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을이 깊어 날씨는 조금씩 쌀쌀해지고 있다. 한량대 야구부원들은 그래도 땀을 흘리며 훈련 중이다. 실업과 대학이 모두 참가하는 한해를 마무리 하는 대회가 곧 있을 것이다. 국제 대회를 참가한 국가 대표 선수들도 조만간 복귀를 할 것이 다. 울 나라 국가 대표 팀은 4강에는 올랐으나 결승 진출은 어려울 것 같았다. 세계 최강 쿠바팀과 4강에서 맞붙게 되었다. 철민은 여전히 제구력 중심으로 훈련을 받고 있다. "김철민 다리를 너무 치켜 든다." 철민은 찬오의 말 때문인지 발을 유난히 치켜 들려 하고 있다. 찬오에 비해 턱 없이 적게 올라 가는 발이었지만 예전보다는 많이 높아졌다. "투구폼을 좀 바꿔 보려구요." "뭐 땜에?" 투수 코치가 어이가 없다는 듯, 철민이를 쏘아 보았다. "혹시 제구력이 향상되지 않을까 해서요. 그리고 멋있잖아요." "멋 하나도 없어. 너 투구폼은 나무랄 데가 없어. 단지 공을 조금 빨리 놓는다 는 것 뿐이지. 다리 치켜 들면 너 맞는다." 철민이는 금방 예전 동작으로 공을 던지기 시작했다. 맞기는 싫었나 보다. 철민 이는 코치가 지적해 주는 데로 공을 천천히 놓았지만 일년 넘게 공을 일찍 놓는 버릇은 잘 고쳐지지가 않았다. 다른 선수들에 비해 기합이나 야단을 덜 맞던 철 민이도 이제는 다른 선수들과 마찬가지였다. 투수코치가 철민이에게도 기합을 주 기 시작했다. 해가 많이 짧아졌다. 어둠이 깔리는 운동장 한쪽 편에서 철민은 연신 팔굽혀 펴 기를 하고 있었다. 어깨가 많이 튼튼해 졌는지 팔굽혀 펴기 100개 정도는 쉽게 하는 철민이었다. 거의 100개를 채워 갈 무렵 선수들은 하루의 훈련을 마치고 도 구들을 챙기고 있었다. 그리고 누군가 철민이 근처로 왔다. "너, 이제 그만하고 들어 가서 쉬래." 철민이는 팔굽혀 펴기를 하다 꿈적 놀랐다. 목소리가 낯익은 여자의 목소리였 기 때문이다. 철민이는 팔굽혀 펴기를 멈추고 땅바닥에 털썩 배를 깔았다. 그리 고 고개를 들어 금방 말을 한 여자애를 쳐다 보는 대신 운동장 저편 투수코치를 바라 보았다. "훈련 끝났으니까 그만하고 쉬어라. 그리고 너 면회 왔나 보다." 투수 코치는 고개를 철민이 바로 옆으로 들어 주었다. 그에 맞추어 철민이도 고 개를 돌렸다. "네가 여긴 어떻게..." 철민이가 고개를 돌린 곳에는 지윤이가 서 있었다. 지윤이의 표정은 약간의 원 망스러움과 약간의 웃음을 동시에 가지고 있었다. "현주에게 물어 보라고 했잖아. 너 진짜 야구 선수 된거야?" 지윤이는 철민이와 눈을 맞추기 위해 서 있던 자세를 앉은 자세로 바꾸었다. 철 민이도 누워 있던 자세를 앉은 자세로 고쳐 잡았다. "현주가 얘기 해 주던?" "응. 머뭇거리다가 네가 말해 주어도 된다고 했다니까 조심스럽게 얘기 해 주더 라." "그렇다고 여기까지 찾아 오냐?" "조금 믿기가 어려워서 내 눈으로 확인해 보려고." 철민이는 머리를 벅벅 긁었다. 그리고 운동장 정리를 하는 동료 선수들을 바라 보았다. "나, 저학년이야. 도구 정리 하는거 도와야 되거든? 너 여기 잠깐만 기다리고 있어라." 철민이는 지윤이가 자기를 찾아 온 것이 당황이 되었다. 급히 자리를 박차고 일 어나 운동장에 있는 선수들에게로 뛰어 갔다. 지윤이는 그런 철민이의 모습을 보 며 자리를 앉을 만한 곳으로 옮겼다. "너 운동장 정리하는 거 안해도 돼. 우리가 할테니까 니 애인한테나 가 봐라." "야, 나는 야구 인생 10년이 다 되어 가지만 아직 여자가 면회 온 적이 없는 데... 철민이는 확실히 잘난 놈인가 봐." "형 애인이 참 예쁘다." 운동장 정리를 하던 동료들은 철민에게 농을 던지며 철민이가 자신들을 도울 필 요가 전혀 없다는 행동을 취했다. "아이쒸, 애인 아니에요. 그리고 제 도구라도 제가 챙겨야지요." "니 글러브랑 백은 코치님이 벌써 들고 들어 가셨어." "엥?" "너는 가서 저 아가씨랑 데이트나 해. 아이고 배 아파라." 철민이는 멀뚱하게 운동장에 서 있다가 고개를 돌려 지윤이를 쳐다 보았다. 지 윤이가 자신을 기다리고 있다. "저 그러면 그냥 갈테니까, 나중에 다른 말 하기 없기에요?" "나중에? 내가 삼학년인데 운동장 정리하는 거 보면서 느끼는게 없냐? 내일은 너 혼자 해." 선배 하나가 철민이에게 웃으며 답을 해 주었다. '니 뿡이다. 씨.' 철민이는 이렇게 생각하고는 지윤이에게로 발걸음을 옮겼다. 철민이는 지윤이 곁으로 갔다. 그리고 어색하지 않던 지윤에게 약간 어색한 표 정으로 인사를 했다. "안녕." "그래, 안녕." 지윤이도 조금 어색한 모습이다. 철민이의 인사를 받아 주면서 시선은 철민이 가 아닌 운동장을 향했다. "나 진짜 야구부원이야." "그런거 같다. 저기 저 사람들과 입고 있는 옷이 너와 같다." "이상하냐?" "많이." 예전 현주는 철민이가 입고 있던 유니폼을 보고 잘 어울린다고 했으나 지윤이 의 대답은 달랐다. "어떻게 왔냐?" "너 야구하는 거 확인하러 왔다고 했잖아." "확인한 소감은?" "너 나뻐." "왜?" "나에게 숨길 필요가 있었니?" "얘기 할 이유도 없었잖아." "그러니까 너 나뻐." 지윤이가 철민이를 쏘아 보았다. 철민이도 그런 지윤이를 쏘아 보았다. "내가 야구 하는 게 싫냐?" "그게 싫다는 게 아냐." "나 공부 때려 치웠다. 나 운동 선수야." "그것 때문에 바빴니? 그래서 널 자주 볼 수 없었던 거야?" "그렇다고 볼 수 있지." "그랬구나. 너 야구 선수 된 거 후회하지는 않니? 성공할 자신은 있구?" "그런데로 성공한다는 희망은 가지고 있지. 야구 선수 된 거 아직은 후회 같은 것 하지 않아." "혜지에게는 얘기 하지 말라고 했지?" "그래. 진짜 얘기하면 안된다." "너 하는 거 봐서. 괜한 짓 하는 것 같으면 혜지가 아니라 니네 집에 바로 연락 할거야." "너 씨." "지켜 볼게. 진로를 바꾸어서 힘든 일이 많겠다. 내가 힘이 될 수 있으면 좋겠 다." "엉? 나 야구 선수 된 거 이상하지 않냐?" "이상해." "그럼 앞으로 날 대하는 태도가 달라 지겠네?" "당연히." "그래, 잘 살아라." "무슨 말이 그러니?" "앞으로 서먹해 질 것 같으니까." "너 날 서먹하게 대할 거니?" "아니." "근데 왜 그런 말을 해?" "날 대하는 태도가 달라 질 것이라면서?" "너 생활이 달라져 있으니까 그에 맞추어 널 대해야 될 것 아냐. 서먹해지긴 왜 서먹해 지냐?" "서먹해 질 걸." "너 저번에 얘기한 걸 들어서 알아. 그리고 네 성격이 사람을 그 잘난 성적으 로 대하는 태도가 있다는 것도 알아. 내가 너 운동 선수라 멀리 할 것 같다고 생 각하는 거니?" "응." "이상한 성격이 있다 너." "나만 그렇냐? 다들 그래." "너 멀리 하지 않을거야. 그리고 너 야구 하는 거 알았으니까, 앞으로 어려운 일 있으면 내게 말해. 애매한 비밀 만들어 사람 질투하게 하지 말고." "질투?" "너 운동하는거 딴 사람에게 들었잖아." "현주는 너 친구잖아? 전혀 모르는 사람처럼 얘기한다?" "하여튼 별로 기분 좋지 않았어. 너 땀냄새 많이 난다." "안 씻었으니까. 오늘은 시간을 내기가 힘들겠다." "그런말 안해도 곧 갈거야. 경기 있을 땐 얘기 해 주어야 한다." "나는 아직 출전하지는 못해." "그래도 알려 줘." "알았어." "들어가 봐라. 나 갈게." "그래. 혜지에게는 꼭 비밀이다." "그럴게." "흠, 좀 마음이 트인 거 같다." "간혹 찾아 올게. 안녕." "잘가라." 철민이가 야구 한다는 걸 아는 사람이 한 사람이 늘었다. 철민이는 지윤이에게 자신이 야구한다는 것을 들키고 나자 마음 여러 구석이 편해 지는 느낌이 들었 다. 잘못하면 집에서 자신이 야구한다는 걸 알게 된다라는 불안감 보다 누구 하 나 기댈 수 있는 사람이 생겼다,하는 생각이 들었다. 현주에게 들켰을 때와는 느 낌이 달랐다. 철민이는 지윤에게 야구 하는 걸 들킨 날, 감독에게서 울 나라 야구 대표팀이 쿠바팀에게 졌다는 소식을 들었다. 자신이 야구 선수라 그런지 예전에 국가 대표 팀이 패배했다는 소식을 들을 때와는 느낌이 많이 달랐다. 삼일 뒤면 국가대표팀 에 있던 동료들이 팀에 합류할 것이다. 쿠바전에서 찬오가 아주 잘 던졌다는 소 식도 들었다. 철민이는 그 말을 듣고 기분이 좋았다. 철민에게 아직은 경쟁심 보 다는 순수한 운동선수로서의 생각이 지배적인가 보다. 철민은 자기 동료가 잘했 다는 소식에 다른 생각없이 그냥 기분 좋았다. 철민은 다음 날 스포츠 신문에서 낯선 기사를 보았다. '메이저리그 엘에이 다졌어 에이전트 박찬오에게 관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