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4월 19일 (금)
(백) 부활 제3주간 금요일 내 살은 참된 양식이고 내 피는 참된 음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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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느님께서 세우신 분에게 순명하는 신앙인이 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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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만연 [fisherpeter] 쪽지 캡슐

2020-01-05 ㅣ No.135103

오늘 교중미사를 참례하였습니다. 미사 시작 전 교구보를 보니 저에게 영세를 주신 신부님의 강론이 실려 있었고 신부님께서 웃으시는 모습의 사진을 보면서 기분이 좋았습니다. 가능하면 저는 미사 참례 때 앞 줄에 앉으려고 합니다. 이건 개신교 다닐 때부터 가진 오랜 습관입니다.

 

앞 줄에 앉으면서 마침 어제 올린 글 속에 나오는 자매님이 오늘 해설을 하기에 자리에 앉아서 손을 흔들며 반갑다는 인사를 보냈습니다. 사실 이게 형재애가 아닌가 싶은 마음에 손을 흔들어 친근함을 표시했습니다. 여기까지는 기분이 상쾌했습니다.

 

신부님께서 제대에 오르시고 강론시간이 되었습니다. 오늘 신부님의 강론 녹취를 하지 않은 게 정말 후회가 됩니다. 처음에는 강론이 부드럽게 시작되었는데 얼마 지나지 않아서 갑자기 무거운 내용으로 강론 주제가 선회를 하는 것이었습니다.

 

어느 시점부터는 강론을 들으면서 가슴이 터질 것만 같았습니다. 이제 일주만 있으면 신부님께서는 다른 곳으로 가십니다. 오늘 신부님의 강론은 슬픈 내용이었습니다. 들으면서 충격을 받았습니다. 저는 신부님을 좋아하지도 싫어하지도 않습니다.

 

강론을 들으면서 신부님의 표정은 마치 눈물을 흘리는 표정 같았습니다. 사실 눈물은 언제 흘리는지요? 슬플 때, 괴로울 때, 억울할 때 등등 ....   실제로 눈물을 흘려야만 눈물을 흘리는 건 아니라고 봅니다. 가슴으로도 눈물을 흘릴 수도 있습니다.

 

말없이 가슴으로 흘리는 눈물이 어쩌면 더 가슴 아픈 눈물이 될 수 있습니다. 신부님은 실제로 눈물을 흘리는 건 아니였지만 가슴으로 흘리는 눈물은 확실한 것 같았습니다. 저는 남자이지만 사실 독특한 달란트가 있습니다.

 

남다른 감성을 가지고 있습니다. 한번은 오래 전에 한 학부모님과 상담을 하면서 밝은 모습으로 이야기하다가 어머님이 순간 눈물을 흘리셨던 적이 있었습니다. 그 학부모님은 가슴으로 낳은 딸이라는 내용으로 올린 글에 나오는 아이의 어머니입니다.

 

어머니가 눈물을 흘린 건 다름 아니라 제가 어떤 부분에서 어머니의 마음을 배려하는 내용으로 무슨 말씀을 드린 적이 있었습니다 어머니께서 눈물을 흘리신 건 제가 남자인데도 어떻게 어머니 감정을 잘 읽어서 이해를 할 수 있는지 도저히 상상을 할 수 없어 순간 너무 감동이 돼 눈물이 핑 돌았다는 것입니다

 

이건 여자가 아니면 느낄 수 없는 그런 감정이라고 하셨습니다. 그러니 남자인 제가 그런 느낌을 읽을 수 있다는 사실에 놀랐던 것입니다. 지금 이 이야기를 말씀드리는 건 오늘 신부님께서 미사를 집전하실 때 강론을 하시면서 얼굴에 나타난 표정에서 제가 느낀 감정을 설명하려고 하는데 제가 느낀 감정이 절대적일 수는 없지만 그 느낌에 대해 말하려고 하는 게 나름 설득력이 있다는 걸 말씀드리기 위한 전제로서 학부형과 있었던 사례를 말씀드리는 것입니다.

 

저는 하느님이 아니고 인간이기 때문에 신부님의 감정을 전적으로 알 수 없습니다. 사람은 꼭 어떤 심정을 직접 말로 "나는 지금 이런 느낌을 가지고 있다" 고 상술해야만 그 심정을 알 수 있는 건 아닙니다. 그냥 분위기로써도 얼마든지 말하는 사람의 감정을 읽어낼 수가 있습니다.

  

저는 그냥 아주 평범한 사람이고 부족하지만 외국어를 지도합니다. 언어를 지도하는 입장이라 조금은 남들보다 언어적인 감각은 있다고 생각합니다 신부님의 강론을 들으면서 신부님의 심정을 충분히 읽어낼 수가 있었습니다.

 

강론을 들을 때 신부님이 한편으론 불쌍하고 측은한 느낌이 들 정도였습니다. 눈치가 빠른 사람은 신부님의 강론 내용에서 제가 느낀 감정과 같은 느낌을 받았을 겁니다. 그렇지만 많은 사람은 이게 무슨 내용인지 감을 잡지 못하는 분도 분명 다수 있었을 겁니다.

 

사실 신부님의 강론 내용에 대해 정상적인 문해력을 가진 사람이 들었을 때는 충분히 울분을 가져야 하는 게 정상입니다. 본론을 말하기에 앞서서 이렇게 전주곡에 내용을 많이 할애를 하는 건 이유가 있습니다. 이 내용은 아주 민감한 내용이기 때문에 매우 조심스럽게 제 생각을 완곡하게 표현을 해야만 할 만큼 중대한 사안이라 신중에 신중을 기해야 되기 때문입니다. 이제 그럼 본론으로 들어가겠습니다. 

 

사실 미사를 드리면서 나중에 이 느낌을 굿뉴스에 올려야겠다고 생각을 했었습니다.

  

강론을 들을 때 유심히 들었습니다. 왜냐하면 내용이 심각한 내용이고 스스로에게 울분이 일어나서 이 울분을 글로 표현하고 싶어서 입니다.이건 비단 제가 몸담고 있는 본당에서 일어난 일이고 좀 더 나아가 마산교구 일이라고는 하지만 저는 이건 우리 모두의 문제라고 생각합니다.

 

이건 전교구 모든 성당이 함께 고민하고 아파해야 할 문제라고 생각합니다. 왜 그럴까요? 우리는 전세계적으로 동일한 사도신경으로 서로 통공을 하면서 믿음을 고백하는 신앙을 가지고 예수님과 한몸으로 이루어진 공동체의 지체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이건 지금 제가 속한 본당의 치부로만 여길 사안이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그렇게 생각한다면 그건 근시안적인 사고방식이라고 생각합니다. 우리가 가톨릭을 신앙을 가진다고 할 때 가톨릭이라는 종교가 가지는 대표적인 개념인 보편적이라는 말에 위배된다고 봅니다.

 

지금 시기는 교구에서 신부님들의 인사이동과 관련해서 분주한 시간이라고 알고 있습니다. 오늘 신부님께서 독서와 복음 내용에 맞추어서 강론을 하시다가 인사이동에 대해 말씀을 하셨습니다. 여러 가지 내용을 언급할 수는 없어서 중요한 포인트만 말씀을 드리고 저의 견해를 최종적으로 밝히고 싶습니다.

 

사실 본당으로 오실 신부님이 내정이 되어 있었습니다. 근데 어떤 분인지는 알고 있지만 밝힐 수는 없고 그냥 어떤 신자라고만 표현을 하려고 합니다. 일반 신자는 아닙니다. 그럼 대충 누군지 알 수 있을 겁니다.

 

오실 신부님에 대한 인사권에 불만을 가지고 교구장님을 찾아 항의를 한 끝에 다른 신부님께서 본당으로 오신다는 이야기를 하셨습니다. 사실 이 내용을 제일 중요하게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다른 것도 중요하지만 이거에 비하면 아무 것도 아니기 때문에 이건 별론으로 하겠습니다. 

  

어떻게 이럴 수가 있습니까?  이런 일을 한 사람은 정말 자신이 얼마나 큰 잘못을 했는지 알고 있는지 모르겠습니다. 저는 신학적인 걸 잘 모릅니다. 사람은 세상을 살아가는 데 있어서 기본상식이라는 게 있습니다. 지식이라는 건 배워서 알 수도 있는 게 있지만 꼭 배워서 알 수만 있는 건 아닙니다. 배우지 않아도 이성적으로 판단해서 알 수도 있습니다

 

이 부분은 사실 교리서 서두에 비슷한 내용이 나옵니다. 그렇게 본다면 일개 신자가 그것도 본당 주임신부님도 아니고 교계제도상 한 교구의 최고 수장인 교구장님의 고유권한인 인사권에 대해 왈가왈부 한다는 게 이게 상식적으로 있을 수 있는지 정말 저의 신앙 상식에서는 도저히 이해가 되지 않습니다. 지금까지 그 사람들은 신앙생활을 하면서 무엇을 배웠는지 여쭈고 싶습니다.

 

성당을 다니면서 순명이라는 건 귀가 닳도록 들었을 것입니다. 사제는 하느님이 세우신 분입니다. 성경을 잠시 살펴보겠습니다. 다윗은 사울의 위협으로부터 피신해 다니면서 언젠가 사울을 죽일 기회가 있었습니다. 인간적으로 보면 정말 사울을 죽이고 싶은 심정이었습니다. 그런 절호의 기회가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다윗은 사울을 죽일 수가 없었습니다.

 

사울은 하느님으로부터 기름부음을 받은 사람이기 때문에 해할 수가 없다는 논리가 작용했던 겁니다. 성경이 이런 걸 왜 이야기했겠습니까?어떤 교훈을 주려고 하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이렇게만 말씀드려도 무슨 내용을 전달하고자 하는지 알 수 있을 겁니다.

 

물론 이성적으로 우리는 사목자에게 순명을 해야한다고 하는 걸 알고는 있지만 때론 인간인지라 완전히 순명이 되지 않는 것도 분명 있을 수 있습니다. 그렇다손치더라도 사안에 따라서는 절대적으로 순명해야 하는 게 있습니다.

  

이건 정말 무슨 일이 있어도 순명을 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오늘 신부님께서 이런 사실을 전제하시면서도 불러올 파장을 염려하셔서 완곡하게 표현을 하셨습니다.  신자들을 향해 마지막으로 아직까지 일주일 임기가 남아 있지만 임기 내에서는 본당 주임신부님 자격으로 오늘 강론하신 내용을 신자들이 잘 알아서 다시는 이런 일이 있어서는 안 된다고 간접적으로 에둘러 표현을 하셨고 또 반면교사로 삼아야 한다고 하셨습니다.

 

반면교사로 삼아야 한다고 표현하신 걸로 보면 분명 신사적으로 표현을 하신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신부님께서도 떠나시는 마당에 지금 신부님께서 가지고 계신 솔직한 인간적인 감정을 그대로 노출시킬 수가 없지 않겠습니까? 그러니 그런 식으로 표현을 에둘러 하셨으리라고 봅니다.

 

성경에 이런 말이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하신 말씀입니다. 들을 귀 있는 자는 알 수가 있다는 표현이 있습니다. 이 말씀처럼 오늘 신부님께서 말씀하신 내용을 잘 살펴보면 말씀 하나하나에 뼈가 있는 걸 저는 느낄 수가 있었습니다.

 

서두에 언급을 했듯이 정말 문해력이 좋아야 신부님께서 오늘 강론하신 내용을 신자들이 알 수가 있을 거라고 봅니다. 저는 세상말로 말해서 성당에서 별 볼일 없는 사람이고 보잘것없는 사람입니다. 아무리 보잘것없는 사람이라고 하더라도 인간의 탈을 쓰고 있는 이상 인간이 가져야 할 최소한의 염치 정도는 가지고 있습니다.

 

이와 같은 일을 벌인 사람들은 아주 최소한의 상식을 가지고 있는지 의문스럽습니다. "정말 이건 아니다." 라고 생각합니다. 이건 하느님에게 도전한 것과 같다고 생각합니다. 왜 그런가요? 주교님께서도 하느님께서 세우셨다고 봐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렇다면 주교님의 인사권자는 당연히 하느님이시지 않겠습니까? 그렇다면 사실 주교님께 항의를 한 것이지만 실제로는 하느님께 항명을 한 것과 동일한 효과를 가진다고 봅니다. 그렇게 본다면 이 얼마나 무서운 일입니까?

 

한낱 피조물이 창조주의 권위에 도전한 것과 같은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저는 이 사람들을 비판하기에 앞서서 먼저 저 자신부터 이 사람들이 한 행위에 대해서 대신 주교님과 하느님께 용서를 구하고 싶습니다. 제 자신이 대단한 사람이라는 뜻이 아닙니다.

 

비록 제가 버러지 같은 모습으로 신앙생활을 할지는 모르지만 제가 몸담고 있는 공동체 내에서 이런 슬픈 일이 일어난 것에 대해 저도 책임이 없다고는 할 수 없을 것입니다. 비록 부족한 신앙생활을 하는 사람이지만 그래야 신앙인이라고 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에서 그렇게 생각하는 것입니다.

 

차분하게 생각을 하며 정리를 해서 표현을 해야 하는데 지금 감정으로써는 어떻게 잘 이성적으로 판단이 잘 서지 않습니다. 오늘 미사를 드리면서 신부님의 얼굴 표정은 지금까지 제가 신부님의 모습을 본 표정 중에서 가장 최악이었고 이런 사태가 일어난 거에 대해 신부님으로서는 억장이 무너지셨을 겁니다. 정말 제가 보기엔 역역했습니다.

 

중간 중간에 목이 메이는 상황을 볼 땐 가슴이 찟어지듯 아팠습니다. 신부님도 사제이기 이전에 하나의 사람입니다. 신이 아닌 이상 누구나 부족한 부분이 있을 수 있습니다. 저는 무엇 때문에 오시기로 하신 신부님을 반대했는지 그 이유는 알 수가 없습니다. 원래 오시기로 예정된 신부님의 심정이 어떻겠습니까?

 

저는 대충의 이유를 알고 있지만 만약 정말 제가 추측한 이유 때문에 오시기로 하신 신부님을 거부했다고 한다면 나중에 하느님 대전에서 하느님의 진노를 피하기 어려울 거라고 생각합니다. 본당에서 일어난 일이지만 이건 저의 본당만의 문제로만 봐서는 안 된다고 생각합니다.

 

가톨릭 신앙을 가진 사람이라면 누구나 이런 사례를 통해 우리가 신앙생활을 하는 데 있어서 항상 듣게 되는 순명이라는 말을 다시 한 번 더 진지하게 생각해보는 시간을 반드시 가져야 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오늘 신부님의 모습을 보니 저도 한때는 사제를 꿈꾼 시절도 있었지만 참 씁쓸하다고 생각합니다. 

 

오늘 이 일을 보면서 성직자로서 살아가는 이 세상 신부님들의 모습이 정말 애처롭고 측은하다는 생각도 듭니다. 처음부터는 아니지만 언제부터인가 사제의 독신 규정 때문에 독신으로 자신의 삶을 하느님께 봉헌하는 삶이 사제의 삶이 되었습니다.

 

아무리 하느님을 위해 자신의 몸을 독신으로 봉헌한다고는 하지만 인간의 몸을 입고 있는 이상 인간으로서 가지는 가장 원초적인 욕망을 포기하면서까지 일생을 하느님을 위해 봉헌하는 그것 하나만으로도 우리 일반 신자들은 경의를 표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이건 수녀님도 마찬가지이고 수사님도 마찬가지입니다. 정말 하고 싶은 말은 많지만 지금 너무 머리가 아파 더 이상 다른 이야기를 할 수 없을 것 같습니다. 이 정도로 말씀을 드리면 어느 정도 저의 생각이 전달되었으리라고 봅니다.

 

마지막으로 한마디만 말씀드린다면 저 자신도 별볼일 없는 사람으로서 이런 말씀을 드릴 자격은 없지만 우리는 무엇 때문에 신앙생활을 하는지, 하느님의 영광을 위해서 신앙생활을 하는지, 인간적인 영광을 위해 신앙생활을 하는지 스스로에게 진지하게 자문해봐야 할 것 같습니다.

 

이제 그만 쓰고 싶습니다. 머리가 지끈거려서 쓸 수도 없습니다. 처음부터 여기까지 떠오르는 느낌 그대로 수정하지 않고 타이핑을 하였습니다. 퇴고도 하지 않고 그대로 싸이트에 올리려고 합니다. 그래야만이 저의 진솔한 느낌이 그대로 전달될 것 같아서 그렇게 하려고 합니다.

 

우리 모두 저 자신을 포함해서 이런 부분을 한번 진지하게 생각해봤으면 합니다. 신앙생활에서 순명 말입니다. 그렇다고 제가 뭐 순명을 잘하는 사람이라는 뜻이 절대 아닙니다.

 

글에서도 표현을 했듯이 저는 아주 부족하고 정말 신앙공동체에서 특이할 만한 일도 하지 않는 일개 그냥 평범한 신자이지만 아무리 부족한 신자라고는 하지만 이건 정말 아니지 않나 싶어서 우리 모두 한번 전반적인 신앙생활 안에서 저 자신부터 제대로 얼마나 순명하는 신앙생활을 하는지 되돌아보고 반성해보자는 뜻에서 글을 올렸습니다.

 

사실 글을 올리지만 막연한 두려움도 엄습해오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제가 별볼일 없는 일개 신자라서 그렇습니다. 우리 모두 이 땅에 있는 모든 성직자분들을 위해 그분들 자신이 원래 하느님의 길을 가려고 처음 마음먹었던 원의대로 그 길을 끝까지 잘 가실 수 있도록 기도를 많이 해드렸으면 합니다. 감사합니다.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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