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량대는 대회 첫 경기에서 예선 탈락의 수모를 맛 보았다. 하지만 철민은 그 날 기분이 좋았다. 패전처리용이었지만 실전에서 처음으로 흡족한 투구를 하였다 는 자신감을 가졌다. 철민을 아끼는 투수 코치도 경기 승패에 관계없이 철민의 성장에 대해 만족감을 보였다. 덕아웃으로 들어 오는 철민에게 아낌없는 칭찬을 해주었다. 찬오는 자신을 보러 왔던 메이저리그 관계자들의 눈치를 살폈다. 만족할 만한 수준의 투구 내용이 아니었기에 다소 의기소침해 졌던 찬오는 그들의 표정을 살 필 수 밖에 없었다. 감독은 기대했던 이 번 대회에서 일회전 탈락이라는 것에 기 분이 나빴는지 경기가 끝나자 마자 소리 없이 사라졌다. 메이저리그 관계자들을 본체만체 했다. "굳!" 메이저리그 관계자 중 한사람이 철민에게 관심을 보이며 칭찬의 한마디를 던졌 다. 철민은 별로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다. 그 사람의 한마디가 나중에 자신의 야 구 인생에 큰 변화를 주게 될 지는 알지 못한채 그냥 자신의 오늘 투구 내용에 만족하며 흡족해 하기만 했다. "땡큐!" 경기가 끝나고 메이저리그 관계자들은 찬오의 어깨를 두드려 주며 계속 지켜 본 다는 암시를 해 주고 사라졌다. 그리고 명함 한장을 투수 코치에게 건넸다. 그리 고 투수 코치의 영어 실력으로는 알아 듣지 못하는 말을 지껄이며 껄껄 웃고 나 갔다. 해석을 해 보자면 이랬다. "이 학교에는 찬오 말고도 제법 가능성이 있어 보이는 투수가 한 명 더 있군 요." 찬오의 메이저리그 진출설은 이 경기가 끝나고 나서 한 동안 잠잠해 졌었다. 철민은 경기가 끝나고 선수들이 장비를 챙기고 샤워를 하는 동안 현주와 지윤을 만났다. 철민은 오래전부터 이들 둘을 따로 생각하고 있었다. 철민은 경기장에 서 관중석에 있는 둘을 볼 때와는 다른 어색함을 가졌다. "너 정말 야구 선수 맞구나." 야구 상식이 별로 많지 않던 지윤이도 오늘 철민이가 던지는 모습을 보고 난 뒤 잘 던졌다는 느낌을 받은 것 같았다. "그,그래." "저 번 보다 확실히 발전한 것 같다." 이미 철민이가 실전에서 던졌던 모습을 본 현주도 오늘 철민이가 잘 던졌다는 사실을 말해 주었다. "응." 철민은 현주를 보면서 지윤이에게 미안했고, 지윤을 보면서 현주에게 어색함을 가졌다. 그것이 무얼 의미하는지 철민은 알지 못했다. 철민은 현주만 만났다면 그토록 친해지고 싶었던 그녀와의 만남에 대해 성취감과 동시에 앞으로 더 친해 질 수 있다는 자기위안을 가졌을 터이고, 지윤이만 보았다면 비밀스런 자신의 생 활에 대한 불안감을 떨칠 수 있었을 것이다. 철민은 지금 둘을 보며 어색하다. "자주 와 봐야 겠네." 현주의 말은 어색함이 없다. 그러나 지윤은 현주의 말을 듣고 분위기가 어색하 다. "나도 자주 와 볼게." "나 이제 들어 가봐야 돼. 오늘 와 주어서 정말 고마웠다. 오늘 경기에 졌기 때 문에 분위기가 별로 안 좋아. 나만 혼자 빠져 나올 수 없을 것 같다. 다음에 보 자." 철민은 그 둘의 어색함 때문에 생각한 시간보다 훨씬 짧은 시간만 그 둘과 함께 하고 동료들에게 돌아 갔다. 대회가 끝이 나기도 전에 한량대는 동계 훈련에 들어 갔다. 아직 겨울이 되지 않았지만 올해 한량대의 성적은 좋지 못했다. 단 한번 4강까지 올랐을 뿐, 대부 분 예선 탈락했다. 감독은 지금의 멤버들로 봐서 한 번은 우승 할 수 있었다는 생각이 있었다. 자신의 팀에는 다른 학교에는 한명도 있을까 말까한 국가대표 선 수가 네명이나 있었으며, 특히 올해 학교에서 많은 노력을 투자해 좋은 고교 선 수들을 많이 스카웃했었다. 고,년대에 못지 않게 좋은 선수들이 있었다. 그런데 도 올해 한량대의 성적은 예년 보다 못했다. 동계 훈련을 빨리 시작한 것은 분위기 탓도 있었다. 아직 찬오의 메이저리그 진 출설로 팀내 분위기가 어수선했다. 감독은 찬오의 메이저리그 진출설이 물건너 갔다고 생각했다. 빨리 그 어수선한 분위기를 떨쳐 버리고 싶었다. 한량대 야구 감독은 올 겨울에 프로팀처럼 외국으로 전지 훈련을 갈 생각까지 하고 있었다. 동계 훈련이 시작되면서 철민은 야구 동료들 외에 다른 사람들을 잊어야 했다. 철민은 이제 본격적으로 투수로서 갖추어야 할 기술들을 배우기 시작했다. 그리 고 잠들기 전, 잠에서 깨어나 다른 선수들이 쉬는 동안에도 몸만들기를 위한 개 인 운동도 하루를 거르지 않고 열심히 해야 했다. 투수 코치 윤석호씨가 찬오나 다른 에이스 급 투수들에게도 보이지 않던 관심을 철민에게 쏟았다. 철민은 야구 를 시작한 후 처음으로 육체적으로 힘이 든다,라는 느낌을 받았다. 철민은 올 한 해가 다 가기 까지 구질을 다양화 하는 훈련을 하지 않았다. 11 월, 12월 계속 컨트롤을 잡기 위한 연습과 수비 연습에 중점을 두었다. 체력 훈 련은 두말 할 것 없이 계속 되었다. 크리스 마스 이후 년말이고 곧 새해가 되는 시점에서 철민은 잠시 짬을 낼 수 있었다. 서울에서 철민이가 찾을 수 있는 사람은 현주 뿐이었다. 지윤이는 철민이 동생 인 혜지가 집으로 내려 갈 때 동행을 했다. 지윤이는 혜지가 자기 오빠에 대한 의심이 늘어가자 그것을 무마 시키기 위해 일부러 집에 내려 갔다. 그것을 철민 은 알지 못했다. "이것들이 나만 빼놓고 둘이서 집에 내려 갔다 이거지?" 철민이는 또 무턱대고 찾아간 지윤의 아파트 현관 앞에서 열어 주지 않는 문 앞 에다 대고 짜증섞인 말만 남겨 두고 돌아 서야 했다. "누구세요?" "나야, 너 오빠." 철민이는 지윤이네 아파트 근처에서 여러군데 전화를 때릴 마음으로 처음 집에 다 연락을 취했다. "가만 울 오빠가 있었나?" "장난치지 마." "무슨 공부 할게 많아서 나 집에 내려갈 때도 볼 수가 없었냐?" "공부?" "지윤이 언니가 오빠가 밀린 공부가 많다면서 참 열심히 한다고 말하던데?" "그러냐? 그럼 그런거지 임마. 아버지는?" "계셔. 바꿔 줄까?" "그래." 철민이는 잠시 멀뚱하게 하늘을 보았다. 시린 하늘이 참 파랗다. "너 왜 집에 연락이 뜸하냐? 서울에서 혼자 뭐하는 거야? 집에 안내려 올거냐?" "바빠서요." "뭐가 바빠?" "에..." "열심히 공부하는 것도 좋지만 집에 한 번 내려 오너라. 내년엔 서울에다 집을 하나 장만할 셈이다." "에?" "아직 결과 발표는 나지 않았지만 지윤이 동생이 서울 가면 혜지가 있을 만한 데가 없잖아. 너도 하도 연락이 없고 해서, 둘이 같이 살게 하려고." "그러면 안돼는데..." "뭐시라? 이 애비가 자식을 위해 이제야 투자를 좀 해 보려는데 그러면 안돼긴 뭘 안돼." "알았어요. 곧 집에 내려 가 보겠습니다." "그래라. 년초에는 집에 있어야지." 철민은 시간이 흘렀다는 사실을 인지했다. 아버지의 말씀에 불안할 만도 했으 나 철민은 횟수로 이년 동안 자신이 야구 한다는 사실을 집에서 모르고 있다는 안위에 젖어 있었다. 해결할 방법이 있을 거란 낙천적인 생각에 별로 불안해 하 지는 않았다. "여보세요. 저 철민인데요." "어, 철민이구나. 잠깐만." 확실히 지윤이 집에서는 철민가 낯설은 존재가 아니었나 보다. 지윤의 어머니 는 친절하게 지윤을 찾지도 않았는데 지윤을 바꿔 주었다. "너도 일찍 내려 갔었나 보네." "응." "고맙다. 혜지에게 날 잘 변명해 주어서." "그래." "여기 너네 집 앞이야." "응? 너 집에 내려 왔니?" "아니, 서울 너네 아파트 앞이라고. 문이 잠겨서 들어 가지는 못했지만." "난 또." "잘 살고 있지?" "그런데로." "나, 내일이나 모레는 집에 내려 갈거야. 그때 한 번 보자." "그 듣던 중 반가운 소리네." "그려." 철민이는 자신은 고된 훈련에 사람들을 잊고 있었지만, 지윤이는 늘 자신을 생 각해 주고 있다는 사실에 기분이 좋았다. "훈련하느라 많이 바쁘지?" "응, 너는 집에서 뭐 하냐?" "나? 나 오늘 소개팅 한다." "뭣?" "왜 놀라니?" 철민이도 왜 과민 반응 보였는지 좀 의아했다. 목소리를 가다듬고 말을 이었다. "잘해 봐라. 너네 동생 합격자 발표 날려면 멀었냐?" "우리 동생 올해 시험 본 것은 그래도 알고 있네. 내일쯤 발표 날 걸." "그런데 언니라는 게 오늘 소개팅 한단 말여?" "왜? 하면 안돼니? 기분 나쁘니?" "기분 나쁘면?" "넌 아직 많이 순진해서 좋아." "갑자기 무슨 말이야." "넌 표정에서 뭘 잘 들켜." "뭘 잘 들켜? 아직 집에 나 야구 하는 거 안 들켰어." "오늘은 시간이 남나 보지?" "그래. 휴가 받았다." "대학생이 휴가 받았다 그러니까 좀 이상하다." "이상해도 어쩔 수 없다. 놀 친구가 없어서 많이 심심하다." "왜? 현주 서울에 있을 걸." "응?" "너 현주하고 제법 친해 진 것 같더라." "현주는 서울에 있냐?" "그럴걸, 걔 오빠가 올해 졸업하느라 바쁘잖아. 뒷바라지도 할겸 계속 서울 있 을 거라 그러던데." "그러냐?" "심심하면 걔 만나." "그래도 되냐?" "그걸 왜 나에게 물어 봐." "그럼 연락 해 봐야 겠네. 근데 만나 줄까?" "흠, 너 또 들켰어." "뭘 자꾸 들켜 임마." "나 소개팅 잘 할 테니까, 넌 현주 잘 만나라. 안녕." '이게 먼저 전화를 끊어?'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