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4월 26일 (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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큰 아들이 미처 못본 아버지의 사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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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만연 [fisherpeter] 쪽지 캡슐

2019-12-16 ㅣ No.134609

 

조금 전에 지금 현 전주교구장님께서 10년 전에 쓰신 글 한 편을 보았습니다. 돌아온 탕자에 관한 글이었습니다. 이건 워낙 잘 알려진 내용이라 모르는 사람이 없을 겁니다.

 

사실 탕자에 관한 복음은 머리로는 이해를 할 수가 있지만 실제 가슴으로 그걸 받아들일 수 있다는 건 그리 쉽지 않습니다. 솔직하게 말하면 그렇습니다. 만약 이걸 가슴으로 받아들일 수 있다면 거의 성자의 수준에 이른 사람이지 않을까 저는 생각합니다.

 

다만, 우린 가슴으로 받아들여지지 않을지라도 그렇게 되도록 노력해야 한다고 하는 의식을 의도적으로 가지려고 할 뿐입니다.

 

사실 이 복음은 작은 아들의 입장과 같은 처지에 있는 사람은 어쩌면 이 복음이 위로가 될 수도 있지 않겠습니까? 성실하게 세상을 사는 큰아들과 같은 사람들에게는 썩 달갑지 않은 복음 내용일 수 있습니다.

 

이 복음은 정말 수도 없이 설교나 강론을 통해 들은 내용입니다만 짧은 내용임에도 불구하고 각양각색의 무수한 관점으로 바라볼 수 있고 또 해석을 할 수 있다는 점에서 참으로 하느님의 말씀에 숨겨진 보화는 무궁무진하다는 걸 또 한 번 느낄 수가 있었습니다.

 

저는 오늘 이 복음에 대해 세부적인 사항을 언급할 필요는 없을 겁니다. 워낙 유명한 내용이기 때문입니다. 다만 오늘 색다르게 알은 내용을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물론 이 내용을 아시는 분도 계실 겁니다. 큰아들은 사실 누가 봐도 인간적으로는 모범적인 삶을 사는 사람의 전형을 보여줍니다. 바로 인간적으로 열심히 생활하고 인간이 지켜야 할 도리를 성실히 지키며 살아가려고 노력하는 한 인간의 모습을 잘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런데 방탕한 생활을 하고 돌아온 동생에게 베푸시는 아버지의 사랑을 보고 그만 분개하고 맙니다. 큰아들이 왜 분개했을까요? 백번 양보해서 큰아들의 마음을 이해할 수 있다고 가정을 한번 해보겠습니다.

 

아버지의 사랑도 사랑이지만 자기가 봤을 때는 정말 아버지의 그 모습을 보면서 그럼 자기도 열심히 살고 싶은 마음이 싹 날아가버릴 것 같은 심정일 겁니다.

 

다음 내용은 주교님의 글 내용의 일부분을 인용한 것입니다.

 

그는 자신의 삶을 아버지의 사랑에 한 번도 내맡겨본 적이 없다. 그가 지금까지 그렇게 아버지의 말씀을 따르고 열심히 살려고 발부둥친 것은 거저주시는 아버지의 사랑에 대한 응답이 아니라, 자신이 생각한 삶의 원칙에 충실하려는 행동이었을 뿐이다.

 

그는 아버지의 크신 사랑에 사로잡힌 것이 아니라, 자신이 세운 원칙에 사로 잡혀잡힌 사람이었다. 그 결과, 그는 자신의 원칙으로 아버지의 사랑을 보았을 뿐이지, 아버지의 사랑으로 자신을 바라보지 못하였다.사실 그는 처음부터 가장 근본적인 점을 망각했다. 자신의 삶이 이미 아버지의 선물 자체이라는 것을. 그는 아버지의 아들 되는 자격과 존엄성을 거저 얻었음에도 불구하고, 이 근본적인 사실을 삶의 근본으로 삼지 않았다. 그 대신 자신이 세운 원칙을 더 중시했다.

 

작은아들을 통해 아버지의 깊은 사랑을 깨달을 수 있는 기회를 다시 얻었지만, 아버지의 조건 없는 사랑을 인정하지 않고 자신의 원칙을 계속 고집한다. 그 결과, 그는 먼저 자비로우신 아버지와 갈등을 빚는다.

 

아버지와 올바른 관계를 상실한 그는 동생을 거부하고, 결국 기쁨의 잔치에 스스로 참여하지 않는다. 그것이 아무리 올바르다 해도 하느님의 사랑에 바탕을 두지 않는 삶은 항상 같은 결과를 자초할 수 있다.

 

제가 인용한 부분에 대해서 나름 느낀 게 있습니다. 물론 인간적으로는 아버지께서 베풀어주시는 사랑에 대해 탐탁하게 생각하지 않을 수 있다고 보더라도 미처 한 가지 보지 못한 면이 있다고 보여집니다.

 

그로 인해서 아버지의 사랑이 얼마나 큰지를 알을 수 있어야 했는데 그걸 보지 못했다는 것입니다. 그렇게 된 연유는 바로 자기가 살면서 살아가는 원칙이 나름 일반적으로 보편적인 원칙이라고 하더라도 그게 절대적일 수가 없을 건데 큰아들은 그 원칙에 매여 있어서 아버지의 지극한 사랑을 볼 수가 없었다는 것입니다. 그런 시선으로 사물을 바라봤기 때문에 정작 실제 자신이 아버지로부터 받고 있는 사랑이 얼마나 큰지를 잘 모르고 있습니다.

 

바로 이 대목은 루카 복음 1631절을 보면 알 수 있습니다. 아버지께서 큰아들에게 말씀하십니다. ‘얘야, 너는 늘 나와 함께 있고 내 것이 다 네 것이다.’ 이 말씀을 하시는 아버지의 속내를 짐작할 수가 있지 않습니까?

 

분개하며 말하는 큰아들에 대해 바로 이어서 말씀하시는 상황입니다. 저는 늘 함께 있다는 말씀에 주목하고 싶습니다. 큰아들은 아버지와 함께 있는 것 자체에서는 실제로 자기가 큰아들로서 누리는 어떤 가시적인 혜택을 볼 수가 없으니 이 말이 무슨 말인지 의아해 할 수가 있습니다. 근데 아버지는 얘야 하면서 다 네 것이다라고 말씀하십니다.

 

저는 개인적으로 이 말씀을 이렇게 이해를 했습니다. 우리가 기도를 하든 뭘 하든 하느님의 현존에 머물러 있다는 게 우리의 눈에는 보이지 않지만 엄청난 은혜라는 걸 알 수가 있는 대목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럴 때 내 것이 다 네 것이다라는 이 말씀에서 보면 하느님과 함께 현존 속에 머무른다는 게 얼마나 중요한지를 알 수가 있습니다. 큰아들은 아버지와 함께 있으면서 그것의 가치를 보지 못했던 것 같습니다.

 

또한 마지막에 이런 말씀을 하십니다. ‘아우가 죽었다가 다시 살아났으니 즐기고 기뻐해야 한다는 말씀에서 아버지의 마음을 이해해야 하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만약에 작은 아들이 영영 집을 나가서 돌아오지를 않았다고 가정을 한번 해보면 그 상황이 어떻게 되겠습니까? 매일매일 집 나간 아들이 죽었는지 살았는지 걱정하실 아버지의 마음 말입니다.

 

만약 동생이 돌아오지 않아서 그렇게 걱정만 하시는 아버지의 얼굴을 보게 된다면 그런 모습을 지켜보는 자신의 마음이 어떻겠습니까?

 

아버지의 노심초사하시며 애끓는 마음을 생각해서라도 돌아온 동생을 보고 이제는 다시는 그런 아버지의 모습을 볼 수 없게 된다고 생각해 오히려 다행이라고 생각해야 하는 게 맞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동생을 생각해서가 아니라 아버지의 마음을 생각해서 그렇게 생각해야 한다고 봅니다. 마지막으로 오늘 주교님의 글을 보면서 가장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대목은 하느님의 현존 속에 있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지와 인간 스스로가 아무리 세상적인 기준으로는 합리적인 기준일 거라는 생각이 들 수가 있지만 그 기준이 때론 거저 주시는 하느님의 자비와 사랑을 거부할 수 있는 장애물로 전락할 수 있다는 사실이 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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