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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르투갈에 끌려온 조선인 노예를 생각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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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바램 [good79] 쪽지 캡슐

2019-11-19 ㅣ No.96446

[손호철의 포르투갈 여행기] 리스본(1) : 포르투갈 대탐험과 임진왜란

 

 

요즘 포르투갈이 뜨는 여행지이다. 유럽국가 중 그동안 잘 알려지지 않은 데다 자연도 아름답고 문화적 전통도 깊으며 상대적으로 물가도 저렴하기 때문이다. <마추픽추 정상에서 라틴 아메리카를 보다>, <레드 로드, 대장정 13800킬로미터 중국을 보다>, <카미노 데 쿠바: 즐거운 혁명의 나라 쿠바를 가다>, <이탈리아 사상기행>(근간) 등 진보적 시각에서 여행기를 써온 손호철 서강대 명예교수가 피카소 관련 책을 내기 위해 스페인과 프랑스를 여행하면서 포르투갈도 일주하고 돌아왔다. 손 교수의 포르투갈 여행기를 시리즈로 싣는다. <편집자> 

Lisboa. 리스보아? 이게 뭐지? 포르투갈에서 자주 볼 수 있는 단어이다. 생소한 이 단어를 고속도로 안내판에서 처음 봤다. 계속 이 단어가 고속도로에 나타나 혹 리스본이 아닌가 의아해 하다가 휴게소 매점에 들어가 물어보니 맞았다. 리스본은 영어식 표현이고 포르투갈에서는 리스본을 리스보아라고 부른다.  
   
'세계의 수도', '세계의 관문'. 16세기 초 리스본을 부르던 명칭이다. 그렇다. 지금은 '유럽변방의 한 관광도시'이지만 16세기 초 리스본은 세계의 중심이었다. 세계를 주름잡던 포르투갈 상선의 힘 때문이었다. 우리는 유럽의 세계정벌과 제국주의하면 스페인과 영국을 생각하지만, 그 원조는 원래 포르투갈이었다. 당시 리스본의 항만에는 동양으로부터 향신료 등을 실어 나르는 포르투갈 상선들이 가득 찼고 그 옆에는 대서양과 태평양을 건너야 하는 대형 상선들을 건조하는 조선소들이 바쁘게 움직이고 있었다. 그리고 도시에는 세계각지에서 온 다양한 복장과 피부색의 이방인들과 세계에서 실어온 진귀한 물품들이 넘쳐나고 있었다.  
     
포르투갈은 지금도 그러하지만 15~16세기 당시에도 인구가 얼마 되지 않고 유럽에서도 낙후한 나라였다. 16세기 초 포르투갈의 인구는 200만 명에 불과해 조선의 인구(1천만 명)의 5분의 1 정도였다. 이 작은 나라가 스페인(인구 850만 명)과 함께 일찍이 '대탐험'(이들은 '대발견'이라고 부르지만 이는 정말 서구중심적인 명칭으로, 나는 '대탐험'이라고 부르려고 한다)에 나서고 유럽 제국주의에 선봉에 서게 된 데에는 이유가 있다. 
    
첫째, 지리적 요인이다. 포르투갈은 대서양을 접해서 길게 자리 잡고 있는 나라이다. 좁은 땅덩어리에 나는 것도 별로 없어 일찍부터 어업과 해상무역 등 바다에 나가 생업을 유지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에 따라 조선술, 항해술이 발전했다.  
   
둘째, 포르투갈은 중세시절(8세기 초~12세기 초) 스페인과 함께 아랍(무어)의 식민지였다. 당시 아랍은 문명의 황금기로써 수학, 천문학, 항해술 등에서 유럽과 비교할 수 없이 선진적인 학문과 기술을 보유하고 있었다. 이런 아랍의 지배 하에서 포르투갈은 자연스럽게 선진기술들을 습득할 수 있었다.  
   
셋째, 당시 포르투갈과 스페인 등은 아랍의 지배로부터 독립할 수 있었지만 당시 아프리카북부, 그리고 중동지역을 아랍이 장악하고 있었기 때문에 육로로 동양과 교류하는 것은 불가능했다. 따라서 유럽은 동양으로 갈 수 있는 바다길, 해양실크로드를 찾을 필요성이 절실했다.
    
포르투갈이 본격적으로 대탐험에 나선 것은 15세기 초 주앙 1세의 아들인 '항해왕 헨리(Henry the Navigator, 포르투갈명 엔리케)'에 의해서이다. 특히 그는 북아프리카의 교역로에 관심이 많아 지브랄타 해협 건너편의 북아프리카의 아랍지역을 정벌하고 북아프리카 교역로를 주로 개발했다. 또 궁정을 나와 바닷가에 살며 항해학교를 세워 항해기술자들을 양성하고 장거리 해양여행에 적합한 배를 건조했다. 바다로 인도에 갈 수 있다는 아이디어를 낸 사람도 바로 그였다. 이후 포르투갈은 15세기 말~16세기 초 본격적인 대탐험에 나서 아프리카의 모잠비크, 앙골라, 콩고, 기니아, 남인도의 고아, 브라질들을 식민지화했다. 그리고 남중국해의 해적을 소통한 공을 인정받아 은을 조공으로 제공하는 조건으로 마카오를 조차지로 얻었다가 1999년 중국에 반납했다.      
    
그러나 이제 '세계의 수도' 리스본의 모습은 찾아보기가 어렵다. 그것은 1755년 대지진으로 리스본시가 크게 파괴됐기 때문이다. 사람들이 리스본의 역사를 1755년 이전과 이후로 나누는 것은 그 때문이다. 그나마 대탐험 시절 항구에 세워진 벨렘탑, 제로니모스 수도원이 지진에서 부서지지 않고 남아 있어 주요 관광지가 되고 있다.
     
벨렘지구라고 부르는 리스본항의 대탐험 기념물 지역을 관광하기 위해서는 차를 가까운 예술관에 세우고 바닷가(아니 이곳은 사실 바다와 연결된 타구스강이라는 점에서 정확히 표현해 강가)를 걸어야 한다. 예술관 뒤쪽으로 높은 기둥을 두 개 세운 조각이 서 있다. 이를 배경으로 바다를 구경하고 있는 사람들의 모습이 한 폭의 예술사진이다. 바닷가를 조금 걸으면 삼각형의 산을 세우고 그 가운데를 반으로 잘라 놓은 것 같은 또 다른 조형이 나타난다. 포르투갈 전몰용사 추모탑 같은 것이다. 그 옆에는 전쟁박물관 같은 것으로 21세기에 포르투갈이 참여한 주요전쟁들의 사진들을 전시하고 있다. 
 

▲ 벨렘지구의 포르투칼 순국용사 기념비. 리스본을 가로지르는 타구스강을 바라보고 있다. ⓒ 손호철


오른 쪽으로 바다를 끼고 조금 더 걸아가면 바다에 세워진 흰색 탑이 나타난다. 리스본의 주요 관광시설중 하나인 벨렘탑이다. 1517년 지은 이 탑은 크기도 그리 크지 않은데다가 화려한 마누엘 양식(아래 참조)로 지어져 단순한 관광시설이라고 생각하기 쉽지만, 사실은 리스본을 지키던 핵심 방어시설이다. 이곳에 방어시설을 세운 것은 이유가 있다. 이곳은 대서양이 타구스강으로 변하며 강폭이 가장 좁아져 전략적으로 중요한 위치인 데다가 뒤에 각종 보물과 재화를 모아놓은 제로니모스 수도원이 위치하고 있기 때문이다. 
    
다만 화포가 일반화된 새로운 시대에 중세와 같은 거대한 성을 짓는다는 것은 의미가 없다고 생각해 지금과 같이 아담한 크기의 방어시설을 지었다. 구체적으로, 적을 탐지할 수 있는 4층탑을 짓고 그 앞에 반 타원형으로 방어요새를 만든 뒤 거기에 17개의 구멍을 뚫고 포를 설치하여 육지를 제외하고 거의 360도 방향으로 포를 쏠 수 있도록 만든, 당시로서는 첨단 군사요새였다.  
 

▲ 대탐험 시절 리스본의 핵심 방어시설인 벨렘탑, 이 탑 이름을 따서 대탐험 관련 유적이 모여 있는 지역을 벨렘지구라고 부른다. ⓒ 손호철


"하느님 아버지,  
이제 저희는 긴 항해를 떠납니다. 특히 희망봉을 넘어 아무도 가본 적이 없는 미지의 바다로 나갑니다. 저희 어린 양들을 불쌍하게 여기시어 풍랑과 폭풍우로부터 저희를 보호하사 인도 땅에 무사히 도착하도록 해주십시오!"
 

1497년 7월 9일 저녁, 벨렘으로부터 그리 멀리 떨어지지 않은 곳에 세워진 한 작은 성당에는 한 사내가 여러 부하들을 거느리고 무릎을 꿇고 기도를 드리고 있었다. 바스코 다 마스라는 선장이였다. 15세기 말 포르투갈과 스페인의 탐험 경쟁이 갈등을 일으키며 스페인은 서쪽으로, 포르투갈은 동쪽으로 탐험을 하기로 합의했다. 따라서 그는 새로운 인도항로 개척을 위해 아프리카 최남단의 희망봉을 지나 동쪽으로 가기로 결심했다. 4척의 배를 몰고 미지의 세계를 향한 목숨을 건 항해를 떠나기 전 이 성당에서 선원들과 밤샘 기도를 드렸다. 그는 아프리카 최남단의 희망봉을 돌아 인도항로를 개발하는데 성공하고 1499년 금의환향한다. 이를 기념해 이곳에 새로 세운 것이 바로 제로니모스 수도원이다. 
 

▲ 바스코 다 마스의 인도항로 개척을 개념해 지은 제로니모스 수도원. 그가 항해를 떠나기 전 밤샘 기도를 드린 위치에 세워졌다. ⓒ 손호철


포르투갈 건축양식의 절정으로 평가되는 제로니모스 수도원은 벨렘탑에서 다시 한참을 걸어가면 바다 쪽으로 엄청나게 높은 탑이 나타나고 길 건너에 나타나는 하얀 긴 건물이다. 낮지만 긴 부속 건물이 이어지다가 오른 쪽 끝에 큰 성당이 자리 잡고 있는데 이 성당이 수도원이다. 엄청난 크기의 이 사원은 포르투갈의 전성기에는 포르투갈이 벌어온 엄청난 부를 보관하기도 했던 곳이다. 마누엘 1세 재임기인 16세기 초 유행해 마누엘 양식이라고 부르는 포르투갈의 대표 건축양식으로 지어져 있다. 유럽의 고전적인 고딕양식에 이탈리아의 르네상스와 인도 등 건축양식을 혼합한 독창적인 건축양식이다. 특히 재미있는 것은 리스본 앞 바다에서 자주 볼 수 있는 조개껍질 등을 장식에 이용했다는 점이다. 자세히 올려다보니 조개껍질 모양의 장식이 유럽 어디에서도 보지 못한, 정말 이색적인 장식이었다. 안타깝게도 방문 당시 내부수리 중이라 관람을 금지하고 있어서 내부 구경은 할 수 없었다. 
 

▲ 대탐험을 기념해 1960년에 건립한 포르투갈 대탐험 기념탑. 그러나 식민지 입장에서 생각하면 이는 제국주의 기념탑이다. ⓒ 손호철


포르투갈의 대탐험 기념에는 비스코 다마스가 중심에 자리 잡고 있다. 그러나 정작 중요한 다른 한 사람이 빠져 있고, 잘 알려지지 않은 한 사람이 포함되어 있다. 잘 알려지지 않은 한 사람은 1500년 유럽인으로는 처음 브라질을 '발견'한, 아니 브라질에 '도착'한 페드로 카브랄이라는 사람이다. 그는 인도를 가는 다른 루트를 찾기 위해 서남쪽으로 항해를 떠나다가 브라질에 도착했다. 브라질이 포르투갈의 가장 큰 식민지였던 점을 생각하면 그는 포르투갈의 입장에서는 매우 중요한 사람이다. 예수회신부의 아마존 선교활동을 다룬 영화 <미션>도 바로 이 같은 포르투갈의 브라질에서의 식민지 활동을 다루고 있다. (이 같은 역사 때문에 브라질은 남미에서 유일하게 포르투갈어를 사용하는 나라인데 남미에서 스페인어를 사용하는 다른 나라들의 인구를 합쳐야 브라질과 비슷한 정도로 브라질은 큰 나라이다.) 
 

▲ 아름다운 리오의 경치. 브라질은 포르투갈의 가장 중요한 식민지였다. ⓒ 손호철


대탐험 기념에서 빠져있는 사람은 세계 최초로 바다를 통해 세계를 한 바퀴 돈 마젤란이다. 포르투갈인인 그는 1519년 유럽을 떠나 대서양을 따라 서남쪽으로 항해해 남아메리카의 최남단인 파타고니아를 지나 좁은 해협을 통과해 태평양으로 행했다. 이 해협은 엄청난 파도와 바람으로 항해가 거의 불가능한 곳으로 선단의 일부는 여기에서 배를 돌려 돌아가 버렸다. 마젤란이 최초로 통과한 이 해협은 이후 마젤란 해협으로 불리고, 이를 바라보고 있는 칠레 파타고니아의 푼타 아리나스의 중심광장에는 마젤란의 동상이 세워져 있다. 마젤란은 이후 태평양을 돌아 필리핀에 도착, 현지인들을 정벌하려다가 창에 맞아 목숨을 잃고 그곳에 묻혔다(그곳은 한국인들이 자주 가는 세부 앞의 막탄섬으로 그곳에 가면 탑 모양의 그의 무덤이 있다). 그러나 그의 부하들은 1522년 유럽으로 돌아와 세계 최초의 지구 한 바퀴 도는 여행을 완수했다. 280명이 떠났지만 돌아온 사람은 18명뿐이었다.
 

▲ 세계 최초로 항로로 세계일주를 한 마젤란. 그가 처음으로 지나간 남미 끝 마젤란 해협에 위치한 칠레의 푼타 아리나스에는 그의 동상이 서있다. ⓒ 손호철


마젤란이 포르투갈 사람임에도 불구하고 그에 대한 언급은 없는 데는 이유가 있다. 마젤란은 당시 포르투갈을 지배하던 마누엘 1세에게 인도로 가는 또 다른 항로를 개발할 터이니 지원을 해달라고 부탁했지만 마누엘 1세는 이를 거절했다. 할 수 없이 마젤란은 스페인으로 가서 스페인 왕실의 지원을 받아 항해를 떠난 것이다. 따라서 대탐험 기념당시 포르투갈에서는 마젤란을 조국을 배신한 '배신자' 취급을 하고 그의 업적을 언급하지 않았던 것이다.
     
포르투갈은 마젤란 이전에도 이처럼 중요한 '대발견' 아니 '대침략'을 할 수 있는 기회를 스스로 놓치고 말았다. 그것은 아메리카대륙의 '발견' 아니 (이미 수많은 원주민이 살고 있었는데 무슨 발견?) 아메리카 대륙 '침략'이다. 콜럼버스는 원래 이탈리아의 제노바 출신이지만 항해중 남포르투갈 해안에 좌초해 포르투갈에 오게 됐고 여기에서 결혼도 했다. 그는 포르투갈 왕실에게 아메리카대륙 탐험을 지원해달라고 요청했다. 그러나 포르투갈 왕실은 이를 거절했다. 당시 콜럼버스는 인도까지 가는 거리가 실제보다 훨씬 짧은 3860킬로미터라고 상정하며 만든 항해계획을 제출했는데, 이미 상당한 항해 지식을 갖고 있던 포르투갈 왕실은 이를 검토해본 뒤 말이 되지 않는다고 생각해 지원을 거부했다. 

그러자 콜럼버스는 스페인으로 달려가 이사벨라 여왕에게 지원을 요청했다. 이사벨라 여왕은 전문가들에게 탐험 계획을 평가하라고 지시했다. 전문가들은 포르투갈과 마찬가지로 콜럼버스의 계획이 말도 되지 않는다고 결론을 내렸다. 이사벨라는 이 같은 결론에도 불구하고 '무식하면 용감하다'고 해양 탐사에 대한 잘 몰라서인지 이를 지원하기로 결정한다. 그리고 그 결과는 대박이었다. 만약 포르투갈의 왕실이 스페인 왕실처럼 항해에 대한 지식이 부족해 콜럼버스의 항해를 지원했다면 이베리아반도의 힘의 관계와 세계사는 전혀 달라졌을 것이다. 때로는 "아는 것이 힘"이 아니라 "아는 것이 병"이다. 
   
수도원에서 길을 건너 바닷가로 다시 나가면 거대한 탑이 나타난다. 15~16세기의 포르투갈의 대탐험을 기념한 대탐험 기념탑이다. 1960년에 만든 이 기념탑은 높이 50미터의 거대한 탑으로 바스코 다 마스 등이 탐험을 나갔던 배를 형상화했다. 배에는 항해사, 선교사, 선원 등의 조각을 만들어 놨으며 바다 쪽 제일 끝에는 항해왕 헨리가 먼 바다를 바라보고 있다. 기념탑에는 승강기를 타고 탑의 꼭대기로 올라가기 위한 관광객들이 긴 줄을 서 있다. 그리고 그 앞에는 바닥에 대리석에 풍배도(wind rose, 바람의 풍향별 빈도를 표시한 그림)와 지구 지도를 그려 놓았다. 이 지도에는 각 지역에 도착한 포르투갈 배와 연도를 표기해 놓았다. 
    
이 기념탑과 지도를 바로 보고 있자 문득 비극적인 임진왜란이 생각났다. 우리는 포르투갈과 우리가 역사적으로 별 연관이 없는 것처럼 생각한다. 그러나 전혀 그렇지 않다. 포르투갈의 역사, 특히 대탐험의 역사와 우리의 역사, 특히 비극적인 역사는 밀접한 관련이 있다. 서양국가 중 우리와 가까운 일본에 제일 먼저 도착한 것은 바로 포르투갈이었다. 1543년 중국과 교역을 하기 위해 극동을 항해하던 포르투갈의 흑선이 우연히 일본에 도착했다. 대탐험 기념탑 앞바닥에 그려진 지도에도 일본 아래 바다에 포르투갈 배가 그려져 있고 1543년이라고 쓰여 있다.  
 

▲ 1543년 서양으로는 처음으로 일본에 도착한 포르투갈의 상선을 기념한 지도. 포르투갈로부터 일본은 서양의 총 제조술을 배워 임진왜란을 일으켰다. ⓒ 손호철


1543년 일본과 접촉한 이후 포르투갈은 일본과 교역을 활발하게 진행했다. 주로 식민지였던 인도의 고아, 그리고 조차지였던 마카오를 통해 일본과 교역을 했고 급기야 일본 남쪽에 위치한 규슈의 한 작은 어촌을 조차지로 받아 개발하게 된다. 그곳이 바로 나가사키짬뽕으로 유명한 나가사키로 지금도 나가사키에 가면 포르투갈에 이어 조차지를 획득했던 네덜란드 조차지의 모습을 재현해놓아 돌아볼 수 있다. 그리고 일본은 포르투갈을 통해 서양의 근대적인 장총을 도입하고 이의 제조기술을 배워서 조총을 개발했다. 일본은 이를 주 무기로 해서 임진왜란을 일으키게 된다. 즉 임진왜란의 비극은 포르투갈의 일본 '발견', 그리고 장총 제조기술 전수와 밀접한 관련이 있는 것이다.  
 

▲ 나가사키에는 포르투갈에 이어 조차지를 얻었던 네델란드 조차지를 재현해 놓았다. 네델란드의 흑선 모형으로 포르투갈 흑선과 유사한 모양이다. ⓒ 손호철

  
그 뿐이 아니다. 이번 여행을 하면서 놀라운 사실을 발견했다. 그것은 16세기 말~17세기 초에 수만 명의 조선인이 포르투갈에 노예로 팔려갔다는 사실이다. 포르투갈은 인구가 적은 나라였기 때문에 대탐험을 하면서 일찍이 아프리카에서 노예들을 잡아 노예무역에 적극 나섰는데, 아시아에서도 마찬가지였다. 특히 일본인들을 많이 노예로 사가지고 가서 도요도미 히데요시가 이를 강력하게 비난했는데, 자신은 임진왜란에서 잡아온 수만 명의 조선인들을 포르투갈에 노예로 팔아넘겼다고 한다(당시 인구의 100분의 1인 10만 명이 일본에 잡혀간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심지어 포르투갈 노예무역선이 직접 조선에 와서 조선인들을 잡아갔다. 일본이 하삼도(경상, 충청, 호남)지역을 장악하고 있을 때 직접 포르투갈 선박이 조선에 와 왜군이 잡아온 조선인들을 사갔다는 기록이 남아있고 전쟁이 끝난 뒤 조선 비번사가 심문한 포로 중에는 포르투갈 상인과 남만계 흑인도 있었다.  
    
당시 넘쳐나는 조선 노예들로 노예들의 국제 시세가 폭락했다니 그 수를 알만하다. 조선인 여자와 아이들은 조총 1정의 50분의 1 가격에 거래됐다고 한다. 즉 조총 1자루로 조선노예 50명을 살 수 있었다. 조선인 노예로 이탈리아 상인이 이탈리아로 데려가 방면한 뒤 로마성당에서 일하다가 루벤스의 눈에 뜨여 '한복입은 남자'(지금은 미국 로스엔젤레스 게티스 미술관이 소유하고 있다)의 모델인 된 안토니오를 판 사람도 포르투갈 노예상이었다. 프란시스코 카를레티라는 이 상인은 안토니오와 다른 네 명의 조선 노예들을 나가사키의 포르투갈 조차지에서 12스쿠도(포르투갈 옛 화폐단위)에 구입했다고 회고록에서 밝히고 있다.

이들 조선인 노예 중 일부는 긴 항해를 거쳐 포르투갈까지 실려 왔을 터인데, 이들 조선인들이 이후 어찌되었는지, 그들의 자손은 남아 있는지 누군가 연구해 볼 필요가 있다. 세계사란 정말 우리가 모르게 이렇게 여기저기 얽혀 있는 것이다. 거대한 대탐험 기념탑을 올려다보고 있자, 기념탑에 조각된 포르투갈의 탐험가들이 전수해준 유럽의 최첨단 무기에 의해 목숨을 잃은 수많은 조선 민초들의 얼굴들이 보이는 것 같았다. 대탐험 기념탑에 새겨진 항해 조각을 올려다보고 있자, 포르투갈의 노예선에 실려 이곳까지 실려 왔을 조선 민초들의 통곡소리가 들리는 것 같았다.  
    
요즈음 포르투갈이 인기여행지로 뜨고 있다는데, 이곳을 거쳐 가는 많은 우리 관광객 중 이 같은 역사적 사실을 아는 사람들이 얼마나 될까? 우리가 보고 감탄하는 리스본의 기념물 중 상당수는 우리의 조상들을 노예로 판 돈으로 지은 것일지도 모르지 않는가? 먼 리스본의 대탐험 기념탑 앞에 서서 임진왜란에서 희생당한 조선의 민초들을 위해 묵념을 드리고 있자, '대발견' 기념탑, 대탐험 기념탑은 브라질의 원주민 등 포르투갈의 식민지 주민에게는 침략과 '대학살 기념탑'에 다름 아닐 것이라는 생각을 버릴 수 없었다.   
      
참고로 포르투갈의 대탐험을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1412 항해왕 헨리 아프리카 해안 탐사 지시 
1488 아프리카 남단 희망봉 발견
1488 포르투갈 왕실 콜럼버스 탐험계획 거부 
1492 콜럼버스 스페인지원으로 아메리카 탐험
1497 바스코 다 마스 인도항로 개척 
1500 페드로 카브랄(Cabral) 브라질 '도착'
1510 인도 고아 식민지획득 
1519-1522 마젤란 스페인지원으로 세계일주
1543 일본 도착 
1557 마카오 취득
1580~87 나가사키 조차지 취득 
1592~98 임진왜란
1822 브라질 독립 
1961 인도의 고아합병
1975 모잠비크, 앙골라 등 독립 
1975 동티모르 독립
1999 마카오 반납 
 

▲벨렘지구에 있는 예술관 뒤의 조각이 인상적이다. ⓒ 손호철

 

▲포르투갈 전쟁박물관. ⓒ 손호철

 

▲ 손님들이 자전거를 돌려 그 힘으로 과일을 갈아 주스를 만들어주는 친환경 노점. ⓒ 손호철

 

▲ 벨렘지구의 요트 항구. ⓒ 손호철

 

▲ 거울에 비친 벨렘지구. ⓒ 손호철

 

▲ 전동킥보드 타고 관광하는 신세대들. ⓒ 손호철

 

▲ 낮잠자는 거리의 화가. ⓒ 손호철

 

▲ 관광객들이 버린 쓰레기가 작품이 됐다. ⓒ 손호철

 

▲ 특이한 모바일 폰 선전물. ⓒ 손호철

 

▲ 햄버거 푸드트럭. ⓒ 손호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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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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