 아니라 오로지 성령 안에서 하나로 모으시어, 하느님의 새로운 백성이 되게 하셨다.”(가톨릭교회교리서, 781)

 

모든 관계는 계약이고 계약 안에는 내어줌이 있어야합니다. 그렇다면 성부와 성자의 관계도 마찬가지일 것입니다. 관계 안에는 이렇듯 오고가는 선물이 존재해야 합니다. 성부와 성자 사이에 오고가는 선물은 성령이십니다.

 

예수님의 세례 때 하느님 아버지께서 성령을 보내주십니다. 하느님은 사랑 자체이시라 생명을 내어주실 수밖에 없습니다. 또한 예수 그리스도께서도 십자가에서 아버지, ‘제 영을 아버지 손에 맡깁니다.”(루카 23,46)라며 숨을 거두십니다. 삼위일체 하느님의 모든 내어줌은 이렇듯 죽음을 전제합니다. 하느님은 살려고 해서 영원히 사시는 분이 아니라 상대를 살리기 위해 죽으려고 하셔서 영원히 사시는 분입니다. 사랑하면 죽지 않을 수 없습니다. 자신을 내어주지 않는 사랑을 없습니다. 하느님은 사랑 자체이시기 때문에 죽으시는 분이시고 죽으시기 때문에 영원한 생명을 누리시는 분이십니다.

 

 

그렇지만 여전히 하느님께서 죽으실 수 있다는 말을 받아들이지 못할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사실 하느님께서 죽으실 수 없다고 말하면 그것이 이단입니다. 예수님은 사람이시면서 하느님이십니다. 그분께서 십자가에서 돌아가셨을 때 사람이 죽으신 것일까요, 하느님께서 죽으신 것일까요? 사람만 죽고 하느님은 사셨다고 하면 그것이 이단입니다.

 

그러면 이렇게 물어볼 수 있을 것입니다. 성모님은 인간 예수의 어머니인가요, 아니면 하느님의 어머니인가요? 인성과 신성은 분리할 수 없기 때문에 성모님께서 인간 예수의 어머니가 되신다면 동시에 하느님의 어머니도 되십니다. 예수님의 인성과 신성은 분리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어머니시라면 인간 예수의 어머니이기도 하고 동시에 하느님 예수의 어머니이기도 하십니다.

 

마찬가지로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죽으셨다면 인간 예수가 죽으신 것이기도 하고 하느님 예수가 죽으신 것이기도 합니다. 인간 예수는 죽었지만 하느님 예수는 죽지 않으시었다고 말하면 네스토리우스 이단에 빠지게 됩니다. 네스토리우스는 성모님께서 하느님의 어머니가 되실 수 있다는 것을 거부하였습니다. 한 예수 안에서 인성과 신성을 구분해서 생각한 것입니다. 그러니 하느님께서 죽으실 수 있다고 말하는 것은 타당합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당신 옆구리에서 흘러나오는 피와 물을 통해 당신 신부인 교회가 탄생하도록 분명 돌아가셨습니다. 그분이 세우신 교회를 통해 오는 성사는 분명 그분의 목숨 값입니다.

 

 

예수님께서 세례를 받으실 때 하느님께서 성령을 주셨다면 하느님 아버지는 아드님을 위해 죽으셨다고 보아야 합니다. 그래야 성령 안에 하느님의 온 존재와 신성이 들어가 성령께서도 아버지와 같은 분이 되십니다. 물론 이 죽음은 인간처럼 죽는 것을 말하지는 않습니다. 하느님은 영원하신 분입니다. 이 죽음은 분명 죽음이지만 부활이 연계된 죽음입니다. 예수님은 죽으셨지만 곧 부활하셨습니다. 죽으시면서 부활하실 것을 아셨습니다. 아버지도 성령을 주시며 아드님께서 십자가의 죽음을 통해 당신께 다시 돌려보내실 것을 아십니다. 이것이 영원한 계약이기 때문입니다.

 

 

삼위일체 교리를 이렇게 성부와 성자께서 성령을 선물로 내어주시며 다시 받는 계약의 관계로 설명하는 이유는 그래야 삼위일체론적 이단에 빠지지 않기 때문입니다. 대부분의 삼위일체 이단은 양태론(樣態論)이나 삼신론(三神論)입니다.

 

양태론은 성부-성자-성령께서 본래 한 분이신데 상황에 따라 다른 모습으로 가면만 바꿔가며 나타나신다는 생각입니다. ‘하느님은 한 분이시어야 한다는 생각에만 집중하면 이렇게 양태론에 빠집니다. 하느님은 성부-성자-성령 완전하게 구분이 되는 세 인격체이십니다. 한 분 안에서는 관계의 역동성이 일어나지 않습니다. 세 분 하느님은 각자 자유와 인격을 지닌 분들이시고 끊임없이 관계를 맺으시는 분들이십니다. 그래야 하느님 본성이 사랑이 되십니다. 내어주고 받음 없는 관계는 존재하지 않습니다.

 

그런데 양태론을 극복하기 위해 관계만 지나치게 강조하면 하느님은 처음부터, 성부-성자-성령이 제각각이시고 각자 신성을 지니신 다른 신이라는 삼신론에 빠집니다. 하느님은 세 분이시지만 동시에 한 분이셔야 합니다. 다시 말해 하느님의 본성인 신성(神聖)’은 하나여야 하는 것입니다. 그 신성은 나눠질 수 없어서 마치 피자처럼 세 분 하느님께서 쪼개어 동시에 가지실 수 없습니다. 또 신성을 각자가 동시에 가지게 되면 동시에 세 분의 신이 생기게 되어 삼신론이 됩니다. 세 분 하느님이 동시에 신성을 가지셔야 한다고 여기면 신성에 셋이 되어서 삼신론이 되는 것입니다. 따라서 하나인 신성을 옮겨주시는 성령의 역할을 무시하면 삼위일체는 이단에 빠집니다. 이에 하느님께서는 성부와 성자께서 성령이 지니신 신성을 서로 주고받으시며 역동적인 사랑의 관계 안에서 세 분이 하나가 되심을 세상에 보여주셔야 했습니다. 이것을 구원경륜적 삼위일체라 합니다.

 

예수님께서 세례를 받으실 때 아버지로부터 성령을 받기 전까지는 기적을 행하시는 모습을 보여주셔서는 안 됩니다. 그 전까지는 신성을 아버지께서 지니시고 계셨음을 보여주셔야 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 신성을 아버지께 돌려드리신 다음에는 무덤에 묻혀 죽어계셔야지 하느님으로서 다시 나와서 활동하셔서는 안 됩니다. 이미 성령을 아버지 손에 맡겨드렸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 돌아가신 3일 동안은 예수님께서 하느님으로서 침묵하고 계셔야 세상에 하느님이 한 분뿐이실 수 있습니다.

 

물론 이것은 시간과 공간을 염두에 두어두고 설명하는 것이기 때문에 하느님 삼위일체 신비를 정확히 설명해주지는 못합니다. 그저 비유로 이해할 수 있을 뿐입니다. 다만 하느님은 사랑 자체이시기 때문에 성령을 주고받으시는 역동성을 고려해야 양태론이나 삼신론에 빠지지 않을 수 있는 것입니다. 시간적으로는 아버지가 하느님으로 계실 때가 있는 것처럼 보이고 성령께서 내려오실 때는 성령 하느님만이 신성을 지니신 것처럼 보이고 또 그 신성을 품으신 그리스도께서 하느님으로서 사시는 것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하느님께는 시간과 공간의 제약이 없습니다. 그래서 내재적 삼위일체는 인간의 머리로는 이해할 수가 없습니다. 적어도 이런 역동성 안에서 세 분 하느님이 한 분 하느님으로 언제나 영원하시다는 것을 짐작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이런 비유를 들어도 좋을 것입니다. 바람개비에 두 날개가 있습니다. 하나에는 붉은 점을 찍고 다른 하나는 텅 빈 채로 그대로 둡니다. 그런데 바람이 붑니다. 성령의 힘입니다. 사랑의 힘입니다. 사랑은 자신의 것을 내어주게 합니다. 그렇게 붉은 점이 찍힌 날개는 바람의 힘에 의해 아무 것도 그려지지 않은 날개 쪽으로 이동합니다. 그러면 붉은 점이 있던 날개 위치는 이제 텅 빈 날개가 위치하게 됩니다. 성령의 힘으로 아버지께서 지니신 신성이 아드님께로 옮겨간 것입니다.

 

그런데 바람이 세게 불면 결국 그 주고받음을 통해 붉은 점은 하나의 큰 원을 만들게 됩니다. 아버지는 성령의 힘을 통해 아드님께로 향하고 아드님은 성령을 통해 당신을 아버지께 보냅니다. 그렇게 아버지는 아드님 안에 들어오시고 아드님도 아버지 안으로 들어가십니다. 시간과 공간의 제약 안에서 바라보면 끊임없이 신성을 주고받는 역동적인 과정이 존재하지만, 시간과 공간의 제약이 없어지면 이렇듯 하느님 안에서는 세 분이 항상 하느님이 되시는 것입니다. 이런 서로를 위한 내어줌의 역동성을 무시하면 하느님을 사랑이라 부를 수 없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인간의 죄를 없애시기만을 위해 죽으신 것이 아니라 아버지와의 관계를 유지하시기 위해 죽고 부활하심을 반복하실 수밖에 없으신 분이십니다. 예수님은 인간의 죄를 사하실 필요가 없으셔도 삼위일체 사랑을 유지하시기 위해 영원히 죽으셔야 하고 영원히 부활하셔야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사람들이 어떠한 죄를 짓든, 신성을 모독하는 어떠한 말을 하든 다 용서받을 것이다. 그러나 성령을 모독하는 말은 용서받지 못할 것이다”(마태 12,31)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성령은 선물 자체이신 분이시고, ‘사랑 자체이신 분이십니다. 성령을 모독하는 말은 성령의 존엄성을 깎아내립니다. 그 방법은 성령께서 마치 하느님께서 가지신 소유물 중의 하나처럼 여기는 것입니다. 그러면 성령께서 모독을 당하십니다. 성령을 주시기 위해 하느님께서 죽으셔야 한다는 것을 믿지 못하면 그것 자체가 성령님이 하느님의 생명이며 하느님임을 모독하는 것이 됩니다. 성령을 통하여 하나가 되시는 성부와 성자께서 서로를 위해 죽지 않으신다면 사랑의 내어주는 본성을 깎아 내리게 됩니다.

 

또한 성령을 주시기 위해 하느님께서 죽으셔야 한다는 것을 믿지 못하면 하느님의 자비도 믿지 못하게 됩니다. 인간은 하느님의 자비를 믿지 못해 서로 자기합리화를 하다가 에덴 동산에서 쫓겨났습니다. 하느님의 자비에는 한계가 없습니다.

 

교회에 성령을 주시기 위해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달려 죽으셔야 했던 것은 하느님 자비의 표현입니다. 하느님께서 인간과의 관계에서 그러셨다면 삼위일체 하느님 사이에서도 성령을 주시기 위해 죽으셔야 하는 것은 더 당연한 일입니다. 죽음은 하느님의 자비의 결과입니다. 피는 생명입니다. 성령도 생명이십니다. 성령은 사랑 자체이시고 자비 자체십니다. 하느님께서 목숨을 내놓으시면서까지 생명의 은총을 주실 수 있다고 믿어야 하느님의 자비를 믿는 것입니다. 하느님께서 죽으실 수 없다고 믿는 것은 성령의 가치를 떨어뜨려 그 선물을 모독하는 것이 되어버립니다.

 

그렇다면 그 성령께서 그 사람을 절대 변화시킬 수 없으십니다. 선물의 가치를 알아야 받는 이에게 변화가 일어납니다. 그분이 목숨을 내어주시며 주신 은총이 성령이고 정말 하느님의 피가 성령이십니다. 하느님께서 성령을 주시기 위해 죽으셨다고 믿어야 성령을 모독하지 않게 됩니다. 그리스도께서는 정말 성령을 주시기 위해 피를 흘려 죽으셨습니다. 우리가 받는 세례, 고해, 성체 성사 모두가 바로 그분 죽음의 값입니다. 인간을 위해 죽으실 수 있으신 분이시라면 삼위일체 하느님 내에서도 이 신비가 일어남을 믿어야합니다.

 

그러니 저는 하느님께서 상대를 위해 당신 생명과 신성을 내어주시기 위해 죽으실 수 있는 분이기 때문에 시간과 공간 안에서 이해하자면 세 분이 동시에 신성을 가지신 것이 아니라 신성의 서로 내어주고 받음을 통해 순차적으로 하느님의 지위를 유지하신다고 감히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삼위일체 신비 안에서 이 사랑의 역동성의 진리를 무시하면 진짜 이단에 빠질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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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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