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4월 19일 (금)
(백) 부활 제3주간 금요일 내 살은 참된 양식이고 내 피는 참된 음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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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중 제24 주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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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재형 [umbrella] 쪽지 캡슐

2019-09-14 ㅣ No.132519

잘 자라던 나무도 옮겨 심으면 몸살을 앓는다고 합니다. 뿌리를 새롭게 내려야 하기 때문입니다. 햇빛의 방향이 바뀌기 때문입니다. 나무는 물과 햇빛으로 꽃을 피우고 열매 맺습니다. 물을 다시 찾는 일, 햇빛의 방향으로 잎이 움직이는 일이 쉽지 않을 겁니다. 이곳에 온 지 20일이 넘었습니다. 마음은 그렇지 않은데 몸은 약간의 몸살을 보여줍니다. 나무처럼 새로운 땅에 뿌리를 내리고, 새로운 곳으로 잎을 움직이는 과정이라 생각합니다. 먼저 오신 분들도 다 저처럼, 아니 저보다 더 심한 몸살이 왔을 겁니다. 그분들은 모든 걸 걸고 오셨기 때문입니다. 돌아갈 곳이 없는 사람은 더 비장할 것입니다. 저는 임기가 있고, 돌아가는 저를 받아줄 교구가 있기에 마음 한편으로 여유가 있습니다. 먼저 오셔서 사목하시는 신부님의 말이 떠오릅니다. “저희도 다 그랬습니다. 시간이 지나면 알게 됩니다.” 저도 몇 년 지나면 같은 말을 하겠지요.

 

이집트를 탈출한 이스라엘 백성은 시나이산으로 간 모세를 기다리지 못하고 금붙이를 모아 금송아지를 만들어 경배했습니다. 모세는 하느님께 받았던 새로운 계명을 이스라엘 백성에게 주지 않았습니다. 금송아지를 숭배하는 이들에게 하느님의 계명은 필요 없기 때문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회개하였고, 모세는 다시금 시나이산에 올라 하느님께서 주시는 계명을 받았고, 이스라엘 백성은 하느님의 계명을 따라 약속의 땅으로 갈 수 있었습니다. 금송아지를 만든 이스라엘 백성도 열정이 있었습니다.

 

그렇다면 금송아지는 무엇일까요? 눈에 보이지 않는 하느님의 사랑을 눈으로 확인하고 싶은 인간의 욕망입니다. 하느님의 자리에 다른 걸 채우려는 인간의 욕망입니다. 결국은 사라지고, 결국은 허망할 뿐인 욕망 덩어리가 금송아지입니다. 백성을 도탄에 빠지게 했던 독재자들도 열정은 있었습니다. 인권이 유린 되었고, 부정과 부패가 만연하였고, 사상이 다르다는 이유로 감옥에 가야 했습니다. 1차 세계 대전도, 2차 세계 대전도 열정이 있는 제국주의 정권에 의해서 발생했습니다. 우리는 그것을 민주화의 과정을 통해서 잘 알고 있습니다.

 

하느님을 믿고 따르는 교회도 금송아지를 만든 적이 있습니다. 교회의 이름으로 과학적인 발견과 발명을 단죄하였습니다. 마녀라는 이유로 정당한 재판과정 없이 재산을 몰수하고 처벌하였습니다. 당시 교회도 진정성이 있었습니다. 저에게도 금송아지는 있습니다. 하느님의 뜻이 아닌 저의 뜻을 먼저 생각하는 겁니다. 제안에 거짓된 자아가 참된 자아의 길을 막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왜 금송아지를 만들까요? 열정은 있지만, 방향이 틀리기 때문입니다. 열정이 없는 사람은 금송아지를 만들지도 못 할 겁니다.

 

이스라엘 백성에게 모세가 받아온 십계명은 방향이 되었습니다. 지금도 모세의 십계명은 우리의 열정을 하느님께로 향하는 방향을 제시하고 있습니다. 하느님을 섬기고, 부모에게 효도하고, 거짓말하지 않고, 남의 재물을 탐하지 않고, 살인하지 않는 것입니다. 이것만 잘 지켜도 신앙인으로서 부끄럽지 않게 살 수 있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또 다른 방향을 알려주십니다. 선과 악은 공존하는 것이 아니라, 선의 결핍이 악이라고 하십니다. 빛이 있는 곳에는 어둠은 사라지기 마련입니다. 선이 충만한 곳에는 악이 자리 잡지 못한다고 하십니다. 예수님께서 세우신 새로운 패러다임입니다. 선이 충만한 세상은 잃어버린 한 마리 양을 찾아 나섭니다. 밤을 새울지라도, 거친 들판에서 사나운 이리를 만날지라도 잃어버린 한 마리 양을 찾는 겁니다.

 

예수님께서는 오늘 복음에서 아름다운 이야기를 들려주십니다. 돌아온 아들의 이야기입니다. 저는 저의 어머니를 보면서 오늘의 복음을 더 깊이 묵상할 수 있었습니다. 어머니는 시대를 잘 만나지 못한 작은 형을 늘 걱정하셨습니다. 과묵했던 작은 형은 가끔 집을 나갔습니다. 저는 형의 빈자리를 크게 느끼지 못했습니다. 어쩌면 저의 자리가 조금 넓어진 것을 즐겼는지 모릅니다. 그러나 어머니는 매일 기도하셨습니다. 형이 돌아오면 먹을 수 있도록 따뜻한 밥 한 공기를 따로 준비하셨습니다. 작은 형이 돌아오면 어머니는 무척 기뻐하셨습니다. 사랑으로 대하셨기 때문입니다. 작은 형이 돌아오면 저는 담담했습니다. 이성으로 대했기 때문입니다. 저 역시 열정은 있었지만, 어머니와 같은 사랑은 부족했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나오는 큰아들도 열정은 있었습니다. 아버지를 위해서 성실하게 일했습니다. 향락에 빠진 동생과 유산을 똑같이 나눠주는 아버지에게 불평도 없었습니다. 그러나 방향이 틀렸습니다. 아버지의 집에 있었지만, 아버지와 함께하지 못했습니다. 아버지의 기쁨을 자신의 기쁨으로 받아들이지 못했습니다. 돌아온 동생을 반갑게 맞이하지 못했습니다. 큰아들처럼 살았다면 돌아온 아들을 따뜻하게 맞이한 아버지처럼 돌아온 동생을 따뜻하게 품어주는 사랑을 가지면 좋겠습니다. 아직도 방황하는 작은아들처럼 살고 있다면 방향을 돌리면 좋겠습니다.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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