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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아들의 비유 (루가15:11- 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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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종업 [rlawhddjq] 쪽지 캡슐

2019-09-15 ㅣ No.132533

두 아들의 비유

 

(루가15:11- 32)

11 예수님께서 또 말씀하셨다. “어떤 사람에게 아들이 둘 있었다. 12 그런데 작은아들이, ‘아버지, 재산 가운데에서 저에게 돌아올 몫을 주십시오.’ 하고 아버지에게 말하였다. 그래서 아버지는 아들들에게 가산을 나누어 주었다. 13 며칠 뒤에 작은아들은 자기 것을 모두 챙겨서 먼 고장으로 떠났다. 그러고는 그곳에서 방종한 생활을 하며 자기 재산을 허비하였다. 14 모든 것을 탕진하였을 즈음 그 고장에 심한 기근이 들어, 그가 곤궁에 허덕이기 시작하였다. 15 그래서 그 고장 주민을 찾아가서 매달렸다. 그 주민은 그를 자기 소유의 들로 보내어 돼지를 치게 하였다. 16 그는 돼지들이 먹는 열매 꼬투리로라도 배를 채우기를 간절히 바랐지만, 아무도 주지 않았다. 17 그제야 제정신이 든 그는 이렇게 말하였다. ‘내 아버지의 그 많은 품팔이꾼들은 먹을 것이 남아도는데, 나는 여기에서 굶어 죽는구나. 18 일어나 아버지께 가서 이렇게 말씀드려야지. 아버지, 제가 하늘과 아버지께 죄를 지었습니다. 19 저는 아버지의 아들이라고 불릴 자격이 없습니다. 저를 아버지의 품팔이꾼 가운데 하나로 삼아 주십시오.’ 20 그리하여 그는 일어나 아버지에게로 갔다. 그가 아직도 멀리 떨어져 있을 때에 아버지가 그를 보고 가엾은 마음이 들었다. 그리고 달려가 아들의 목을 껴안고 입을 맞추었다. 21 아들이 아버지에게 말하였다. ‘아버지, 제가 하늘과 아버지께 죄를 지었습니다. 저는 아버지의 아들이라고 불릴 자격이 없습니다.’ 22 그러나 아버지는 종들에게 일렀다. ‘어서 가장 좋은 옷을 가져다 입히고 손에 반지를 끼우고 발에 신발을 신겨 주어라. 23 그리고 살진 송아지를 끌어다가 잡아라. 먹고 즐기자. 24 나의 이 아들은 죽었다가 다시 살아났고 내가 잃었다가 도로 찾았다.’ 그리하여 그들은 즐거운 잔치를 벌이기 시작하였다. 25 그때에 큰아들은 들에 나가 있었다. 그가 집에 가까이 이르러 노래하며 춤추는 소리를 들었다. 26 그래서 하인 하나를 불러 무슨 일이냐고 묻자, 27 하인이 그에게 말하였다. ‘아우님이 오셨습니다. 아우님이 몸성히 돌아오셨다고 하여 아버님이 살진 송아지를 잡으셨습니다.’ 28 큰아들은 화가 나서 들어가려고도 하지 않았다. 그래서 아버지가 나와 그를 타이르자, 29 그가 아버지에게 대답하였다. ‘보십시오, 저는 여러 해 동안 종처럼 아버지를 섬기며 아버지의 명을 한 번도 어기지 않았습니다. 이러한 저에게 아버지는 친구들과 즐기라고 염소 한 마리 주신 적이 없습니다. 30 그런데 창녀들과 어울려 아버지의 가산을 들어먹은 저 아들이 오니까, 살진 송아지를 잡아 주시는군요.’ 31 그러자 아버지가 그에게 일렀다. ‘얘야, 너는 늘 나와 함께 있고 내 것이 다 네 것이다. 32 너의 저 아우는 죽었다가 다시 살아났고 내가 잃었다가 되찾았다. 그러니 즐기고 기뻐해야 한다.’”

 

 오늘 본문은 우리가 흔히 탕자의 비유라고 부르는 아주 익숙한 예수님의 비유죠. 대부분의 독자들이 이 비유를 이해하기를 탕자가 아버지를 떠나서 허랑방탕하게 살다가 스스로 회개를 하고 돌아왔더니, 아버지가 문 밖에 서서 기다리다가 맞아주셨다. 그러니까 우리도 회개하고 돌아가면 아버지가 그렇게 사랑으로 맞아주실 것이다. 정도로 이해를 하고 있는 거 같아요. 그래서 이 비유의 주인공이 탕자가 된 거예요. 사실은 이 비유의 주인공은 탕자가 아닙니다. 그 해석 역시 아주 이기적인 인본주의적 요소가 많이 묻어 있는 그런 해석인 거예요.

 

''? 내가 돌아가면 아버지가 받아줄 거라는 거예요. 저는 개인적으로 이 비유의 주인공은 아버지라 생각합니다. 저는 이 비유를 아버지가 집을 떠난 두 아들을 어떠한 사랑과 인내와 기다림으로 받아주시는가에 초점을 맞추어서  역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로 풀어보도록 하겠습니다.

많은 신학자들이 이 비유안에 무슨 십자가와 예수가 들어있냐고 그냥 회개만 하면 모든 인간은 구원에 이룰 수 있다는 해석을 하곤 하는데요. 그건 이슬람교도들이 이 비유를 해석하는 것과 똑같은 해석이에요. 이슬람 교도들도 성경이 있습니다. 이슬람교도도 이 비유의 해석을 그렇게 해요. 그냥 회개하고 돌아오면 받아준다 그렇게 해석을 한단 말입니다.

 

우리는 이 비유에서 어떻게 십자가와 예수를 찾아낼 것인가? . 먼저 우리가 이 비유를 알레고리(추상.풍유)적으로 해석을 할 것인가? 아니면 스토리로 해석을 할 것인가? 에서부터 출발을 해야 돼요.

많은 분들이 이 비유를 해석을 하면서 한 부류는 전적인 알레고리로 해석을 해야 한다고 목소리를 높이고 있고,다른 한 무리는 스토리로 이야기로 해석을 해야한다라고 주장을 해요. 그리고 거기에 대한 근거로 이런저런 이유를 대고 있는데, 저는  알레고리적으로 해석을 하던 스토리적으로 해석을 하던 우리는 성경이 우리에게 전해주고자 하는 메시지만 정확히 받아챙기면 되는 것입니다. 개인적인 생각으로 이 비유 안에는 알레고리적 요소와 스토리적 요소가 공존하고 있다고 생각을 해요.

 

그렇다면 이제 이 비유를 올바로 해석하기 위해서 이 비유가 배경으로 삼고 있는 고대시대의 사회 문화적 배경에 대해서 조금 정보가 있어야 되겠죠. 당시 고대사회 특히 유대 사회에는 부모가 자식에게 유산을 물려줄 때 큰 아들이 항상 동생들의 두 배를 받았습니다. 그리고 동생들이 나머지를 갖고 유산을 분배를 했어요. 그러나 부모의 유산은 항상 부모가 돌아가셨을 때 자식들에게 분배가 되었고 혹 부모가 살아계셨을 때 유산 분배가 이루어졌다고 하더라도 부모가 돌아가시기 전까지는 그 재산의 소유권과 처분권과 관할권이 여전히 부모에게 있었어요. 그래서 이 아버지도 큰 아들에게 그러죠. 유산은 이미 분배했잖어요 작은 아들이 달라고 그랬을 때, 큰 아들에게도 분배했단 말입니다 '얘야 이게 다 니꺼 아니야 둘째는 다 가져갔으니까 다 니껀데 내가 잠시 갖고 있는거 아니야 그런데 왜 이렇게 화를내'라고 이야기 하지 않았습니까?

그렇게 아버지가 돌아가셔야 처분권을 행사할 수 있어요. 뿐만 아니라 부모와 자식간의 예의와 지켜야 할 규범이 지금보다 훨씬 엄격했습니다. 그래서 유대의 율법은 패역한 자식에 대한 부모와 사회에 처벌을 엄격히 규정을 해요. 율법입니다.

 

(신명기 2118- 21)로 가보세요. 18 “어떤 사람에게, 고집이 셀뿐더러 반항만 하며 아버지의 말이나 어머니의 말을 들으려 하지 않고, 부모가 꾸짖어도 듣지 않는 아들이 있을 경우, 19 그의 아버지와 어머니는 그를 붙잡고 그가 사는 성읍의 성문으로 원로들에게 데리고 가서, 20 그들에게 이 우리 아들은 고집이 셀뿐더러 반항만 하며 우리 말을 듣지 않는 데다가 방탕아이고 술꾼입니다.’ 하고 말해야 한다. 21 그러면 그 성읍의 남자들이 모두 그에게 돌을 던져 죽여야 한다. 그렇게 너희는 너희 가운데에서 악을 치워 버려야 한다. 온 이스라엘은 그것을 듣고 두려워할 것이다.”

이대로 했으면 우리 이 중에 살아있을 사람 하나도 없어요. 그죠? 그런데 이게 율법이라 말입니다. 하느님의 율법. 부모 말 안 들으면 다 죽여버리라는 거예요! 사실 이 율법은 하느님 아버지를 떠난 패역한 죄인들에 대한 형벌, 그 형벌이 에둘러 표현되어 있는 거예요. 하느님의 은혜를 떠난 그 패역한 자들은 모두 돌에 맞아 죽어도 싼 그런 죄인들이라는 것을 웅변하고 있는 것이죠. 아무튼 유대인들은 아버지에게 불순종하고 아버지의 마음을 아프게 한 자식들은 돌로 쳐서 죽여도 된다는 가부장적 사고 속에서 생활을 하고 있었어요. 그런 문화사회적 배경속에서 살고 있던 사람들에게 예수님이 둘째 아들의 이야기를 꺼내신 거예요.

이 비유의 聽者 중 한 무리인 유대인들은 아마 그 비유에 등장하는 둘째 아이의 이야기를 들으면서 분노를 이기지 못 했을 거예요. 그렇게 철저한 가부장적 사회속에서 아버지가 아직 시퍼렇게 살아계신대도 불구하고 감히 유산을 청구한 아들. 청구한 정도가 아니라 처분권까지 행사하기 위해서 아버지 몰래 재산을 처분하여 이방 나라로 도망을 간 아들이에요. 당시에는 아버지가 살아 계심에도 아버지에 유산에 처분권을 행사하려 했던 자들은 살인자와 같은 죄인으로 취급했습니다. 그건 곧 아버지가 빨리 죽었으면 하는 마음에서 밖에 나올 수 없는 그런 패역한 행위라는 거예요. '저놈은 아버지가 빨리 죽기를 원하는구나' 그래서 그러한 자식은 아버지를 죽인 자식 취급을 받아도 무방한 그런 시대였어요. 그러니까 당연히 이 자식은 돌에 맞아 죽어도 상관없어요.

 

율법의  계산대로 하면 큰 아들이 아버지 재산의 3분의 2를 갖고 둘째가 아버지 재산의 3분의 1를 갖는게 마땅하지만 둘째가 미리 그 재산의 처분권을 행사하기를 원했기 때문에 9분의 2정도를 미리 받았을 거예요. 그게 유대인들의 관습이었습니다. 그래도 그건 어마어마한 액수였을 거예요. 나중에 그 아버지가 그 아들의 손에 가락지를 끼우고 좋은 옷을 입히고 동네잔치를 벌이고 많은 종들을 부리고 있었고 아들 또한 우리 아버지 집에는 종들도 양식이 풍족하다라고 이야기하는 것으로 보면 아버지는 대단한 부자였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가 그 재산을 허랑방탕 전부 써 버리고 유대인들이 가장 혐오하는 짐승인 돼지 우리속에 동거인이 된 거예요. 심지어 그는 유대인들이 탈무드에 돼지를 치는 자는 저주를 받을 지어다라고 까지 기록을 해 놓았을 만큼 혐오했던 돼지치기가가 되어 있었단 말입니다. 가장 낮은 자리에 떨어졌단 뜻이에요. 완전히 파산했단 그런 뜻입니다.

그 말은 곧 그들이 개 취급도 안했던 이방인들의 종이 되어 그것도 돼지치기가 되어 있는 완전히 파멸의 상태에 떨어졌다 라는 것을 그림으로 보여주는 거예요.. 왜냐하면 유대인들은 절대 돼지를 키우지 않았어요. 그러니까 이방인들의 종이 되어 있는 거예요. 이 비유를 듣는 유대인들에게 있어서 그러한 내용은 둘째 아들을 개보다 못한 자로 여기게 만들었을 거예요.

 

당시 유대 인근 나라에는 유대인들이 400만명이나 디아스포라로 퍼져 있었어요. 그때 당시에도 그들은 아주 지독한 민족주의자들이였기 때문에 자기들이 거주하던 이방 나라에서 자기 동족인 유대인들이 어려움을 당하게 되면은 너나 할 것 없이 힘을 모아서 자기 동족들을 도와 주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 둘째 아들은 어찌된 것이 그런 도움도 못받고 이방인의 돼지치기가 된 거예요. 그 말은 이 둘째 아들이 유대인들이 목숨처럼 지키던 선민사상 안에서의 그 신앙생활도 제대로 하지 못했다는 증거이기도 하는 거에요. 그러니까 이 둘째 아들의 비유의 이야기를 들으면서 사람들은 더욱더 큰 분노에 사로잡히게 되었겠죠. 예수님은 지금 비유를 사용하여, 다윗의 죄를 지적했던 나단의 심정으로 이 비유를 바리새인들과 율법학자들과 제자들에게 말씀하고 계신 거예요.

우리들은 이 둘째 아들의 이야기를 들으면서 누가 제일 먼저 생각나세요? 자기 자신이 먼저 생각 나야 됩니다. "이게 바로 너다"를 이야기해주는 거예요. 이 이야기를 듣는 聽者"니들이 바로 이 둘째아들이다"를 이야기해주는 것입니다.

 

종들도 풍요속에서 호강을 할 만큼 엄청난 풍요의 주인이시요 사랑의 아버지시요 은혜와 인내의 아버지이신 하느님의 은혜를 떠나서 자기 안에 내재된 제한된 자원으로... 자신을 행복하게 안전하게 만들어 보겠다고 하느님을 떠난 아담 그 속에 들어있는 노아, 모세, 이스라엘, , 우리 교회 내가 떠올라야 되는 거예요. 그 하느님의 패역한 아들,... 예수 이외에 이 세상에 태어난 모든  모든 인간들 그들이 바로 이 상태라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둘째 아들은 구원받기 이전에 우리 자신의 모습이고 구원 얻은 이후에도 여전히 우리 안에 풍성히 남아 있는 우리의 옛사람의 모습인 거예요. 따라서 그 돌에 맞아 죽어도 싼 그 둘째는 예전에 우리였을 뿐만 아니라, 오늘날에 우리의 모습이기도 한 것입니다.

 생각해 보세요. 우리는 구원을 얻었다고 하면서도 하늘에서 풍성하게 완전하게 주어질 그 하늘 아버지의 그 풍요를 진득하니 기다리는 법이 없잖아요. 이 세상에서 그 하늘의 풍요를 미리 사용할 수 있는 처분권을 달라고 떼쓰고 있지 않습니까? 하느님이 분명 유산으로 하늘의 풍요를 약속하셨는데 그런데 지금 이 세상에서 미리 땡겨서 쓰게 해달라고 하고 있잖아요. 둘째 아들과 뭐가 달라요? 똑같잖아요.

그러니까 우리가 지금 그 아버지, 하느님 아버지를 죽이고 있는 꼴입니다. 바로 이 시대의 교회가 하느님 아버지를 살해하고 있는 거예요. 당신 빨리 죽고 당신이 갖고 있는 힘이나 나한테 달라는 거 아닙니까? 우리가 하느님을 살해하고 있으면서 이 둘째 아들을 그동안 우리가 얼마나 욕을 해왔습니까? 내 이야기인걸... 그 둘째가 아버지께 어떻게 돌아옵니까?


본문 17절을 한번 보세요 17 그제야 제정신이 든 그는 이렇게 말하였다. ‘내 아버지의 그 많은 품팔이꾼들은 먹을 것이 남아도는데, 나는 여기에서 굶어 죽는구나.

우리들이 여기서 주의하여 읽어야 하는 제정신이 든 어구에요. 마치 회개의 주도권이 둘째 아들에게 있는 것처럼 보이잖아요? 제정신이 들었으닜까 그래서 많은 신학자들이 예수님의 십자가 없이도 얼마든지 구원에 이를 수 있다고 주장을 하는 거예요. 심지어 그들은 예수님의 십자가 구원은 바오로에 의해서 조작된 엉터리 복음이다라고 까지 이야기를 해요. 과연 그럴까요?

여기에서 제정신이 들다 라고 번역이 된 에이스 헤야오톤 데 엘돈 이 어구를 직역을 하면 자기 자신에게로 왔다, 자기 자신을 되돌아보았다,.... 자기 자신을 거울로 비추어 보았다. 자기 자신이 어떤 존잰지를 비로소 알게 되었다라는 뜻이에요. 제정신이 든 이 어구가... 돼지우리에서 돼지들과 쥐엄열매 쟁탈전을 벌이고 있던 그 둘째 아들이 어느 순간 자신의 모습을 거울로 비추어 보고 자신이 돼지와 같은 삶을 살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라는 그런 뜻이에요.

우리가 이 이야기에서 이 둘째 아들이 파산을 해서 돼지우리로 갔다라고 이렇게 너무 기계적으로만 생각하지 마세요. 아버지의 은혜를 떠나서 자기 안에 내재된 자원을 갖고 행복하겠다고... 떠난 이들은 전부 돼지새끼들 이라는 것을 보여주는 거예요. 그가 자기가 갖고 있는 재산을 다 써버려서 돼지우리로 들어간 게 아니라 바로 그 상태가 돼지라는걸 우리에게 보여주는 거예요. 그러니까 우리가 성도로서 "나는 지금 돼지우리 속에서 돼지의 삶을 살고 있구나!" 를 여전히 모른다면 우리들은 아직도 회개하기 전의 둘째 아들인 거예요.

자 그렇게 되기까지 누가 그에게 개입을 해야 되죠? 하느님 아버지의 그 아들이, 자녀들이 자신의 죄된 모습을 발견하게 되는 유일한 근거가 뭐예요누가 와서 죄에 대하여 의에 대하여 심판에 대하여 가르칩니까? 누가 와서? 성령이 오셔서!! 성령이 오시면, 보혜사가 오시면 죄에 대하여 의에 대하여 심판에 대하여 가르친다 그랬잖아요. 그러니까 우리가 스스로... 나는 돼지구나 이 세상은 돼지우리구나 그리고 내가 추구하는 세상에 힘은 돼지들이 추구하는 쥐엄열매구나를 깨달아 알게 되는건 누구 때문이에요? 나를 찾아오신 성령 하느님 아버지의 은혜로 내가 그걸 깨닫게 되는 거예요. 그러니까 이가 스스로 돌이켜 자기 자신이 돼지우리 속에서 돼지와 쥐엄열매를 다투는 그런 돼지같은 삶을 살고 있다라는 것을 깨닫게 된 거는 아버지의 마음이 그에게 간 것입니다.

그래도 조금 억지 갖죠 절대 그렇지 않아요  오늘 본문은 루가복음 15장 전체의 결론 부분이에요 루가복음 15장은 하나의 주제로 한가지 이야기를 하고 있는 루가복음의 핵심장이에요 그래서 이 비유를 담고 있는 루가복음 15장은 복음에 핵심 내용을 풍성하게 우리에게 제시하고 있는 장이에요 그러니까 루가 복음 15장을 알면 올바로 이해하면 루가복음 전체를 다 올바로 이해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한 루가복음 15장에 예수와 십자가가 빠져 있다면 말이 안 될 거 아니에요

 

이 루가복음 15장이 어떻게 시작하는지 한번 가보자구요 1 세리들과 죄인들이 모두 예수님의 말씀을 들으려고 가까이 모여들고 있었다. 2 그러자 바리사이들과 율법 학자들이, “저 사람은 죄인들을 받아들이고 또 그들과 함께 음식을 먹는군.” 하고 투덜거렸다. 3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이 비유를 말씀하셨다.

지금 루가는 예수님에 사마리아 여행 네러티브의 거의 정 중앙에다가 이 비유를 배치를 하고 있어요 그러니까 지금 1절에 등장하는 세리와 죄인들은 심지어 유대인들도 아닌 유대인들에 가치관 속에서 개만도 못하게 여겨졌던 사마리아 사람들 ..그것도 하층민들이었던 거예요 그런데 예수님께서 그들을 반기시더니 그들과 함께 식사를 하시는 것입니다. 그때 예수님의 사마리아 여행에 동행을 했던 바리새인들과 율법학자들이 예수님을 원망하는 장면이에요 루가복음 15장은, 그런데 바리새인들과 율법학자들의 원망의 내용이 담긴 2절에 쓰인 동사들이 전부 현재시제에요 그건 그렇게 죄인들을 영접하고 그들과 식사를 하신 예수님의 행동이 습관적이며 반복적이었다는 의미에요

그러니까 여기에서의 율법학자들과 바리새인들은 예수님에 사마리아 여행에 동행을 했을 만큼 예수님께 호감을 갖고 있었고  예수님이 아니었다면 그들은 절대 그 개들의 땅인 사마리아 땅에 안 간다 말입니다 그런데 바리새인들과 율법학자들이 예수님을 쫓아 사마리아 여행길에 올랐다니깐요 예수님께 호감을 갖고 있었고, 쫓았던 사람들이에요 이 사람들은요 그리고 배움에 갈급했던 종교적 열심이 아주 대단했던 훌륭한 사람들이었어요 유대교의 관점에서 봤을 때

예수님께서 그들의 불평과 원망을 들으시고는 비유를 말씀하시는데 세 가지 비유를 연달아 붙여서 던지세요 저는 이 루가복음 15장의 비유를 네 가지 비유로 봐요 겉으로 난 비유의 이야기가 이렇게 세 가지로 나누어져 있는 듯 보이니까 제가 일단 세 가지라고 말씀을 드리겠습니다.

 제가 지금 말씀드리고 싶은건 3절에 그 비유라는 단어의 수에 관한 거예요   여기서 이 비유라는 단어가 단수일까요 복수일까요 세 가지 이상인데 복수면 제가 안 물어보겠죠 단수에요 그러니까 지금 이 루가복음 15장에 이 세 가지 비유는 하나에 비유라는 뜻이에요 따로따로 떨어져 있는 비유가 아니에요 잃어버린 양의 비유, 드라크마의 비유, 탕자의 비유.. 이렇게 나누어져 있는게 아니라 한 가지 비유라는 거예요 그래서 단수에요 이 비유라고... 루가가 단수로 썼단 말이에요

 

잃어버린 양의 비유는 백 마리의 양중에서 한 마리를 잃어버린 목자가 나머지 99마리를 버려두고 한 마리를 찾으러 갔다가 와서 찾고는 잔치를 베푼단 이야기에요 그리고 두번째 비유는 열 드라크마를 갖고 있는 아낙네가 이 열 드라크마는 유대인들 신부가 신랑에게 혼수품으로 받는 거예요 그래서 그렇게 꿔가지고 목에다 걸고 다니던지, 아니면 아주 소중하게 이불 밑에다 보관해 놓던지 이랬던 거예요 그거 잃어버리면 남편으로부터 이혼당할 수도 있어요 사랑을 잃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니까 소중한 거예요 드라크마는 사실 크 돈은 아닌데 하나가 빠져 버리면 열 드라크마라는 혼수품 자체가 의미가 없어지니까 죽도록 찾는 거예요 그렇게 하나를 잃어 버렸던 아낙네가 한 드라크마를 잃어버리고는 등불을 켜고 집을 쓸면서 그 드라크마를 찾아가지고는 아주 기뻐한다라는 그런 내용이에요

 

첫 번째 비유에서는 양이 백 마리에요 그중에 하나를 잃었다가 찾았습니다. 두 번째 비유에서는 드라크마가 열 개에요 그중에 하나를 잃었다가 찾습니다. 세 번째 비유에서는 두 아들 중 하나를 잃었다가 다시 찾는 거예요 이걸 점층적 기법이라 그러죠 예수님은 지금 점층적인 수사기법을 동원해서 양 100마리 중 하나를 잃었다가 다시 찾아도, 신부에게 귀중한 혼수품인 10 드라크마 중 하나를 잃었다가 다시 찾아도 그렇게 기쁜데...두 아들 중 하나를 잃었다가 다시 찾았을 때 그 아비의 기쁨이 얼마나 크겠는가를 점층적으로 설명하고 계시는 거예요 짐승. . 사람. 100, 10, 2, 이렇게 점층적이며 점강적인 개념과 숫자들을 동원하여....인간에 구원을 향한 하느님 아버지의 깊은 관심과 애정을 설명하고 계시는 거예요 그렇게 이 세 비유는 한 가지를 이야기하고 있는 건데요 예수님이 뜬금없이 7절과 10절에서 이 이야기를 회개와 연결 시키세요.

7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이와 같이 하늘에서는, 회개할 필요가 없는 의인 아흔아홉보다 회개하는 죄인 한 사람 때문에 더 기뻐할 것이다.” 10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이와 같이 회개하는 죄인 한 사람 때문에 하느님의 천사들이 기뻐한다.”

잃어버렸던 양 한 마리 찾았어요 드라크마 한 드라크마 잃어버렸던 거 다시 찾았어요 주인이 찾은 거죠 드라크마가 나 좀 찾아주세요 그럴 일 없잖아요 양이 주인님 나 여기 있어요 이랬을 일 없잖아요 주인이 찾아다녔고 아낙네가 찾아다녔어요 주인이 찾아서 데리고 왔는데 그걸 예수님이 회개라고 이야기 한단 말입니다 그러니까 이게 지금 한 비유에요. 회개란 무엇이다...내가 죄지은 거 몇 개 내어놓고 내 탓이요 내 탓이요 하느님 내가 이런 잘못 했어요 저런 잘못했어요 이게 회개에요? 그건 반성이에요 회개의 주도권은 우리에게 없습니다. 회개의 주도권은 찿는 이에게 있는 거예요 그걸 말하고 싶은 거예요 미리 그래서 드라크마에 비유 잃어버렸던 양의 비유에서 이 회개의 개념을 일단 명확히 해 놓고 들어가시는 거예요

 

그리고 이어지는 게 오늘 우리가 공부하는 비유인 것입니다 그리고 거기에 똑같이 회개하는 어떤 자가 등장한단 말이에요 그러니까 우리가 위의 두 비유에서 회개란 이런 것이다 이미 알았으니까.... 이 탕자에 회개 또한 아버지에 마음이 그에게 가서... 그를 찾고자 하는 아버지의 마음이 그를 돌렸구나라는 것을 우리에게 알게 하는 거예요 그래서 한 비유에요 조금 전에 살펴봤던 제정신이 들어’‘ 에이스 헤아오톤 데 엘톤 이라는 이 어구는요 히브리어와 아람어에서 회개를 표현하는 방식으로 쓰였던 어구에요 그러니까 돼지우리 속에서 돼지된 자신에 모습을 올바로 인식하고 자각하게 된 둘째 아들에게.... 어떤 일이 일어나는 거예요 찾아짐에 사건이 일어난 거예요. 둘째 아들이 한거라곤 자기에게 주어진 제한된 아버지의 재산을 가지고, 자기 자신의 행복과 쾌락을 위해서 돼지처럼 산거밖에는 없어요 그런데 어느 날 아버지에 마음이 그에게 임해서 그 자신이 자신에 돼지됨을 바라보게 하였던 거예요. 그래서 성경은 문맥을 잘 고려해서 읽어야 되는 거예요 

그러니까 회개는 하느님의 은혜로 하느님을 떠나 스스로에 행복과 만족을 추구하며 사는 삶이 돼지우리 속에 돼지같은 삶이며 자신들이 추구하는 모든 세상에 힘들은 다 돼지가 먹는 쥐엄열매라는 것을 올바로 자각하게 되는 걸 말하는 거예요 그저 사는 동안 지었던 몇 가지 죄를 내놓고 눈물 콧물 짜는게 회개가 아니란 말입니다 그런 면에서 여러분은 진짜 회개하신 분들 맞아요   

우리가 사는 이 세상이 돼지우리같이 여겨지십니까? 하느님이 없는 이 세상은 돼지우리에 불과해 ...내가 추구하는 모든 것은 그냥 돼지가 먹는 쥐엄 열매에 불과해.. 이리로 돌아서셨어요? 그게 회개에요 메타노이아

 

예수님은 유대인들이 개 취급도 안했던 사마리아 땅에서 자신을 찾아온 세리와 창녀들과 죄인들을 둘째아들 속에 넣어서 바리새인들과 율법학자들에게 제시하고 있는 거예요 너희들이 지금 너희들에 율법관과 너희들의 관습에 의해서... 그 둘째 아들에 행위에 그를 죽이고 싶을 만큼 분노하고 있다라는 것을 내가 잘 안다 그들은 그렇게 돌에 맞아 죽어도 싼 자들이다 그러나 아버지의 은혜와 사랑은 그러한 자들의 더러움까지도 모두 덮어 씨울 만큼 위대한 것이다 라는 것을 가르쳐주고 계시는 거예요

그러니까 예수님은 단순히 회개하면 하느님께서 다 용서해 주신다라는 교훈을 던지시는게 아니라 예수님은 하느님 아버지를 계시하러 오신 당신에 가장 중요한 임무를 훌륭하게 수행해 내고 계시는 거예요 예수님은 당신 곁에 모인 사마리아의 세리들과 사마리아의 창녀들 사마리아의 죄인들 그리고 유대의 바리새인들과 율법학자들 그리고 당신에 제자들에게 하느님 아버지가 어떤 분이신가를 지금 차근차근 계시하고 계시는 거예요 그래서 제가 이 비유를 아버지에 비유라고 말씀을 드리는 것입니다

 

그러면 이 비유속에서는 십자가가 어떻게 숨어 있는지 한번 보자 말이에요 아들이 외부에서 침투한 은혜의 결과로 자신에 돼지된 모습을 자각을 하자 아버지 생각이 났어요 돼지우리 같은 세상에서 눈을 들어 아버지를 본 거예요

이 세상이 돼지우리고, 자기가 돼지이며, 자기가 추구했던 게... 돼지가 먹는 쥐엄열매라는 것을 자각하게 되자 아버지가 보이더래는 거예요.... 그때에 그때에 아버지 생각을 하는 거예요  욥이 자기가 마음을 두고 있던 돈 재산 자식 이웃 와이프 친구 다 떨어져 나가자... 그때 내가 귀로만 듣던 하느님을 이제 눈을 봅니다 라고 말했던 거 기억나시죠? 곱이 전부 잃어버리고... 아버지하고 형 속이고 사기쳤다가 전부 잃어버리고 완전히 개털 돼서 외삼촌 집으로 쫓겨갈 때 그때 하느님이 보였던 거 기억나십니까 그 이야기하는 거예요

우리는 이 세상에서 그렇게 완전히 털려야 되는 것입니다 성도는 비워지는 거에요 그래야 아버지가 보이는 것입니다  그렇게 인간은 자신의 티끌됨과 질그릇됨을 올바로 자각하기 전에는요... 절대로 하느님 아버지께로 자신을 의탁할 수가 없어요 그래서 우리 성도들도 구원을 얻은 이후에도 계속해서 자신에 무력함과 불가능함을 폭로당하게 되는 거예요  우리들이 완전히 무력한 티끌이다라는 것을, 돼지라는 것을 예수를 믿은 다음에도 계속 폭로당한다니깐요 나는 괜찮은 사람이야 점점 발전하고 있어 이게 아니라 나는 왜 갈수록 이 모양이야 이렇게 되는 거예요 나 자신에게는 다른 사람에게는 어떻게 비출지 몰라도 둘째는 도저히 자신이 아버지의 아들로 복귀할 수 없다는걸 인정하고 수긍해요 그게 바로 우리 성도들에게도 동일하게 요구되는 고백인 거예요

 

유대의 율법에 의하면 둘째는 동네에 들어서는 순간 돌에 맞아 죽을 거예요 본인도 그것을 누구보다 잘 알아요 그런데 그는 그것을 인정하고 감수하기로 해요 그래도 난 아버지한테 갈 거야 맞아 죽어도 갈 거야 마치 우리 성도가 신앙생활을 통하여 자신의 돼지됨을 깨닫고 아버지가 지금 당장이라도 날 지옥에 보내신다 할지라도 난 아무 할 말 없는 그런 죄인이라는 그런 자기 부인에 고백을 해야 하는 것을 미리 그림으로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는 아버지 집에 종이라도 되겠다는 심정으로 아버지를 찾아가죠 고라 자손이 쓴 시편에 이 내용이 아주 잘 기록이 되어 있어요

시편 8410- 11절 보세요  10 하느님, 저희의 방패를 보소서. 당신의 기름부음받은이의 얼굴을 굽어보소서. 11 정녕 당신 앞뜰에서 지내는 하루가 다른 천 날보다 더 좋습니다. 저의 하느님 집 문간에 서 있기가 악인의 천막 안에 살기보다 더 좋습니다.

이건 단지 오늘 비유에 나오는 둘째 아들과 고라 자손에 고백이 아니라 하느님의 은혜를 입은 모든 자들의 입에서 궁극적으로 나와야 하는 고백이어야 되는 거예요 나는 이정도면 됬으니까 우리 아버지가 기뻐하는 아들이 된 거야 천만의 말씀 고놈은 지옥 갑니다 반드시 100% 제가 개런티 해드릴게요 절대로 성도는 그 자리로 갈 수가 없어요

 

우리는 우리 자신의 실체와 본전을 알면 알수록 그리고 하느님에 크심과 위대하심을 알면 알수록 점점 우리 자신에 대해서 자신이 없어져야 돼요 그리고 하느님에 힘이 능력이 은혜가 더욱더 크게 오롯이 드러나야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결국에는 하느님 전 하느님의 집에 문지기도 과분합니다. 아니 저는 지금 당장 하느님께서 저를 지옥에 보내신다고 해도 아무 할 말 없는 그런 무익한 잡니다 라는 그런 고백을 할 수 있는 자로 낮아져야 되는 거예요 그런데 너무들 자신 만만해요 난 잘하고 있다는 거예요 너무들 자신만만해요 자기들이 지금 뭔가 하느님 앞에 떳떳한 일을 하고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이에요 그들이 바로 바리새인들이었고 율법학자들이었습니다 그러니까 왜 저런 놈들하고 밥을 먹으세요라고 그들을 정죄한 거예요

 

차치하고 그렇게 아들이 자신에 실존을 처절하게 깨달은 뒤에 돌에 맞아 죽을 각오를 하고 아버지께 돌아가요 그런데 아버지가 문 밖에서 그 아들을 기다리고 계시다가 相距가 아직 먼데 굉장히 먼 거리란 뜻인데요 아직 먼데 뛰어나가 그 아들을 맞이해야, 당시 유대사회에서는 우리 조상들과 마찬가지로 어른이 경박스럽게 뛰는건 아주 천박한 일로 간주가 되었어요 그런데 아버지가 아들을 확인하자 마자 냅다 뛰신 거예요 왜 그랬을까요 단지 반가워서가 아닙니다 

그보다 먼저 둘째가 어비자가 사는 동네로 돌아갔다는 예수님의 말씀을 들은 바리새인들과 율사들이 어떤 장면을 기대하고 있었을까를  한번 묻고 싶어요 이 둘째가 나는 아버지 집에 종이 돼도 좋으니까 갈래... 그리고 동네에 딱 들어서자마자 어떤 일이 일어났을 거 같으세요?  동네 사람이 하나둘 모여들어서 그를 돌로 쳐야 맞습니다 유대인들이 지금 그걸 기대하고 있었단 말이에요 그런데 아버지가 뛰어나가서 그를 안아 버린 거예요 유대인들은 굉장히 열받았을 것입니다 여기서 그런 놈을 왜 감싸냐는 거죠 그 둘째가 저지른 일은 당시 사람들에게 있어서 열번 맞아 죽어도 싼 그런 일이었어요

 

 유대인들의 결혼 정년기는 열여덟에서 스물이었어요 그리고 빠르면 열넷에서 열다섯, 그러니까 이놈은 아무리 나이가 많아도 열일곱이에요 그런 어린노무새끼가 아버지 재산을, 목숨처럼 여겼던 아버지 재산을 다 가지고 나가서 창녀와 함께 다 써 버렸어요 동네사람들이 그걸 다 알았다 말입니다 그건 아버지 허락 안 맡아도 그냥 때려죽이면 되는 거예요 그런데 아버지가 뛰어가서 그 아들을 품어 안아 버린 거예요 아들이 다른 이들에게 맞아 죽기 전에 아버지가 나가서 지키신 것입니다  

엄밀히 말해서 아버지는 아들을 기다리다가 발견하신게 아니라 아들이 나간 그 순간부터 아들에 삶에서 한 번도 눈을 떼지 않았던 거예요 그게 바로 우리 하느님이에요 침삼킬동안도 우리를 놓치지 않으시고 매 순간 우리와 동행을 하시며 하느님을 떠나서 자기 마음대로 살고 있는 우리의 자기중심의 삶이 어떻게 돼지와 같은 삶에 불과한 것인가를 깨닫게 해 주시느라 아버지는 아들에 패역함을 허락해 버린 거예요

그래 나가라....그 아들이 아버지를 떠나서 패역하게 되는걸 아버지가 원치 않았다면 애초부터 돈을 안 줬을 거라 말입니다 그리고 그렇게 문밖에서 매일 기다릴거면 가서 찾아오지 왜 찾아오지 않고 문 밖에서만 기다리냐 말이에요 아버지가 보낸 거예요  뭘 배우고 오라고?.. 아버지의 은혜를 떠난 자들은 어떻게 살게 되는지 ...그 결국이 어떻게 살게 되는지...를 배우고 오라고 아버지가 보낸 거예요

 

하느님이 완성된 교회를 이 땅에 이 이방나라에 나그네로 왜 보내셨는지 아세요? 이 돼지우리같은 지옥에.... 아버지의 은혜를 떠나서.. 지 스스로 하느님처럼 살겠다고 하는 인간들이 내놓는 결과물이 어떤 건지 보고 배우라고 ...나중에 우리들이 하느님 나라 갈 때 그 아버지가 맨발로 뛰어나갈 거라 말입니다 우리의 인생은 바로 그게 목적인 거예요

근데 여기서 아버지 유산 다 뺏어갖고 왔으면서 아직 남아있는거 더달라고 발광들을 하고 앉아 있는 거예요 그거 더 달라고 당신은 죽든 말든 난 아무 상관 안 할 테니까 천국에 가서 당신 없어도 돼 그렇지 않아요?  천국가서 하느님 꼭 있어야 돼요 하느님 모르잖아요 ? 배워본적이 없는 거예요 이 시대의 교회는요 그냥 천국에는 하느님이 없어도 돼요 내가 원하는 것만 있으면 되는 거예요 하느님이 바로 그걸 우리에게 가르치시기 위해서 이 이방 나라에 돼지로 우리를 보내신 것입니다 그래서 우린 이렇게 돼지같은 삶을 살고 있는 거예요  

 

하느님은 우리에게 아버지의 은혜를 떠난 우리가 결국 어떤 지옥으로 파산을 하게 되는 것인지 이 지옥같은 현실을 경험하며 자각하고 ,,아버지께로 눈을 돌려서 하느님 아버지의 은혜만을 꼭 붙드는 자로 만들어 내시기 위해 우리를 이 이방세상에 놔두시는 거예요 우리가 다 겪고 가야 돼요  저절로 알아지지 않아요 다 겪어야 돼요 그래야 하느님에 은혜를 떠난 자들의 삶은 돼지구나를 내가 경험으로 알게 되는 거예요

 

그래서  성화는 백프로 니들이 하는 거라고 이야기하는 거예요 100%, 너희들이 성화의 자리로 올라가라는 이야기가 아니에요 니가 다 겪어 내야 된다라는 거예요 니 인생으로 , 그게 백프로 우리가 한다라는 뜻이에요 우리가 노력해서 도덕적 윤리적인 열매를 내놓으란 이야기가 아닙니다. 니가 다 겪고가야 된다라는 뜻이에요 하느님이 그걸 의도해 놓았으니까 이루어질 거야 그러나 니가 다 겪어야 돼... 삶으로 니가 돼지우리로 반드시 들어가봐야돼... 쥐엄열매 먹어봐야되 100%에요 그것이 야고보가 말한 행함 행함이 없는 믿음 그 행함이 바로 이 행함입니다.

우리 삶 속에서 하느님이 행하는 그 행함이 우리에 삶 속에서는 자기 부인으로 터져 나오게 되는 거예요 그게 행함이란 말입니다 그게 없는 믿음이 죽은 믿음이라는거지 착한일 안 하는 놈은 다 가짜란 말이 아니란 말이에요 이 비유의 마지막 절을 보면 하느님의 구원이 어떤 것인가가 아주 선명하게 기록이 되어 있어요

루가복음 1532절 보세요 32 너의 저 아우는 죽었다가 다시 살아났고 내가 잃었다가 되찾았다. 그러니 즐기고 기뻐해야 한다.’” 

 

그 앞에도 한번 똑같이 나오죠 이 구절이 아버지는 집을 나갔다 돌아온 둘째 아들이 죽었다가 살아난 자라고 말씀을 하세요 말씀드렸다시피 아버지의 뜻을 헤아리지 못하고 자기 마음대로 아버지를 떠나서 자신에 쾌락과 행복만을 위해 살았던 둘째는 율법에 의해서 맞아 죽어도 싼 자에요 맞아 죽어야 돼요 율법에 의해서... 하느님이 죽이라 그랬으니까 그런데 일방적으로 아버지가 얘는 죽었다 산자야 라고 선언을 해 버렸어요 죽이지마 죽었다가 살았어 다시 죽이지 마 일사 부재리의 원칙 한번 죽었어... 다시 죽이지 마 아버지가 이야기하는 거예요 그걸 구원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게 복음인 거예요  그놈이 언제 죽었다가 살아났어요 그냥 아버지가 그렇게 인정해 주는 거예요 우리는 모두 둘째아들처럼 죽어 마땅한 자들이에요 그런데 아버지가 너희는 이미 벌을 받아 죽었다라고 선언을 해버리신다는 말입니다 그리고는 아버지가 다시 살려 내신 거예요 어떻게 아버지가 지신 십자가 안에서.. 아버지가 온 동네 사람들에게 수모를 당함으로 말미암아 아들을 살려내 버리는 거예요 열심히 뛰어가서 아들을 덥석 안아요 아버지가 수모를 대신 당하시죠 뛰어간 아버지가 율법에 의해 죽어야 할 아들에게 화려한 옷과 신발과 반지를 끼워 버리세요  용서받지 못한 아들을 아버지가 먼저 용서해 버리는 거예요 그러나 그것은 율법에 위배되는 행위죠 그러면 아버지도 벌받아야 돼요 율법을 어겼잖아요 아버지가 지금 용서받지 못한자를 자기 마음대로 용서해 버렸어요 돌로 한 대도 안 때리고 그럼 아버지가 지금 율법을 어긴 거예요 이에는 이 눈에는 눈이 율법이잖아요 모세의 율법 아버지에 그 여겼단 말입니다 아버지가 스스로 율법을 파기해 버리시는 거예요 아들을 위해 그리고 그 자신이 동네사람들의 웃음거리가 되는 거예요 그게 바로 하느님의 십자가인 것입니다 아버지 스스로가 율법을 허무시고 아들을 율법으로부터 자유롭게 만들어 버리는 거예요

 

하느님의 공의는, 율법은 우리 죄인을 전부 죽여야 돼요 그게 하느님의 公議에요 율법이에요 그런데 아들이 하느님인 아들이 율법을 여겨 버리는 거예요 안 죽여요 그리고 그 율법을 어긴... 자기가 구원해낸 하느님 나라의 백성들을 위해 자기가 율법을 어겨버린 그 형벌을 자기가 받아요 사형언도를 받고 죽습니다 그게 복음입니다 그걸 구원이라고 하는 거예요 여기에 십자가가 없단 말입니까?

그래서 예수님도 우리에게 기도를 가르쳐 주시면서 리가 우리에게 죄지은 자를 사하여 준 것 같이 우리의 죄를 용서하여 주시고 라고 기도를 하신 거예요 이건 우리가 우리에게 죄지은 자를 용서하여 준것 같이가 먼저가 아니라 그랬어요 동시에 일어나는 이야기라 그랬죠 우리가 우리에게 죄지은 자를 용서해 주는게 율법을 어기는 겁니다 간음한 자는 돌로 때려 죽여야 되요 그게 율법 지키는 거예요 남에게 해를 입힌 자 율법이 정한 형벌 줘야 돼요 그게 율법 지키는 거예요 그런데 우리가 우리에게 죄지은 자를 용서해 주는게 뭐예요 율법 어기는 거예요 그런데 그 시대가 왔단 말입니다 우리가 우리에게 죄지은 자를 율법에 형벌로 형벌을 안줘도 되는 그런 시대가 왔어요. 어떻게? 예수에 십자가로 말미암아 율법을 파기해 버렸어요. 그래서 아버지가 율법을 파기해 버리고 아들을 살려 내버리는 거예요 그런데 아무도 시비를 못걸어 아버지가 벌을 받아 버렸어 자기가 죽었거든요

 

 이게 감격스럽지 않습니까? 이 복음이 눈물나도록 감격스럽지 않으세요? 예수님이 우리의 죄가 되어서 스스로 심판과 정죄를 받아 버리셨어요 그래서 우리는 돌아 맞아 죽어야 마땅한 죄가 이렇게 버젓이 우리 안에 여전히 있는데도 용서를 받아 버린 거예요 그렇게 우리가 우리에게 죄지은 자를 용서해 줄수 있는 십자가로 말미암아 율법에 채무가 도말된 하느님에 은혜의 현실 속에서 우리에게 떨어진 것이 바로 구원이라는 겁니다 

 이렇게  이 비유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하느님 아버지의 은혜를 그 내용으로 하고 있는 거지 우리 성도들의 자발적이고 기특한 회개의 이야기를 하고 있는게 아닙니다 그러면 구원의 주도권이 인간에게 있잖아요 그게 어떻게 가능한 일입니까

그런데 이 비유는 거기에서 끝나지 않아요  이 비유에 대미는 큰 아들이 장식을 하고 있어요  백 마리 양중에 하나, 열 드라크마 중에 하나, 두 아들중에 하나, 이제 하나 중에 하나로 이어지는 거에요 그 누구도 이렇게 설명한 적이 없는데 제눈에는 그렇게 들어왔어요 이 큰 아들에 대해서 우리가 곡해하고 있는 것이 큰 아들은 아버지로 부터 버림을 받은 나쁜 아들이라고 성급히 결론을 내리는 거예요 아닙니다. 큰 아들 역시요 우리 하느님 백성들에 패역한 현실을 보도하는 또다른 모형인 거예요

 

둘째 아들이 그런 용도로 사용된 것처럼 큰 아들이 일차적으로 가리키고 있는 이들은 물론 이 비유의 서두에 등장하는 바리새인들과 율법학자들이에요   이 비유 또한 알레고리의 범주를 완전히 벗어날 수 없다고 말씀드린 거예요 이 비유안에도 적당한 은유가 들어있어요 그런데 이 큰 아들은 둘째아들과는 사뭇 달라 보이죠 둘째가 자기 몫을 가지고 나가서 허랑방탕하게 사는 동안 첫째는 아버지의 밭에 나가서 열심히 일을 해요 그리고 아버지의 일에 순종했대요 지 말로. 아버지를 모시고 아버지를 지키며 살고 있는듯 보이죠

그런데 일을 하고 돌아오는 길에 보니까 자기집에서 잔치가 벌어지고 있었어요 그는 슬며시 집안에 종을 불러서 무슨 일인지를 물었습니다 그런데 아버지의 유산을 챙겨서 이방나라에 가서 창녀들과 함께 허랑방탕하게 살다가 돌아온 자기 동생을 환영하는 잔치가 벌어지고 있는 것이다라는 이야기를 전해 듣습니다  큰 아들이 화가 났어요 어떻게 자기처럼 성실한 사람에게도 한 번도 베풀어 주지 않은 잔치를 그 돌에 맞아 죽어도 싼 자에게 먼저 베풀어주냐는 거예요 큰 아들이 아버지께 노하죠

 

28-30절 볼까요 28 큰아들은 화가 나서 들어가려고도 하지 않았다. 그래서 아버지가 나와 그를 타이르자, 29 그가 아버지에게 대답하였다. ‘보십시오, 저는 여러 해 동안 종처럼 아버지를 섬기며 아버지의 명을 한 번도 어기지 않았습니다. 이러한 저에게 아버지는 친구들과 즐기라고 염소 한 마리 주신 적이 없습니다. 30 그런데 창녀들과 어울려 아버지의 가산을 들어먹은 저 아들이 오니까, 살진 송아지를 잡아 주시는군요

 큰 아들이 怒해서 집에 돌아오지 않자 아버지가 작은 아들을 맞이하실 때와 똑같이 또 문밖으로 나오세요 너무 불쌍하지 않아요 그게 우리 하느님의 사랑입니다 아버지가 또 문밖으로 나가요 그리고는 큰 아들에게 잔치자리로 들어오라고 권하세요 28절에 타이르다라고 번역이 된 파라 칼레오라는 단어는요 어디서 많이 들어본것 같죠 파라클레토스 보혜사 성령 같은 뿌리의 단어에요 왜 예수님이 여기서 일부러 그런 단어를 썼을까요?  초청하다 위로하다 이런 뜻인데 예수님은 여기에 파라칼레오라는 단어를 쓰심으로 해서 아버지가 큰 아들을 잔치자리로 초청하는 장면을 성령에 초청과 위로와 연결을 시키고 계시는 거예요 그래서 제가 결론도 나지 않은 이 비유의 이야기를 우리가 섯불리 추론하여 큰 아들은 그냥 그렇게 버려졌을 거야라고 추측하지 말자라는 거예요

 

루가복음 15장의 비유의 전체 내용은 잃었던게 돌아온거라 말입니다 큰 아들만 잃어버리지 않는다 말이에요 돌아오는 거예요 아버지가 어떤 분인지를 알려주는 거라니깐요 그러니까 돌아온 거여야 맞아요 이 비유가 결론을 우리에게 넘겨주고 있는데.... 우리는 이 전체 문맥을 통하여 아 아버지는 이런 분이니까 이러한 자들 또한 아버지가 반드시 완성해 내시겠구나 왜 내 안에 큰 아들이 있거든요 이 큰아들이 버려졌으면 난 죽어야 돼요 우리 다 죽어야 돼요 내 안에 큰 아들이 있으니까 그래서 이 루가복음 15장의 비유를 네 가지로로 나누어 버린 것입니다 큰 아들이 가장 중심되는 주요 인물이에요 여기에서 제일 악한 인간이거든요 이것이 위장된 성실을 내어 놓는 자기 의에 빠진 경건병이라는 것에 빠진 가짜 ...그게 우리 안에 있다 말입니다

 

우리 인간이 하느님에 은혜를 떠나서 자신에게 내재된 제한된 자원으로 이 세상에 힘을 쌓아서 스스로가 만들어 놓은 세상적 유토피아에 도달하려 할때 나타나게 되는 현상이 어떤 모양으로 나타나게 되는지 아세요? 그 첫번째가 둘째 아들처럼 처럼 완전한 파산에 상태로 떨어지는 거예요 이 세상 그 누구도 하느님 없이 이 세상것들로 참 만족과 참행복을 누리며 살 수 없어요

인간들은 늘 부족함에 시달리고 늘 공허와 심심함에 안절부절하죠 그게 돼지우리 속의 탕자인 거예요 모든 인간이 다 심심해해 ...아닌데요 나 심심할 겨를이 없는데요 일하느라고 여러분 일 왜 하는 줄 아세요 심심해서 하시는 겁니다 이 심심함이라는걸 국어사전에 개념으로 이해하시면 안돼요  공허해서 일하는 거예요 왜 사람들이 빨리 조기 은퇴하면 일찍 죽는 줄 아십니까 심심해서 죽는 거예요 공허함을 어떡게 견딜 수가 없어서 그게 되지 우리 속에 있는 탕자에요 그런데 그렇게 여전히 자신에 힘을 부인하지 못하고 스스로를 신뢰하며 자기 자신만을 위해서 사는 이들에게... 종교심이라는게 가입을 하게 되면 그게 위장된 성실이라는 것으로 드러나요 여전히 자기 자신이 삶에 중심이에요

 

아버지의 영광이 자신의 영광이 되고 아버지의 기쁨이 자신의 기쁨이 되는 그러한 하느님의 자녀의 삶이 아닌 자기 자신의 필요에 의해서 아버지의 말을 들어주는 척하는 위장된 성실 그들이 원하는건 이 세상 속에서 자기 자신에 가치를 향상시켜주는 절대자의 도움과 힘이 필요한 거예요 내가 종교행위를 열심히 해서라도 다른 사람들에게 인기있고 존경받는 사람이 돼야지 이게 위장된 성실이에요 큰 아들이에요 그것이 그래서 그들은 자기가 원하는 것을 얻어내기 위해서 성실하게 행위라는 것들을 내어 놔요 그자들이 자기들처럼 깨끗하게 살지 못하는 사람들처럼 마치 개취급하는 것처럼 보시죠 니들은 왜 우리처럼 못살아 그러면서 막 때리잖아요 큰 아들이라니깐요 그들은 하느님의 은혜가 아니면 자기들도 돼지에 불과한 존재라는 것을 인정안하는 거에요 

 그러니까 남들을 가리켜 마구 질타를 할 수 있는 것입니다 니들은 왜 우리처럼 깨끗이 못살아 왜 니네 성당은 재정이 투명하지 못해 왜 니네 교회는 이래 왜 니네 교회는 이렇게 바르지 못해 이게 다 뭡니까 나는 큰 아들이야 너 왜 둘째아들처럼 그렇게 살고 있어 그놈이 더 나쁜 놈이라니깐요 그토록 성실하게 아버지의 명을 쫓아서 열심히 살았던 큰 아들이 아버지의 기쁨을 자신의 기쁨으로 삼지 못 합니다 아버지는 기뻐 죽겠어요 잔치를 벌렸어요 그런데 큰 아들은 화가 났습니다 이게 아버지에 마음을 헤아리는 자녀의 삶입니까?

그렇게 무언가 보상을 바라고 성실하게 일하는 사람을 성경은 종이라 그래요 종. 29절에 섬겨라는 단어가 나오죠 내가 아버지 섬겼잖아요 할 때 섬겨 그 단어가 둘류오에요 둘류오 둘로스 그 단어와 뿌리가 같은 단어에요 종으로 섬겼어요 란 뜻이에요 스스로 그렇게 이야기하고 있어요 나는 종처럼 섬겼어요 왜 나에게 보상 안 해주세요 이야기 하는 거예요 종처럼 섬겼어요 왜 보상 안 해주세요 그러니까 큰 아들은 아버지 곁에서 열심히 아버지 말을 듣고 순종하고 있는듯 보였지만 거기에는 아들로서의 책임과 의무와 감사에서 유발이된 성실이 아닌 자기가 원하는 것을 얻어내기 위한 종으로서의 위장된 성실이 들어 있었던 거예요 그건 아버지의 마음을 알고 아버지의 뜻에 순종한 것이 아니라 아버지가 가진 어떤 것을 얻어내기 위해 이를 악물고 해낸 포장된 악이였던 거예요


매일미사 나오기 싫어 죽겠는데 혹시 하느님 삐질가봐 백일을 이를 악물고 나왔어 나중에 하느님이 더 미워졌어 그건 벼른다라고 하는 거예요 내가 너보다 힘이 없어서 이렇게 참고 있지만 내가 언젠가 너보다 힘을 더 갖게 되면 나 이렇게 귀찮게 하면 너 죽여버릴 거야 이거랑 똑같은 거예요 그게 악인 것입니다 그렇다면 아버지의 마음을 알아드리지 못하고 아버지 곁을 떠나서 자기 마음대로 허랑방탕하게 살았던 둘째와 아버지 곁에는 늘 있었지만 역시 아버지 마음을 헤아리지 못하고 아버지 기쁨에 참여하지 못하고 단지 아버지에 소유가 탐이나서 열심을 부린 첫째와 뭐가 달라요

큰 아들이 자기 동생을 환대하는 아버지께 화를 내면서 왜 저런 놈을 환대해 줍니까 라고 하면서 당신의 아들이라고 이야기를 해요 자기 동생이라고, 형제라고 이야기를 안합니다. 형제취급 안해요 내가 최고거든요 당신의 아들이라고 이야기를 해요 이런 나쁜 놈이 있어요 왜 그렇게 화가나요 나도 그렇게 하고 싶었는데 당신 유산 다 차지하고 싶어서 나는 참고 있었다는 거예요 나도 그렇게 하고 싶었다는 거예요 난 둘째가 부러웠다는 거예요 속으로, 그런데 나는 참았는데 왜 그렇게 다 저질르고 온 놈한테 잔치를 버려 주냐는 거예요 그런데 하느님은 마음을 보신다 그랬죠 오히려 둘째가 더 성숙합니다 둘째는 그걸 다 경험하고 와서 아버지 나는 아버지 집에 문지기 종이되도 괜찮아요 이러고 왔는데 이 큰아들은 여전히 난 당신의 아들인데 왜 나한테 보상 안 해줘요라고 종으로 살고 있다 말입니다 

루가복음 15 15 그래서 그 고장 주민을 찾아가서 매달렸다. 그 주민은 그를 자기 소유의 들로 보내어 돼지를 치게 하였다 

자녀는 알아야 돼요 아버지가 기뻐하면 그게 내 기쁨이 돼야 되는 거예요 둘째가 나가서 뭘 하고 왔던들 나랑 무슨 상관이에요 나도 똑같은 존잰대.... 그런데 누가 누구를 욕을 합니까  이 큰 아들은 마을 사람들 앞에서 아버지를 모욕했어요 아버지가 마을 사람들 다 초청해 놓고 잔치를 벌여 놓았는데 문밖에서 안들어 와버렸습니다 이 사람도 돌아 맞아 죽어야 돼요 똑같은 죄거든요 아버지를 모욕한 거예요 그 자리에서 하늘의 관점으로는 똑같은 겁니다 이 땅의 도덕적 윤리적 관점으로 한번 보자구요 아버지 재산 다 갖고 나가서 아버지 죽던 말던 창녀들하고 열일곱살도 안된 놈이 가갖고 그걸 다 먹어 버렸어요 도덕과 윤리로 판단했을때 그놈은 죽어야 돼요

이 세상에 도덕과 윤리로 판단했을때 큰 아들의 삶을 한번 판단해보죠 아버지의 말 잘듣고 힘들어도 늘 새벽부터 나가서 아버지 밭에서 일했습니다 아버지를 잘 모셨어요 효자상 줘야 되죠 그러나 그 마음에 중심에 아버지가 없을때 그 둘이 똑같이 돌에 맞아 죽어야 할 존재라니깐요 여러분 잘 분별하셔야 돼요

 

 

 

 

뭐가 착한 거예요 뭐가 선한 것입니까 뭐가 악한 거예요 하느님에 의해 끌려가는자가 선한자인 것입니다 그걸 참이라고 하는 거예요 근데 함부로 우리가 누구를 판단을 합니까?   우리는 하느님에 자녑니다 아들이에요 그런데 잃어버렸다 찾은 아들입니다 잃어버렸다라는건 하느님이 전에 소유한 적이 있다란 뜻이죠 하느님 나라에 완성된 왕자와 공주들이에요 우리들은요

그런데 아버지가 우리에게 뭘 가르쳐 주기 위해 잠시 잃어버림을 자취하시는 거예요 너무 마음 아파서 하늘에서 우리 성자 예수님과 발뒤꿈치를 들고 우리를 내려다 보고 계시면서도 잘 배워 ....거기가 돼지우리야 ....거기가 지옥인 거야... 그게 쥐엄열매야... 이거 배우라고 놔두시는 거예요 그리고 내 아들이 그거 잘 배우고 아버지 아버지가 최고군요 하고 돌아올 때.. 맨발로 뛰어나와 우리를 부둥켜 앉아 주시는 것입니다 그걸 인생이라고 하는 거예요 근데 여기에서 뭘 추구하는 것입니까 

 우리는 이 세상에서 아버지 저는 그냥 지금 아버지가 나 지옥 보내도 아무 할 말 없는 그냥 돼지예요 그냥 아버지 집에 문지기라도 어떻게 안될까요 왜 아버지는 너무 좋으니까 난 자격 없지만 그러니까 그냥 문지기나 종 정도면 안 될까요 이 자리로 내려가면 되는 거예요 그거 배우고 가는 거예요 김대두도 그거 배우고 간 거고 헨리 나우웬도 그거 배우고 간 거예요 각자의 삶의 모양은 다르게 살았지만... 그런데 예수를 믿는다고 하면서도 우리는 우리의 티끌됨이나 종됨을 자각하는거 이전에 우리에 열심과 노력으로 뭔가 업적을 쌓아서 하느님 앞에 가지고 가려는 왜곡된 성실을 내어 놓고 있는 거예요 그걸 자아숭배교라고 하는 것입니다  

우리의 삶 속에서 나오는 성실과 선한 삶이 진짜 하느님에 은혜로 나오는 것인지 아니면 경건병에서 나오는 것인지 어떻게 구별할 수 있는지 아세요 내가 숨어서 어떤 일을 했는데 끝까지 아무도 그 일을 안 알아줘 그때 섭섭하세요 그게 큰 아들의 삶입니다 그래도 누군가 하나는 알아줬으면 하죠 내가 이 고생하는거 그래도 누군가 좀 알아줬으면... 아버지가 너무 감사해서 하는게 아니라 누군가에게 내 가치 향상을 위해서 나에 인기를 위해서 누군가에 보이기 위해서 우리들이 그런 일을 하고 있다면 우리는 위장된 악을 내놓고 있는 거예요 그걸 자기 의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그렇게 큰 아들처럼 유세를 부리실려거든 교회에서 아무것도 하지 마세요 플리즈 아무것도 하지 마세요 밥 안먹어도 되고 뭐 행정 안 돌아가도 돼요 뭘 꼭 밥을 먹어야 돼요 여기서 아무것도 하지 마세요 근데 아버지의 기쁨이 내 기쁨이기 때문에 누가 알아주지 않아도 손발이 부르트도록 그냥 나는 감사함으로 할께요 그러면 숨어서 죽도록 하세요 그거 자체가 우리에 복입니다 누가 안 알아줘도 괜찮아요

 우리의 삶을 한번 돌아보자고요 우리의 삶 속에는 둘째 아들과 큰 아들에 그 더러운 삶이 적절하게 섞여 있죠 나머지는 없어요 그냥 그 두 삶 밖에 없어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느님이 초청을 하세요 아버지가 잔치집으로 그 두 아들을 다 초청하신다 말입니다 들어와....괜찮아 너도 돌에 맞아 죽어야 될 인간이지만.... 그것마저 내가 고칠게 나한테 와 이 잔치집에 들어와서 누려, 먼저 그 하느님의 은혜를 누리세요 그걸 누리다 보면 우리가 하느님께 뭘 해드리고 싶어서 안달이 날때가 있어요 그런데 그걸 누리지 못하고 시작하면 우리들은 피곤해요 나중에는 시키지도 않았는데 욕합니다 저인간때문에 내가 이 고생한다고 저는 분명히 이야기 했어요 하지 말라고 은혜를 누리세요 아버지의 그 잔치를 누리시라 말입니다

 

 백마리 양 중에 한 마리 양 ,열 드라크마 중에 한 드라크마, 두 아들 중에 한 아들...마지막 가장 악한 한 아들 그 아들마져도 건져 내시는 당신에 백성인 그가 창세전에 택해진 당신에 백성이라면 ...무슨 일이 있어도 구원해 내시는 하느님에 약속이 이 비유안에 들어가 있는 거예요 그래서 우리에게 희망이고 복음인 것입니다 얼마나 기뻐요 이 큰 아들이 그냥 쫓겨났으면 어떡할뻔 했어요 우리 다 이 큰 아들인데 초청하신다 말입니다 .얘야 들어와~~ 너도 들어와

 그 잃은 양의 비유에서 하느님이 이상한 말씀을 하세요 잃어버린 양 한 마리를 찾아갖고 와서 동네 사람들과 가족들을 모아 놓고 잔치를 벌인답니다 당시 유대인들의 잔치에는 반드시 양고기가 필요해요 한마리 찾아갖고 와서 한 열마리 잡어야 돼요 응 이런 일이 어디 있어 도대체

이 세상에 소품용 양이 있다란 뜻입니다 하느님에 의해 잃어 버렸던 그 아들인 양이 돌아오면 나머지 양 잡아서 잔치하는 거예요 회개할 것이 없는 아흔 아홉마리의 양 그 양이 뭐예요.... 하늘에서는 잃어버린 양 하나가 돌아오면 회개할 것이 없는 아흔 아홉마리의 양보다 그 한마리 양보다 더 기뻐한다고 그러죠 회개할게 없다라고 생각하는 나는 잘났어요라고 생각하는 그놈들은 회식용 양이라는 거예요 예 그렇잖아요 그게 아흔 아홉마리는 먼저 돌아왔고 나중에 한마리 돌아온 그 양 그 양이 돌아올때 더 기뻐한다면 계속해서 나갔다 들어왔다 나갔다 들어왔다 그래야 되잖아 하느님 기뻐하게 해 드릴라면은 이미 들어와 있는 우리 때문에 하나도 안 기뻐한단 얘기에요? 그게 아니란 말입니다 

나는 회개할거 없어요라는 이 바리세인과 율법학자들과 같은, 우리같은 놈들, 그건 하느님이 전혀 안기뻐 한다는 거예요 내가 돼지인줄을 알고 아버지 꼭 붙들고 절대 안떨어 질거야라고 꼭 붙들고 있는 그 양 그 양이 돌아오는 것만 기뻐하는 거예요 나머진 그냥 회식용으로 쓰는 거예요 아흔 아홉마리 다 잡아 쓸 수도 있어요 너무 기뻐서 하늘에 천군 천사 다 매겨야 되거든요 그래도 괜찮아요 아니 무슨 그런 일이 있어요? 하느님이 하시는 것이기 때문에 선입니다 그렇게 가장 악한 큰 아들까지도 하느님 아버지의 자비를 입을 수 있었던 건 하느님의 진짜 큰 아들이 창녀와 함께 아버지의 것을 허비하고 있는 우리 동생들을 찾아서 이 땅에 내려와서 그들에 삶에 실체를 바로 보게 하시고 돌에 맞아 죽어야 할 그들의 죽음을 십자가에서 대신 죽어서 그들을 아버지께로 돌려보내시는 하늘에 장자역할을 잘 해내셨기 때문이에요

 

아담 이후로 이 세상에온 모든 큰 아들은 다 실패했어요 카인 이스마엘 에서 왜 장자들이 유기되는지 아세요 큰 아들들 이 세상에 아담안에 들어있는 큰 아들들은 전부 실패한다는 그 안에 우리도 들어 있는 거예요 그런데 고린도 전서 15장 마지막 아담 진짜 큰 아들이 오는 거예요 이 비유에서 큰 아들은 동생을 동생 취급도 안했어요 저런거 다 죽여 버러요 저거, 그런데 진짜 큰 아들이 우리를 찾아 내려오셨다니깐요 하늘에서 이방나라로 오셨단 말입니다 찾아와서 그 동생 대신에 자기가 돼지 우리로 들어간 거예요 그걸 십자가라고 하는 것입니다 진짜 큰 아들이 우리 이 더러운 당장 돌에 맞아 죽어도 아무 할 말 없는 더러운 장자들의 죄를 다 짊어지고 죽으신 거예요

그런데 히브리서에 보면 우리들을 장자들의 총회라 그러죠 우리들은 어떤 장자가 되실 거예요 이 비유에 나오는 이런 장자 되실 것입니까 아담 모세 이스라엘 노아 이런 실패한 장자들이 되실 것입니까 아니면 예수와 같이 다른 이들에 실수와 연약함을 덮으며 나도 하느님에 은혜가 아니면 저렇게 될텐데 저들을 위해 더 무릅꿇고 기도해야지 더 섬겨 줘야지 하는 하늘의 삶을 사시겠어요 그 함부로 남들 판단하거나 정죄하거나 제발 교회에서 잘난척좀 하지 마세요 더 숨으시고 더 아래로 내려가십시오

 



우리가 지금은 거울에 비친 모습처럼 어렴풋이 보지만 그때에는 얼굴과 얼굴을 마주 볼 것입니다.

지금은 부분적으로 알지만 그때에는 하느님께서 나를 온전히 아시듯 나도 온전히 알게 될 것입니다.

(고린도전서13장12절)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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