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7편. 대학 2학년의 여름방학도 끝이 났다. 지윤은 올해도 철민이와 추억이 될 만한 일을 만들지 못한데서 서운해 했다. 점점 만나기 어려워 지는 철민을 보면서 거 리감을 느꼈다. 철민은 그걸 알지 못한 채 야구란 것에 푹 빠졌다. "82개째다. 어깨 아프지 않냐?" "괜찮습니다." "성수야 속도는 어떻냐?" "예, 꾸준히 140 후반대와 150 초반대를 유지하고 있습니다." "음. 철민아, 이제 그만하자." 철민은 더위가 한 풀 꺽인 늦은 오후, 다른 선수들은 휴식을 취하는 동안 투수 코치가 직접 해주는 지도를 받으며 전력 투구를 해 봤다. 공의 방향은 아직도 포 수가 잡기 힘들 정도로 위,아래,좌우를 가리지 않았지만 공의 속도는 꾸준했다. "아직 더 던질 수 있는데요." "그만 해, 무리하면 안 좋아. 아직 컨트롤 연습을 많이 해야 겠다." "예." "그래도 체력적으로 넌 확실한 선발 투수감이다. 내년 후반기 쯤 되면 실제 시 합에서 충분히 써 먹을 수 있지 않을까 싶다." "내년 후반기요? 그렇게 늦게요?" 철민은 빨리 시합에 나가고 싶었다. 진짜 경기에서 받는 느낌을 당장이라도 느 끼고 싶었다. 내년 후반기면 앞으로 일년이 더 남은 시점이고 자신의 대학 시절 도 거의 다 지나간 때이다. 이제 자기 생각으로는 조금만 더 다듬으면 일반 투수 들과 별반 다를게 없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천천히 확실하게 하자. 너무 서두르지 마." 구월달이 넘어 서면서 한량대 야구부에서도 국가 대표로 몇 명이 차출되었다. "좋겠다. 씨." "형도 잠재력에서는 충분한 국가 대표급이니까 너무 걱정 말아요." "너 국제 대회 나가서 발 너무 치켜 들지마." "에?" "너 투구 폼 말이다." "놀란 나일론이 그렇게 던진단 말이에요." 철민은 국가 대표로 차출되어져 팀을 잠시 떠나는 선수들이 부러웠다. 선배들에 게는 그 부러운 심정을 말로 표현 못했지만 후배겸 제법 친한 찬오에게는 그 심 정을 표했다. "나일론이 메이저리그에 그 유명한 강속구 투수냐?" "예. 내가 제일 좋아하는 선수에요." "나도 그 사람 투구폼으로 바꿀까?" "형 발이 저 만큼 올라가요?" "안 올라간다." "그럼 포기하세요. 다른 사람 흉내내요." "나는 동얄이 형이 좋다. 하여간 잘 가라. 졸라 부럽다." "그러고 보니까 형 투구폼이 선동얄 형 폼하고 좀 비슷한 것 같아요. 형, 우리 없는 동안 많은 발전 있기를 바랄게요. 잘 있으쇼." "그려. 너 공 아무데나 던지지 마라. 그리고 화난다고 발차기도 하지 말고." 한량대에서 네 명이 국가 대표로 팀을 이탈했다. 추계 대학 야구 대회 때는 대학의 여러 팀에서 확실한 주전들이 국가대표로 차 출되어져 조금 가벼운 분위기였다. 한량대도 주전 네명이 빠졌다. 하지만 철민이 에게 출전 기회는 주어지지 않았다. 철민은 벤취에 앉아 여느 때처럼 감독 옆에 서 한마디 말만 뱉을 뿐이었다. "으씨, 야구는 저렇게 하는 게 아니지." 감독이 그런 철민이를 물끄러미 쳐다 보았다. "나가고 싶냐?" "예, 후보 김철민. 졸라 나가고 싶습니다." "그래? 거기 앉아서 푹 쉬어라. 쉬기 싫으면 선배들 물이나 떠다 주던지." 철민은 여전히 벤취신세였다. 철민은 추계대회가 끝날 때까지 예전의 자기 주위에 있던 사람들을 잊고 살았 다. 훈련에만 열중했다. 자기가 야구를 한다는 것을 아는 사람이 두명 있기는 했 지만 철민이의 생활은 깊은 산 중에 숨어 사는 사람처럼 은둔적인 생활이었다. 자기가 연락을 하지 않았기에 자기 주위에 있던 사람에게서 아무런 연락을 받지 못했다. 현주는 철민이가 야구를 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지만 철민에게 애 써 연락을 취하지는 않았다. 철민이는 그 사실에 섭섭해 하지 않았다. 무감각했 다. 철민이 자신도 현주를 많이 생각하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그렇지만 철민이 의 생각속에서 현주는 짝사랑의 대상으로 아무런 변화가 없이 존재하고 있었다. 미래에 대한 하나의 희망이라고 봐도 될 것이다. 대회가 끝나고 철민에게 여유 가 찾아 왔다. 짝사랑의 대상인 현주는 철민이의 마음속에서 잊고 있으나 생각하 고 있으나 그리운 정도의 변화가 없었다. 그렇지만 지윤은 달랐다. 현주와는 비 교가 되지 않을 정도로 공유한 기억이 많은 지윤은 공유하지 못한 시간들이 길 어 질 수록 잊지 못했기에 점점 더 그리운 대상으로 다가 왔다. 여유가 찾아 오 고 자기 주위의 사람들을 생각하자 철민에게서 가장 먼저 떠오르는 사람은 지윤 이었다. 철민이는 지윤이가 많이 보고 싶었다. 철민이는 무려 두달 만에 지윤이 네를 찾아 갔다. 두달 만에 지윤이를 찾아가는 철민이의 심정은 여전히 당당하 고 자연스러웠다. 자기가 간다는 전화 연락 한 통 없이 철민이는 불쑥 지윤이네 를 찾았다. "누구세요?" 지윤이의 목소리가 들렸다. "나 철민이야." 문이 열리고 지윤이의 모습이 보였다. "응? 너 어쩐 일이냐?" "너 보려고 왔는데 왜?" "나를 왜 보려고?" 지윤이는 철민이에게 마음이 삐친 모양이다. 지윤이가 철민이를 마음에 두고 생 각한 대학 생활이 벌써 이년이나 어긋나 버렸다. 내가 생각하기로도 삐칠만 하 다. "보고 싶으니까." "잠시 생각난거지 그치?" "뭐가?" "내 생각 난 것 말이야." "응." "너, 가. 씨..." "우쒸, 여기까지 왔는데 문전박대하냐?" "너 도대체 어디서 뭘 하는거야?" "뭘?" "혜지랑 너 찾아 너네 학교 갔던 적이 다섯번이 넘는다. 너 딴 짓 하지? 피부 탄 것 좀 봐." "열심히 공부한다. 좀 들어 가면 안돼냐? 혜지는 없나 보네." 철민이는 지윤의 말에 자기의 노출된 피부를 훑어 보고 씩 웃고는 아파트 실내 로 막무가내로 들어 갔다. "너 현주랑 몇 번 만났었지?" "응?" "현주가 너 만난 얘기 했었어. 그리고 뭘 말하려다가 그냥 얼버무려 버리곤 했 어." "현주가 내 얘기를 하디?" "그래." 단순한 철민이었다. 자기가 짝사랑하는 사람에게서 자기 얘기가 나왔다는 것이 철민에게는 기분 좋은 일이었다. 철민이는 웃으면서 답을 했다. "무슨 얘기 하던데?" "별 얘기는 아니었어. 그냥 너에게 잘해 주라는 말만 하더라. 그건 그렇고, 너 어디 있는거야? 네 자취방은 항상 잠겨 있었어." "잠궈 놓았으니까 잠겨 있지. 현주가 나한테 잘하래? 헤헤, 그래 나한테 잘해야 지." 철민이는 계속 딴청이다. "야, 김 철민. 잘해 주고 싶어도 널 볼 수가 있어야 잘해 주지. 너 분명 딴 짓 하고 있어. 연애하니?" "엉? 내 나이가 몇인데 벌써 연애를 하냐. 착실하게 학교 생활하고 있으니까 꼬 치꼬치 묻지 마라." "혜지가 너 수상하다구 집에다 오빠 좀 챙기라고 전화 자주 했었어." "뭐야? 지가 언제 나에게 관심을 가졌다고 그런 전화를 해." "그러니까 자주 연락 좀 해." "그래, 지윤씨 잘 살았냐? 좀 이쁘진 것 같기도 하다." "흠, 넌 잘 살았니?" "그런대로. 현주는 자주 찾아 오나 보다." "예전 만큼은 아니지만 너보다는 훨씬 자주 찾아 와." "내가 연락이 뜸해서 섭했냐?" "그렇다." "그렇냐? 쩝." "그래, 연락이 없으니까 괜히 딴 생각이 들잖아." "무슨 딴 생각?" "걱정도 되구, 서운한 감정도 많이 들구." 철민이가 지윤이의 얼굴을 찬찬히 살폈다. 자신을 대하는 지윤의 모습에는 꾸임 이 없었다. 철민이가 한동안 생각에 잠기더니 조금 엄숙한 표정으로 말을 했다. "그렇냐? 그럼 나중에 현주 만나면 내가 말해도 된다고 그러구 내가 하는 일 물 어 봐." "너 따로 하는 일 있어? 너 진짜 딴 짓 하는구나." "비밀이 한가지가 있지." "근데 그걸 왜 현주에게서 들어야 되는데?" 지윤의 표정에 상당한 변화가 있어 보였다. "내가 말하기가 좀 힘들다. 내가 다른 일을 하는데 아직 떳떳하지 못한 처지 야." "그걸 현주에게는 말했는데 나에게는 말하기 힘들다는 거야?" 지윤이의 목소리가 살며시 떨렸다. "말하기가 좀 그래." "현주랑 자주 만났나 보네. 조금 섭하네." "뭘 자주 만나." "근데 현주에게는 말하고 내겐 왜 말하지 않는거야. 삼자를 통해서 네 얘기를 듣는게 기분이 나쁠 것 같아. 직접 말해 주면 안되니?" "말하기 껄끄럽다니까, 그리고 현주에게서 내 비밀을 듣게 되거든 혜지에게는 절대 말하지 마라." "니가 직접 얘기 해주면 그렇게 할게. 나쁜 일은 아니지?" "말 못해." "왜?" "그냥." "뭘 하는데 그래?" "그런 일이 있다." "현주에게는 말하고 내게는 말 못한다? 내가 너에게 현주보다 못한 존재니?" "무슨 말이 그러냐? 너 말하는게 꼭 질투하는 것 같다." "그래 질투한다. 왜 현주한테는 말하고 나에게는 말 못하겠다는 거냐?" 지윤의 얼굴에서는 진짜 질투하는 표정이 역력했으나 철민은 전혀 눈치를 채려 하지 않았다. "현주에게도 말 안했어. 들킨 거지." "응? 들켜? 무슨 나쁜 짓 하니? 그걸 현주한테 어떡하다 들켰는데?" 혜지의 표정엔 철민이가 나쁜 짓 하는 것 같아 걱정하는 모습보다 철민이가 그 비밀스런 짓에 대해 현주에게는 말하고 자신에게는 말하지 않는 것이 아니란 사 실에 대한 반응이 더 커 보였다. "우리 아버지가 알면 나쁜 짓인데 사회적으로 볼때 나쁜 짓은 아냐. 현주에게 는 저거 오빠 때문에 들켰어." "도대체 무슨 일이야?" "혜지에게는 절대 말하지마라." "그럴게. 무슨 일이야?" "현주에게 물어 봐." "야!" 지윤이가 버럭 고함을 질렀다. 철민이가 꿈적 놀랐다. "놀랬잖아 씨. 너 내가 공부 포기했다 그래도 친구 할 수 있냐?" "응?" "여전히 가까운 사이일 수 있냐고?" "공부를 포기해? 무슨 일인데? 그리고 그게 너랑 친구하는데 무슨 상관이야?" "그럼 현주에게 물어 봐." 지윤이의 기분과는 상관없이 철민이는 현주와 가깝게 느껴지는 저 말을 하는 것 에 기분이 좋았나 보다. 철민이는 결국 자기가 야구를 하고 있다는 사실을 지윤이에게 얘기 하지 않았 다. 철민은 지윤의 집에서 동생인 혜지가 올 때까지 있다가 갔다. 철민은 지윤이 에게서 그 동안 주위에서 일어난 잡다한 일들의 얘기를 듣고 혜지가 귀가하자 바 로 자리에서 일어 났다. "오빠?" "그래 내가 니 오빠다." "오빠 얼굴이 왜 그래?" "내 얼굴이 뭐 어때서?" "씨름선수 같아." "뭐여? 보자마자 하는 소리가 겨우 그딴거야?" "진짜 씨름선수 같아. 지금 가는거야?" "그래. 너 봤으니까 가야지." "오빠 살아 있긴 있었나 보네." "그럼 내가 죽었냐?" "소식이 없어서 난 혹시나 했지." 옆에서 지윤이가 철민이를 마중하다 웃으며 혜지의 말을 거들었다. "그러니까 연락 좀 하고 살아." "알았어. 지윤이 너 진짜 비밀 지켜야 된다." 철민이는 그 말 한마디를 남기고 지윤이네를 떠났다. 철민이는 걸으면서 씩 웃 었다. 지윤이의 모습이 생각지 못한 그리움이었단 사실을 알았다. 처음 자연스럽 게 찾아갔을 때와는 달리 지윤이를 보고 난 다음 그 애가 다시 보고 싶은 생각 이 들었다. 야구는 희망이 보이기는 해도 아직은 막막한 상태였다. 철민이가 생 각하는 또 다른 희망이 보이기는 해도 막막한 것이 현주의 모습이었다. 오늘 지 윤이를 보고 난 철민의 마음에는 그런 막막한 것들과는 다른 편안함이 있었다. 철민은 자기가 야구를 하고 있다는 것을 지윤이가 알게 된다 해도 그 애는 예전 처럼 자기를 친하게 대하여 줄 것 같은 느낌을 받았다. "야, 나 공부 때려 치우고 야구 한다." 잘 걷던 철민이는 괜히 뒤돌아 서 지윤이가 사는 아파트에다 대고 소리내어 말 한마디를 뱉었다. 계속